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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May 05. 2022

김득신 <밀희투전>, 세잔 <카드 게임하는 사람들>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시대의 거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곳엔 글의 일부만 남기고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조선 후기, 중국에서 들어온 투전은 길고 두꺼운 종이에 기름을 먹여서 만든 80장 내지 60장으로 하는 도박이다. 종이쪽지 한 면에 인물·새·짐승·곤충·물고기 그림이나 글귀를 적어 끗수를 표시한다. 길이는 10∼20㎝ 사이이며 너비는 손가락만하다.

투전이 우리나라에 보급된 것은 조선조 숙종 때부터이다. 숙종 때 상평통보가 발행되었고, 이전에는 부유한 계급층에서만 사용하던 동전을 일반백성들도 사용하게 되었다.  화폐 경제가 시작되고 물물교환에 비하여 즉시 교환되는 동전은 심리적으로 강한 자극과 흥분을 주었다. 상업이 활성화되고 장시가 발달한 것도 투전 확산의 배경이 된다. 중인 이하의 계층에서 시작된 투전은 나중에는 양반 계층에까지 확산된다. 정조 때의 학자 성대중成大中(1732-1809)이 지은 『청성잡기 靑城雜記』에는 투전은 명나라 말기에 장희빈의 종백부인 역관 장현이 북경에서 들여왔다고 기록되어있다. 

투전놀이가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숭정(崇禎) 말엽에 장현(張炫)이 북경에서 배워 가지고 왔다. 그 방법은 8가지 물건을 4짝으로 나누되 물건마다 장수(將帥)를 두고 패의 수는 모두 80개인데 노소(老少)가 서로 대결하여 많이 얻은 자가 이기는 것이다. 1

원래 투전은 투기성이 강한 노름이 아니었다. 투전의 한 종류인 수투전數鬪의 경우는 문아한 양반들이 즐기는 놀이였다. 금전 추구에 집착하기보다는 우열승부를 결정하는 놀이였다. 점차 오락성은 사라지고 도박성이 커졌다. 투전은 영조 때 크게 성행, 서울은 물론 시골 구석구석까지 퍼져 전국 도처에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심지어 살인하는 사례까지 생겼다. 정조 때 문신이자 학자인 윤기尹愭(1741-1826) 의 책 『무명자집無名子集』에 나오는 <투전자投錢者>라는 시를 보면 투전을 하다가 아내의 치마를 벗겨가고, 솥까지 팔아먹어서 식구들이 굶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목민심서』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은 투전 말고도 골패, 바둑, 장기, 쌍륙, 윷놀이를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신 신기경愼基慶은 투전을 금하고, 투전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 역시 엄격히 벌을 줄 것을 상소했고 정조는 투전금지령을 내렸지만 그치지 않았다. 투전꾼들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정조15년(신해, 1791) 9월19일(신묘)
“잡기(雜技)의 피해는 투전(投錢)이 특히 심합니다. 위로는 사대부의 자제들로부터 아래로는 항간의 서민들까지 집과 토지를 팔고 재산을 털어바치며 끝내는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게 되고 도적 마음이 점차 자라게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경외에 빨리 분명한 분부를 내리시어,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금법을 어기고 죄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시고, 투전을 만들어 팔아서 이익을 취하는 자도 역시 엄히 금지하소서.” 2
“잡기 가운데 투전(投錢)으로 인한 폐단의 문제는 사대부들까지 모두 거기에 빠져 있다고 하니, 한 마디로 말해서 수치스러운 일이다. 집안에는 각기 부형들이 있을 것인데 그 부형들이 그것을 보고서도 막지를 않으니, 어찌 세상의 도의를 위해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2

김득신의 풍속화 <밀희투전密戱鬪錢>은 그러한 시대의 산물이다. “투전”을 “밀희 密戱”로 수식한 것은 당시에 금지된 투전을 몰래 즐겼기 때문이다.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16335&menuNo=200018 

김득신 <밀희투전> 18c. 종이에 채색, 22.4x27.0㎝, 간송미술관 소장.   CCBY 공유마당.

 

우리 옛 그림은 오른쪽 위에서부터 왼쪽 아래 방향으로 본다. 그렇게 보면 맨 먼저 보이는 것은 개다리소반이다. 도박판의 술상인 듯하지만 무관심하게 멀찌감치 밀어놓은 것하며 잔이 하나뿐인 것을 보면 저 병은 술병이 아니라 물병인 것 같다. 잔탁을 보면 물이 아니라 술인 것도 같고. 가래를 뱉는 타구와 요강까지 준비하고 시작한 도박판이다. 아마도 밤을 새운 모양이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를 삭제함.



투전鬪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images.metmuseum.org/CRDImages/ep/original/DP231550.jpg 

폴 세잔Paul Cézanne <카드 게임하는 사람들The Card Players> 1890-92, 캔버스에 유채. 65.4 × 81.9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미국.


<카드게임하는 사람들>은 세잔이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을 통해 형태의 구조와 색채의 효과를 실험하려는 의도로 시작되었다. 애초에 풍속화를 그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을 살펴보면 작가는 인물들의 특성을 묘사하는 데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풍속화의 특징인 등장인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엮어내는 이야기를 찾기 어렵다. 

세잔은 그림 속 인물들과 사물들의 공간적 관계에 관심을 쏟고 있다. 같은 공간에 있는 등장인물들은 각자가 독립성을 보여준다. 세 명은 카드게임을 하고, 한 사람은 게임을 구경할 뿐이다. 인물들을 하나하나 독자적으로 연구한 다음에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았다. 그림의 주제보다는 화면 구성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실제로 인물을 한 명씩 스케치하고 수채물감으로 칠한 습작이 남아있다.  카드게임은 나란히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보고 앉아서 한다. 그 자체로서 대칭구도가 된다. 세잔의 화면구성 연구에 어울리는 소재라 할 수 있다. 

4명의 인물은 앞쪽, 중간, 뒷배경의 3개의 별개의 공간으로 구성됐고, 가로로는 왼쪽, 중앙, 오른쪽 3부분에 인물을 배치했다. 등장인물은 구성뿐 아니라 색상도 그림 오른쪽 사람 옷의 파란색, 파이프와 셔츠의 흰색, 서있는 남자의 빨간 스카프, 이렇게 3색으로 구성했다. 세잔은 미학적 중요성에 중점을 두고 <카드게임하는 사람들>을 다섯 작품이나 그렸다. 


왼쪽 https://collection.barnesfoundation.org/objects/6992/The-Card-Players-(Les-Joueurs-de-cartes)/

폴 세잔Paul Cézanne <카드 게임하는 사람들The Card Players> ca. 1890–92. 캔버스에 유채. 135.3x181.9cm. 반스 파운데이션, 필라델피아, 미국.

이 그림은 다섯 개의 그림중 가장 크다. 일반적으로 역사나 신화와 같은 주제를 그리던 규모의 크기에 프로방스의 노동자들을 그렸다. 크기도 가장 크고 구성도 가장 복잡하다. 등장인물이 다섯 명이나 된다. 세 명의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테이블 주위에 반원형으로 앉아있고, 두 명은 뒤쪽에 서있다. 다섯 명은 전체 구성을 비대칭으로 만듦으로 나중에 그린 3개의 작품에서는 인물을 줄였다. 

그림에서 격자 구조를 볼 수 있는데 테이블 위의 카드를 격자로 배치한 것이다. 개체와 개체 사이의 공간이 일종의 틱-탁-토(tic-tac-toe) 패턴을 형성한다. 인물의 움직임도 섬세하게 묘사했다. 작품의 왼쪽에 있는 인물(정원사 폴랭 폴레)은 마치 탁자에서 카드를 집으려는 것처럼 검지 손가락을 펴고있다. 생각과 행동을 연결하는 제스처로서 카드 한 장에 대한 생각과 손의 움직임을 연결한다. 

 

오른쪽 https://www.metmuseum.org/ko/art/collection/search/435868 

폴 세잔Paul Cézanne <카드 게임하는 사람들The Card Playersca. 1892–96, 캔버스에 유채, 47x56 cm. 오르세이 미술관, 파리, 프랑스.

<카드게임하는 사람들> 다섯 작품중 후기의 세 작품에서는 세부적인 것들을 없애버리고,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는 두 인물에만 집중한다. 두 인물은 카드 게임에 몰입해 있다. 

이 작품은 <카드게임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그림으로, 가장 작고 간결한 스타일로 그려졌다. 이전 버전의 비대칭 구도를 벗어나 대칭구도를 보인다. 테이블 한 가운데 수직으로 놓인 술병이 대칭구도를 강조하지만 사실은 완전한 대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왼쪽 사람은 그림 속에 들어가 있고, 오른쪽 사람은 그림에 완전히 들어가있지 않으니 완전한 대칭은 아니다. 구도뿐만 아니라 색감도 그렇다. 왼쪽 사람은 어두운 색으로, 오른쪽 사람은 밝은 색으로 칠하여 그림은 명암을 뚜렷이 한다. 대칭을 무너뜨리는 세잔의 취향이 드러난다. 유명한 "세잔의 사과"는 항상 둥글지 않다. 세잔은 사과를 둥근 모양에서 변형된 모습으로 그렸다. 이 그림 역시 대칭처럼 보이는 비대칭의 그림이다. 

 

폴 세잔Paul Cézanne은 1890년대의 대부분을 액상프로방스Aix-en-Provence에 있는 아버지의 저택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세잔은 프로방스 노동자들의 카드게임 그림을 다섯 점이나 그렸다. 카드게임 그림은 17세기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장르그림에 등장하는 모티프인데 세잔의 그림은 그것들과 다르다. 술에 취한 도박꾼으로 묘사됐던 17세기의 그림을 노동자들의 놀이로 분위기를 바꿔그렸다. 농부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중절모를 쓴 모습으로 묘사되었는데, 이 장면을 위하여 세잔은 여러 개의 데생 및 수채화 습작들을 그렸다. 액상프로방스 부근 가족 소유의 농장 일꾼들을 모델로 그렸다. 정원사 폴랭폴레Paulin Paulet는 <카드게임하는 사람들> 다섯 작품에 모두 등장한다. 

 그림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세잔의 카드놀이(play) 그림은 도박(gambling)이 아니다.  김득신의 그림 <밀희투전>에 등장하는 볼록한 돈주머니도 없다.

풍속화에서 단원 김홍도는 배경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주제만 돋보이게 한 것과 달리 긍재 김득신은 주변 묘사까지도 꼼꼼하게 그렸다. 화면에 인물 외에 여러 기물들이 흩어져 있다. 김득신의 작품처럼 풀 세잔의 카드놀이 작품들의 캔버스에는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 외에 주변에 여러 소품들이 그려져 있다. 다섯 작품중 가장 나중에 그린 '오르세이'버전은 카드에 몰입한 두 인물에 집중했는데  김홍도가 인물에 집중한 것과 유사하다. 물론 두 그림의 성질은 서로 다르다. 종이에 수묵화로 그린 것과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것을 비교할 수는 없다. 

 발자크(Honore de Balzac 1799-1850)는 도박꾼을 현대의 탄탈로스Tantalos라고 했다.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욕구에 사로잡혀 자신을 위로하는 일종의 이성적인 미치광이라는 것이다. 대문호로 잘 알려진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1821-1881)는 도박을 끊으려고 애썼다. 도박판의 게임에서 투쟁한 만큼 끊임없이 도박과 투쟁을 했으나 번번히 도박에 넘어가고 만 상습 도박꾼이었다. 그의 중편소설 『도박꾼』(1866)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모든 문화가 놀이에서 출발한다.”고 호이징거(Johan Huizinga1872-1945)는 『호모 루덴스』(1938)에서 주장했다.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이다. 어느 순간 호모 루덴스는 호모 알레아토르(Homo Aleator 도박하는 인간)로 살짝 변하게 된다. 놀이를 인간 본성의 최상위로 분류한 플라톤이 무색할 지경으로 놀이는 중독으로 빠지는 길이 되기도 한다.  


작가 알기

폴 세잔(Paul Cézanne 1839.01.19 프랑스 액상프로방스 출생, 1906.10.22 액상프로방스 사망)은 20세기 추상미술에 큰 영향을 미친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이다. 부유한 아버지는 세잔을 경제적으로 지배했고, 세잔은 아버지의 강권에 굴복하여 로스쿨에 등록하였지만 결국은 예술가로서의 삶에 정착했다. 

1852년 세잔은 부르봉 컬리지에 입학하여 작가 에밀 졸라Émile Zola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1857년까지 엑스 미술관(Musée d'Aix 현재 Musée Granet)에 딸린 그림학교에서 수업을 들었다. 1858년부터 몇 년 동안 법학공부와 미술을 병행하며 아버지 곁에 머물었다. 1861년 모험심이 강한 세잔과 졸라는 파리로 이주했다. 파리에서 세잔은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두번이나 거부당했다. 그때 세잔은 루브르박물관에 다니며 티치아노, 루벤스,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복사했다. 라이브 모델을 그릴 수 있는 아카데미 스위스 스투디오에 다니며 카미유 피사로,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를 만났다. 

파리에서 5개월을 머문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은행에 취직을 하였으나 미술공부는 계속했다. 1862년에 다시 파리로 가서 일년 반을 머물다가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갔고, 10여년간 세잔은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시기를 보냈다. 

1860년대의 세잔의 그림은 우울하며 환상, 꿈, 종교적 이미지 및 섬뜩한 것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두꺼운 임파스토 기법을 사용하여 이미 엄숙한 구성에 무거움을 더했다. 살롱 심사위원단이 선호하는 잘 묘사된 실루엣과 원근법을 선호하여 색상에 중점을 두었으나 그의 모든 제출 작품은 거부되었다. 

프로이센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 마르세유에 정착하여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872년에 프랑스 퐁투아즈로 이사하여  자연에서 직접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탁하고 어둡던 그림은 신선하고 생생한 색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877년에 열린 세 번째 인상파 전시회에만 16점의 그림을 출품했다. 1877년 세잔은 인상파 동료들과 점차 더 고립되었으며, 세 번째 인상파 전시회 이후 거의 20년 동안 공개 전시를 하지 않았다. 

세잔의 인상주의는 섬세한 미적 감각이나 감각적 느낌을 취하지 않았다. 1880년대 대부분을 독창적이고 진보적인 형태를 조화시키는 "회화적 언어"를 개발하는데 전념했다. 1886년에는 에밀 졸라Émile Zola(1840-1902)와 결별하게 되는데 졸라의 소설 『걸작 The Masterpiece/ L'Oeuvre』 때문이다. 실패한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을 비난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세잔은 깊은 상처를 받았다. 1890년대에는 고립에서 벗어나 활발히 작품활동을 하고 대중들의 인지도도 높아졌다. 사람과 자연의 직선적 표현을 거부하고 기하학적 요소와 맞물리는 형태에 중점을 두었다. 원기둥, 구, 원뿔을 추구하며 이것은 견고하고 내구성있는 구성이라고 생각하고 시도했는데 이는 후에 큐비즘(입체파)으로 가는 길의 시작이었다. 결국 세잔은 19세기의 후기인상주의와 20세기 초반의 입체주의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었다. 앙리 마티스 Henri Émile Benoît Matisse(1869-1954)와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 Picasso(1881-1973)가 세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06년 가을,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폭풍우를 만나 병에 걸린 세잔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사망했다. 이듬해 1907년 살롱도톤Salon d'Automne에서 대규모 세잔 회고전이 열렸다. 


낯선 말 풀이

끗              - 화투 투전 같은 노름 따위에서, 셈을 치는 점수를 나타내는 단위.

끗수           - 끗의 수.

문아하다      - 풍치가 있고 아담하다.

훈염법         - 중국 명나라 말기에 증경이라는 화가에 의해 시도된 명암법. 얼굴의 움푹한 부분에 붓질을 거듭함으로써 어두운 느낌을 주고, 도드라진 부분을 붓질을 덜하여 밝은 느낌을 준다. 


1 http://db.itkc.or.kr/inLink?DCI=ITKC_GO_1436A_0030_010_0280_2008_001_XML

2 https://sillok.history.go.kr/id/kva_11509019_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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