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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Oct 05. 2022

신윤복 <청금상련>, 제임스 티쏘 <파티 카레>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시대의 거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곳엔 글의 일부만 남기고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여름이 무르익으면 연꽃이 핀다. 연꽃은 다른 꽃처럼 길가에서,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연못에 가야만 볼 수 있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연꽃이 만개한 연못가를 거닐면 아이가 꽃밭 한가운데로 들어가듯이 연꽃무리 속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단속해야 한다. 연꽃은 더러운 연못에서 깨끗한 꽃을 피운다하여 선비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주자周子(960-1127주돈이周敦 주무숙周茂)는 연꽃이 군자가 사랑할 만한 꽃이라고 하며 <애련설愛蓮說>이라는 시를 지었다.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맑고 깨끗하다. 너무 요염하지도 않다. 줄기는 속이 비어있어 서로 소통하고 겉은 곧아 넝쿨이 뻗어나가지도 않고 가지가 벌어지지도 않는다. 향기는 멀리 퍼져나가고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 가서 가지고 놀 수는 없으니 고고함의 표상이요 바로 군자의 상징이라는 내용이다.

신윤복의 <청금상련聽琴賞蓮/연당야유蓮塘野遊>를 보면 연꽃 핀 연못가에 모인 남자들의 모습은 군자와는 거리가 멀다. 사대부라하여 모두 다 군자는 아니지만…

 

불교에서는 연꽃이 속세의 더러움 속에서 피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상징한다고 하여 극락세계를 상징한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시대 유물을 보면 도자기나 나전칠기에 연꽃무늬 장식이 많다. 부처가 앉아있는 불상의 대좌도 연꽃으로 조각하였다. 고려시대 뿐 아니라 그 이전부터 연꽃은 예술의 한 모티프로 등장했다. 고구려의 ‘강서중묘’ 천정에도 연꽃이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 이후 숭유억불정책을 펼친 조선에서는 연꽃은 불교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선비들이 즐겨 감상하는 고미술품에 많이 등장한다.

문화가 점점 발달하며 왕궁이나 권력자들은 저택 안에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 정원에 물을 가두는 연못을 파게 되었다.

고구려 장수왕은 427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중궁지中宮址 서편에는 물가에 가산이 쌓인 연못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북한의 고고학자들이 전한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문헌상에 나타나는 최초의 연못은 백제의 진사왕辰斯王 때이다. 391년에 한산성 안에 못을 파고 물새를 키우고 진귀한 꽃을 심어 가꾸었다. 백제의 왕들이 연못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많다.

동성왕22년(500)에는 공산성 안에 못을 파 놀이터로 삼았으며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26권 「백제본기」 제4권에 있다(기 림유각 어궁동 起 臨流閣 於宮東, 우천지양기금又穿池養奇禽). 림유각에 대한 기록은 또 있다. 

“다섯 길 되도록 높다랗게 림류각을 세우고 / 閣起臨流五丈森
연못과 동산 만들어 기이한 짐승 길렀다오 / 穿池置囿養奇禽”
『무명자집』 「시고」 제6책 / 시詩 <영동사> 152. 1

29대 무왕은 634년에 부여의 남쪽 교외에 모후를 위한 이궁을 짓고 그 앞에 큰 연못을 팠다. 이것이 오늘날 궁남지이다. 지금도 해마다 궁남지에서는 연꽃 축제가 열린다. 

신라는 674년(문무왕 14)에 반월성 밖에 큰 연못을 꾸며놓았다. 오늘날 안압지雁鴨池이다. 

조선시대에도 궁궐안에 연못을 만들었다. 1116년(예종 11) 청연각의 뜰에 가산을 곁들인 연못이 꾸며진 것과 1157년(의종 11)에 태평정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돌을 모아 가산을 쌓아 폭포를 꾸몄다. 경복궁에는  경회루지慶會樓池와 향원지香遠池, 창덕궁의 부용지芙蓉池와 애련지愛蓮池, 그리고 반도지半島池가 있는데, 반도지는 일제시대에 반도형으로 개축되면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

궁궐 밖에도 연못이 많아졌고, 곳곳의 연못은 풍류객들의 놀이터 역할을 했다. 풍속화를 그리는 화원들에게 연못은 좋은 소재가 되었다. 신윤복의 연못가 풍경을 살펴본다.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16674&menuNo=200018  

신윤복 <청금상련/연당야유>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 申潤福 筆 風俗圖 畵帖> 지본채색. 28x35cm. 국보135. 간송미술관 소장. CC BY 공유마당.


신윤복의 그림을 접하면 은근슬쩍 관음증이 일어나 세심하게 훑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노골적인 춘화가 아니어도 그의 그림엔 춘정을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청금상련聽琴賞蓮>은 가야금 연주를 들으며 연꽃을 감상한다는 뜻이다. 위의 그림에 묘사된 세 쌍의 남녀를 보면 연꽃을 감상하는 자세는 아니다. 연꽃감상에 시심이 일어 고귀한 시 한수 읊는 상황은 아니다. 제목은 <연당야유>라고도 하는데 그림속 장면은 <청금상련>보다 <연당야유蓮塘野遊>가 더 적절한 것 같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를 삭제함.


신윤복의 그림에는 대부분 제발題跋을 쓰고 인장을 찍었다. 이 그림의 제발문은 학자들의 많은 비평이 있다.

座上客常滿 酒中酒不空 좌상객만 주중주불공”, 자리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차고 술중에 술은 비지 않는다는 뜻이다. 학자들이 문제로 삼는 것은 酒中酒의 첫글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술 주酒’가 아니라 술통을 뜻하는 ‘준樽’인데 신윤복이 실수로 잘못 쓴 것이라고 한다. 옛 기록을 보자.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를 삭제함.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6/6d/James_Tissot_-_La_Partie_carr%C3%A9e.jpg 

제임스 티쏘 James Tissot <파티 카레The Partie Carrée> 1870. 캔버스에 유채, 120 x 145.8cm. 국립 미술관, 오타와, 캐나다

 

신윤복의 <청금상련>처럼 연못가의 유흥장면인 이 그림은 대중들에게 익숙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가 연상된다. 누드의 여인이 등장한 마네의 작품은 그 당시 엄청난 스캔들에 휩싸였었다. 이 그림 <파티 카레>의 여인들은 벌거벗지 않았다. 오히려 의복이 시선을 끄는 차림이다. 우선 이 그림의 배경을 살펴보자.  

<파티 카레>는 티쏘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그린 작품이다. 프랑스 디렉투아르(Directoire /Directory 총재정부 1795-1799) 정부의 쾌락주의적 생활 모습이 드러나는 그림이다. 그후 디렉투아르를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한 나롱레옹 보나파르트 시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새로운 정권에서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방식을 주도하는 귀족 하위 문화가 출현되었다. 티쏘는 자신의 모델에 이 시대를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혔다. 특히 의상의 묘사는 극히 섬세하여 실크와 거즈의 주름을 보면 작가가 디테일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작가는 의상을 통하여 의도적으로 어색하고 코믹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취한 시선, 노출된 발목의 파란색 스타킹, 관객을 응시하는 여성의 의상은 유혹의 상징이다. 데콜타주(Décolletage 목 어깨 등 가슴 윗부분, 옷의 목선을 따라 노출된 몸통) 목선의 가슴 가까이에 분홍 장미를 꽂은 것은 도발적인 유혹이다.

남녀가 모여 즐기는 자리에는 상징적인 도구들이 메세지를 전달하는데 이 그림에도 그림 하단부 전면에 부채와 파라솔이 놓여있다. 활짝 펼쳐놓은 부채는 '나를 기다려주세요', 닫힌 파라솔은 '나는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요'를 의미한다.

이 그림을 위해 티쏘는 공쿠르 형제(Edmond 와 Jules de Goncourt)가 18세기 풍속사를 연구하여 출판한 『대혁명 시대의 프랑스 사회사』(1854)를 면밀히 관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그림에서 의상 표현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이 책에서 뿐 아니라 부모님의 영향도 크다. 어머니는 양복점을 성공적으로 운영했고, 티쏘는 패션에 대한 많은 지식과, 그것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신윤복의 <청금상련>에서 여인을 끌어안고 있는 남자의 왼쪽 손이 어디에 있느냐를 흥미거리로 삼는 것처럼 티쏘의 <파티 카레>에서도 왼쪽 빨간 옷입은 남자의 손을 찾아보는 것도 그림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James_Tissot_-_Holyday.jpg#/media/File:James_Tissot_(1836-1902)_-_Holyday_-_N04413_-_National_Gallery.jpg 

제임스 티쏘 James Tissot <휴일Holyday> c.1876, 캔버스에 유채 76.2× 99.4cm, 테이트 브리튼, 런던, 영국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티쏘의 런던 집 뒷마당의 가을 풍경이다. 그의 집은 런던의 세인트 존스 우드에 있는 로드 크리켓 구장 근처이다. 티쏘는 파리 코뮌이 몰락한 후 1870년에 런던으로 건너가 1882년까지 머물렀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아이 징가리 I Zingari'크리켓 클럽에 속한 사람들이다. 노랑 빨강 검정으로 짜여진 모자가 아이 징가리 클럽 회원임을 알려준다. 티쏘는 이 그림에서도 여성들의 의상에 정성을 들였다. 가을인데도 쓸쓸한 느낌보다는 온화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가운데 길게 누운 남자가 술잔이 아닌 찻잔을 들고있는 모습은 그의 자세가 단정치 못하다는 인상보다는 부드럽고 여유있어 보인다. 가을날, 뒷뜰 연못가에 모여 따뜻한 차를 마시는 이들 사이에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듯하다. 주제를 이러한 일상적인 장면으로 정한 것은 인상주의 영향이다.

오른쪽에서 일행을 등지고 앉아있는 여인은 티쏘의 뮤즈인 캐슬린 뉴턴Kathleen Newton이다. 

 

<청금상련>에 등장하는 세 쌍의 남녀 중에도 일행에 섞이지 않고 서있는 남자와 장죽을 든 여인이 등장하는데, 몇 사람이 모이면 그렇게 딴전보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연못 저쪽의 남녀는 둘만의 시간이 아쉬운 모양이다. 무슨 밀담을 나누는지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연못에 여자의 흰색 드레스만 길게 드리워져있다. 연못의 석축 둘레에는 큰 기둥과 나무들이 둘러서있고 바닥의 흰 땅은 연못 주변의 산책로를 보여준다. 빅토리아 시대 티타임에 사용하던 은주전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작가 티쏘는 관찰력이 뛰어난 감상자를 위하여 은주전자에 비친 아주 작은 사람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있는듯 없는듯 주전자의 표면에 그려진 그 사람은 작가의 작품 완성도 높은 디테일일까, 우리 눈엔 들어오지 않는 그림 앞쪽에 약간 거리를 두고 서있는 실제 사람일까?

 

신윤복의 <청금상련>이나 티쏘의 <파티 카레>는 그 시대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일상의 생생한 재현이다. 화가는 신분을 숨기려는 트릭을 쓰지않고 사실대로 그렸다. 그림에 등장한 당사자, 특정 개인을 밝히지 않더라도 사회적인 신분은 알 수 있는 그 모델들은 완성된 그림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자신의 허벅지 위에 기생을 앉히고 더듬는 남자는 부끄러워할까? 그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을 과시하며 어깨를 으쓱거릴까? 신윤복 그림의 후원자들은 바로 그림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이었으니 그들의 심리가 궁금하다.

 

작가 알기

제임스 티쏘(James Tissot 1836.10.15 프랑스 낭트 출생, 1902.08.08 체네시 부용 사망)는 낭트에서 섬유 및 패션 산업에서 자수성가한 부유한 부모밑에 태어났다. 원래는 자크 조제프 티쏘 Jacques Joseph Tissot 였으나 후에 제임스James로 개명했다.

1856년경에 그는 파리 에꼴 데 보자르에 들어가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1780-1867) 밑에서 교육을 받은 루이 라모스Louis Lamothe(1822-1869)와 플랑드랭Jean-Hippolyte Flandrin(1809-1864)의 스튜디오에 합류했다. 1859년 처음으로 파리 살롱에 5개의 그림을 전시했다. 주로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중세의 장면을 묘사했다. 1863년 무렵 그는 갑자기 초상화를 통해 중세 스타일에서 현대 생활의 묘사로 초점을 옮겼다.

1864년 살롱에서 티쏘의 그림은 "근대성"을 포착하려는 경향을 반영했고, 초상화가로서 보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1866년 파리 살롱에서 티쏘는 심사를 거치지 않고도 그림을 전시할 수 있는 오르 콩쿠르Hors concours로 선출되었다.

1868년, 티쏘는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들고 정교한 그림인 <써클 오브 더 루 로얄>(오르세미술관)을 그렸다. 루 로얄 클럽 12명의 회원이 각각 1,000프랑을 지불한 그룹 초상화 의뢰를 받은 것이다.

1869년, 토마스 깁슨 볼스Thomas Gibson Bowles(1842-1922)가 창간한 런던의 사회저널 『배너티 페어 Vanity Fair』 에 사악한 정치 캐리커처를 기고하기 시작했다.

1870년 제2제국이 무너지면서 그는 정예 부대인 센Seine 강의 정찰병으로 파리를 방어했다. 1871년 중반, 코뮌인 프랑코-프로이센 전쟁의 여파로 제임스 티쏘는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갔다. 그는 우아하게 옷을 입은 여성을 그리는 화가로 명성을 얻고 경쟁이 치열한 런던 미술 시장에서 입지를 굳혔다.

1872년 세인트 존스 우드St. John's Wood에 있는 넓은 빌라를 샀다.

1872년부터 1875년까지 <선상에서의 파티>(테이트미술관)와 같은 작품으로 로얄 아카데미에서만 전시했다. 1875년에 캐슬린 뉴턴Kathleen Newton을 만났고, 그녀는 동반자이자 단골 모델이 되었다. 1882년 말, 28세의 나이로 캐슬린 뉴턴이 결핵으로 사망했을 때 티쏘는 세인트 존스 우드의 집을 버리고 파리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10년을 살았다. 

1883년에서 1885년 사이에 그는 대형 작품 <파리의 여인들> 15점을 그려 파리에서 자신의 명성을 재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작품들은 패셔너블한 파리지엔느를 밝고 현대적인 색채를 사용하여 다양하게 표현했지만 별로 호평을 받지 못했다. 1885년에 티쏘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고 그리스도의 삶을 설명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성지를 여러 번 여행했고 신약성서를 자료로 약 350 개의 수채화를 그렸다. 그런 다음 티쏘는 그의 남은 생애를 오로지 성경을 설명하는 데만 바쳤다. 제임스 티쏘는 1902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삽화는 그가 죽은 후에도 문학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낯선 말 풀이

트레머리        - 가르마를 타지 아니하고 뒤통수의 한복판에다 틀어 붙인 여자의 머리.

가리마          - 예전에, 부녀자들이 예복을 갖추어 입을 때 큰머리 위에 덮어쓰던 검은 헝겊. 비단 천의 가운데를 접어 두 겹으로 만들고 그 속에 종이나 솜을 넣은 것으로, 앞머리의 가르마 부근에 대고 뒷머리 부분에서 매어 어깨나 등에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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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illok.history.go.kr/id/kua_11412021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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