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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Oct 27. 2022

조영석, 김득신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1686년,숙종 12년~ 1761년,영조 37년)은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시인, 서예가이다. ‘관아재觀我齋’는 ‘나 자신을 관조觀照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관아재는 사대부이자 문인화가였는데, 인물화와 풍속화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가문은 함안조씨 명문가이다. 경기도 양지현에서 태어났고, 나중에 백악산(북악산) 아래에서 진경산수의 대가인 겸재 정선鄭歚(1676-1759)과 시인 이병연李秉淵(1671-1751) 등과 이웃해 살면서 진경시대의 문화예술을 주도했다. 관아재는 조선 화원 삼재에 들기도 한다. 

조선 화원중에 화원 출신의 전문화가 삼원三園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1745-1806?),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1758-1814?),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1843-1897)을 가리키고, 사대부 출신 문인화가 삼재三齋는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1759),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1707-1769),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祏(1686-1761)을 꼽는다. 관아재 대신에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1668-1715)를 삼재로 꼽기도 한다. 관아재는 겸재 정선과 화풍이 비슷한 점이 있으나 공재는 독특한 화풍으로, 겸재와 비슷한 관아재를 삼재로 하는 것보다 겸재, 현재, 공재를 삼재로 하는 것이다. 삼재는 진경산수화, 풍속화, 조선남종화를 세 축으로하여 조선 후기 회화를 발전시킨 주역들이라 할 수 있다.

 

나이 28세(1713년)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대과에 이르지 못해 높은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고 지방 수령을 지냈다. 조영석은 인물화와 산수화와 풍속화에 뛰어났는데 지방 수령의 경험이 서민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삶을 관찰한 것이 풍속화의 배경이 된 듯하다. 그의 풍속화 그림 솜씨(필선筆線)는 김홍도의 선처럼 감정이 풍부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신윤복의 선처럼 세련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국 회화사에 큰 변혁을 일으킨 선비화원으로 그 이름이 남아있다. 조영석 이전의 산수화에 보이는 인물은 중국풍의 선비, 신선, 나그네였는데 조영석은 산수화에 인물들을 조선사람의 모습으로 그렸다. 특히 <설중방우도>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조선 선비의 모습으로 조선 미술사에 조선 선비가 이 작품처럼 정확하게 표현된 적이 없었다. 삼재三齋 이후 

삼원三園의 풍속화에는 얼굴이나 의복이 조선 사람들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다만 오원 장승업의 초기 산수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중국사람 모습이었다.

조영석의 시詩, 서序, 기記, 제발題跋 등을 수록한 시문집 『관아재고觀我齋稿』(1984년 발굴)에는 그의 회화관이 잘 드러난다. 그는 사의寫意와 시서화일치詩書畵一致를 강조한다. 화본을 보고 그리는 것은 잘못이고 직접 보고 그려야(즉물사진卽物寫眞) 살아있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림 속 인물의 나이와 신분에 맞는 의복, 상황에 따른 심리와 표정까지도 정확히 묘사한 관아재의 그림은 그의 회화인식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회화인식이 실제 생활 모습을 그대로 옮긴 풍속화의 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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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석 <현이도賢已圖 장기놀이>견본채색.  31.5×43.3cm. 간송미술관 소장. CC BY 공유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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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진재해 <조영복 초상> 1725. 견본채색.  120x76.5㎝. 경기도박물관 소장. 

오른쪽;  조영석 <조영복 초상>1725. 견본채색. 125x76㎝, 1999년 보물지정. 경기도박물관 소장. CC BY 공유마당

조영복 초상 위쪽에 있는 관지.

이것은 나의 백씨인 이지당부군二知堂府君 조영복의 54세 초상이다. 갑진년(1724)에 영석이 영춘永春의 유배지에서 부군을 뵙고 처음 초를 잡은 뒤, 다음 해 을사년(1725)에 부군께서 조정으로 돌아오셨을 때 약간 손질을 가하였으며, 화사 진재해(秦再奚, 1691∼1769)를 시켜 따로 공복본公服本을 그리게 하고, 영석은 이 그림을 그렸다. 숭정 기원 후 두 번 임자년(1732) 7월 정미일에 동생 영석 삼가 쓰다.”
 [출처: 조영복초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조영석은 그림을 취미로만 여겼다. 재주를 자랑하기 위해 그린 것이 아니라 심심풀이 삼아 스케치하듯 그렸으니 그저 집안 식구들끼리만 펼쳐 보라는 말을 《사제첩麝臍帖에 남겼다. “勿示人 犯者非吾子孫(물시인 범자비오자손) 남에게 보이지 말라 범하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고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제첩》은 관아재가 자신의 삶 주변에서 본 풍경을 유탄柳炭으로 스케치하듯 그린 화첩이다. 서민들 삶의 모습을 본 그대로 그린 그림 15점을 묶었다. ‘사제麝臍’에는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뜻이 담겨있다. 사향노루가 사냥꾼에게 잡히면 자신의 사향 때문에 잡힌 것으로 알고 배꼽을 물어뜯는데 이미 잡힌 후에는 그래도 소용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는 왜, 무엇을 '후회해도 소용없다’고 했을까. 《사제첩》에는 이병연의 발문이 있다. 

어진 제작의 거부로 왕의 노여움을 산 뒤 조영석의 그림이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았는데 그의 아들이 그림을 모아 화첩을 만들고 조영석 스스로 ‘사제첩’이라 이름지었다는 내용이다.


조영석은 선비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왔고, 학식이 높았고, 그림 솜씨도 뛰어났다. 특히인물화를 더 잘 그렸다. 의령현감으로 있던 나이 50에 세조 어진 모사에 뽑혔다. 그의 형을 그린 <조영복 초상>을 본 영조가 감탄하여 조영석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가 할 일은 옮겨 그리는 것이었는데 조영석은 어진을 제작하는 일인 줄 알고 영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아 파면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다. 그림 그리는 일이 천한 일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던 당시에 사대부가 그림에 능한 자로 이름을 알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조24년(무진, 1748) 2월4일(무오) 기록.
"조영석이 경에게 익히 보였다. 나 또한 조영석이 그의 형의 모습을 그린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과연 실물과 너무도 흡사했었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그대가 붓을 잡고 모사하겠는가?" 하니,
조영석이 대답하기를,
"이미 집필하지 말 것을 허락한 성교(聖敎)가 있었기 때문에 신이 날마다 감동(監董)하면서 식견이 닿는 데까지는 감히 극진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중신(重臣)이 진달한 것으로 인하여 이런 하교가 있으시니 신은 깜짝 놀라 당황하여 진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비록 하찮은 말단의 천품(賤品)이기는 하지만, 임금을 섬기는 의리는 대강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효를 바쳐 보답하는 도리에 있어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머리에서부터 발뒤꿈치까지 가루가 되더라고 의리에 있어 사양할 수 없는 것인데, 어찌 붓을 들고 모사한 뒤에야 비로소 신하의 분의를 극진히 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대저 기예(技藝)를 가지고 위를 섬기는 사람은 고향을 떠나 사류(士類)의 반열에 끼지 않는다.’ 하였는데, 신이 용렬하고 비루하기 그지없습니다만, 어찌 기예를 가지고 위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국가에서 신하를 부리는 방도에 있어서는 각기 마땅한 것이 있는 것으로 도화서(圖畵署)를 설치한 것은 장차 이런 등등의 일에 쓰기 위한 것이니, 하찮은 신에게 집필하게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2

조영석은 옥살이 후에 절필했다. 그의 그림을 볼 수 없게 된 후손들은 예전에 그린 그림을 모아 화첩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제첩》이다. 

《사제첩》은 1980년대에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후손들이 관아재의 엄명을 잘 따랐기 때문이다.

조영석의 사실주의적 기법은 김홍도에게 이어졌다.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1754영조30년~1822 순조22년)은 영·정·순조대의 도화서 화원이자 초대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이다. 그는 개성김씨 출신인데 개성김씨는 김득신의 큰아버지 김응환金應煥, 동생 김석신金碩臣, 아들 김건종 金建鍾김하종金夏鐘, 손자, 동생의 아들과 손자 외에 외가까지 5대에 걸쳐 20여명의 화가를 배출한 조선 후기의 쟁쟁한 화원가문이다. 김득신은 44년 이상을 화원으로 봉직했다. 아들 김건종(1781-1841)은 인물화에 뛰어나서 동생 하종(1793- ?)과 함께 <순조어진원유관본純祖御眞遠遊冠本(1830)> 제작에 참여했다. 


자비대령화원은 시험을 통해 발탁되는데 출제된 시제詩題에 따라 인물, 산수, 누각, 초충(풀,곤충), 영모(털있는 짐승), 문방, 매죽, 속화(풍속화)의 8과목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게된다. 규장각 신하가 출제하는 1차, 2차의 채점결과를 왕에게 보고하면 국왕이 출제하고 채점하는 3차 시험이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자비대령화원은 모든 장르에 능통한 화원인 것이다. 김득신 역시 인물, 풍경, 풍속 등 모든 것에 뛰어난 화원이다. 

정조5년(1781)에 김득신은 김홍도와 함께 정조 어진(임금의 초상화)과 영조(80세) 어진을 모사했다. 임금의 초상화는 솜씨가 뛰어난 화원들이 함께 그리는데 김홍도는 임금의 옷이나 의자, 화문석을 그렸고(2진, 동참화사), 김득신은 밑그림을 담당하는 수종화가(3진)였다. 김득신은 용주사(1790, 정조14년,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려고 세운 사찰)의 후불탱화 조성에도 김홍도와 함께 참여했다. 여러 문서에 화원 김득신의 기록이 남아있다. 『근역서화징 槿域書畵徵』(1917 오세창 편집, 1928 계명구락부 출판)에는 김득신이 그림에 능하고 특히 인물을 잘 그렸다고 쓰여있다.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조선후기, 유재건, 중인 이하 출신의 행적을 기록)에는 정조가 김득신의 부채 그림을 보고 김홍도에 견주어 ‘김홍도와 더불어 백중하다’고 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어서 당나라의 오도자吳道子/吳道玄(680-740)와 동진시대 고개지顧愷之(344-406)의 경지에 들어갔다는 호평을 했다. 정조는 화원들의 평가에서 김득신에게 9번이나 최고의 평가를 주었다.  

김득신은 산수 인물화뿐 아니라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도교와 불교에 관계되는 초자연적인 인물 그림), 풍속화에도 능했고, 의궤(화성능행도) 제작에도 참여했다. 많은 그림들이 김홍도 그림의 주제와 소재와 표현이 비슷하여 김득신은 항상 김홍도 그림의 모방꾼처럼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김득신의 그림 솜씨도 특출나다. 김홍도를 공부한 초기 작품을 넘어 민중들의 일상생활을 그리면서 그 나름의 독창성을 드러냈다. 8개의 풍속화를 모은 《풍속도 화첩》(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은  해학이 넘치는 풍속화로 개성이 뚜렷하고 대중들에게 친밀감이 있다. 

《사계풍속도 8곡병》(호암미술관 소장)은 주제를 뚜렷이 표현하고 섬세한 필치를 보여준다. 병풍식 농경 그림의 유행을 선도했다. 

‘풍속화’라면 사람들은 항상 김홍도나 신윤복을 먼저 생각하지만 그들은 누가 더 잘 그렸느냐 보다는 서로 다른 특징으로 각기 다른 매력을 뿜어낸다. 김홍도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배경 생략하고 주제만 돋보이게 그렸고, 김득신은 양반과 상민을 가리지 않고 주변 묘사를 꼼꼼히 표현했다. 신윤복은 양반들의 다양한 모습-그들의 문란한 모습까지도 현장을 들여다보듯이 그렸다. 풍속화는 일상의 기록같은 역할을 하지만 단순한 기록화가 아닌 해학과 풍자로 풍부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김홍도는 김득신의 선배이고, 신윤복은 김득신의 후배 화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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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김득신 <야묘도추 野猫盜雛/파적도破寂圖> 종이에 담채. 22.4x 27cm. 긍재 풍속도화첩.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CC BY 공유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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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김득신 <성하직구 盛夏織屨> 종이에 담채. 긍재 풍속도화첩. CC BY 공유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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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신 <사계풍속도 四季風俗圖> 1815. 비단에 수묵담채. 각 95.2×35.6cm. 호암미술관 소장. CC BY 공유마당

 

김홍도 풍속화의 형식미가 19세기 화단에 전수되고 유지된 것은 김득신의 역할이 크다. 


낯선 말 풀이

사의寫意           - 그림에서, 사물의 형태보다는 그 내용이나 정신에 치중하여 그리는 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2395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2402004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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