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두 귀가 얼룩 귀 귀가 닮았네
시인 박목월(1915-1978)의 시에 손대업(1923-1980) 작곡가가 곡을 붙인 노래다. 한 때 ‘얼룩소’가 우리나라 소가 아닌 ‘젖소’인데 우리 아이들 동요 가사로 적합치 않다는 설이 나돌았었다. ‘얼룩소’가 ‘바둑이’처럼 완전히 다른 색깔의 얼룩이가 아니라 같은 색의 고르지 못한 색의 의미일 수 있다는 설명이 ‘젖소’ 논란을 덮었다.
정지용(1902-1950)의 시 “향수”에 나오는 “얼룩빼기 황소”에 대해서도 왈가왈부 말이 있었다. “얼룩빼기”는 젖소가 아니다. 얼룩소이다. 오히려 잘못 알기로는 ‘황소’에 대한 오류가 더 크다. 황소는 누런 소가 아니다. 힘이 세고 큰 수소를 칭하는 것인데 소의 색깔이 누렇다보니 황소를 누런 소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우유를 먹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우유를 마시는 풍습은 고려시대에 원나라 영향을 받으면서 시작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보양식으로 올릴 정도로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시대 상황에 따라서 우유는 보양식이 되기도 했고 금지 식품이 되기도 했다. 1404년(태종 4)에는 왕실에 우유를 공급하는 유우소乳牛所를 설치했고, 1421년(세종 3)에 폐지하였다. 1438년(세종 20)에는 우유를 타락酡酪이라 부르고, 소 기르는 목장을 지금의 서울 동대문에서 동소문에 걸치는 동산 일대로 옮겨 이곳이 타락산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우유 먹는 일이 끊겼다 이어졌다 한 이유는 그 당시 ‘젖소’를 키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새끼 낳은 어미소의 젖을 모았으니 송아지는 굶게 되었고, 죽기까지 하였으니 농사에 부릴 소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 도살금지령이 내려지면 우유뿐 아니라 소고기도 먹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사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태종 15년(을미, 1415) 8월 23일(정해) 기록.
유우소乳牛所의 거우車牛의 반을 감하였다. 1
세종 3년(신축, 1421) 2월 9일(임인) 기록.
병조에서 계하기를,
“유우소乳牛所는 오로지 위에 지공支供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서, 모든 인원 2백 명을 매년 전직하여 승직시켜 5품에 이르면 별좌別坐가 된다는 것은, 능한가 능하지 못한가를 상고하지 아니하여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으니, 바라옵건대, 유우소를 혁파하고, 상왕전에 지공하는 유우乳牛는 인수부仁壽府에 소속시키고, 주상전에 지공하는 유우는 예빈시에 소속시키게 하고, 그 여러 인원은 소재한 주·군의 군軍에 보충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
단종 즉위년 (임신, 1452) 6월 1일(임술) 기록.
"무릇 사람이 비록 장성한 나이로 있더라도 거상을 하면 반드시 마음이 허하고 기운이 약하게 되는데, 지금 주상께서 나이 어리시고 혈기가 정하지 못하시니, 청컨대 타락을 드소서. 또 바야흐로 여름 달이어서 천기가 찌고 무더우니, 또한 청컨대 소주(燒酒)를 조금 드소서." 3
정조 2년 (무술, 1778) 1월 14일(을해) 기록.
내가 이르기를,
“지금은 겨울철이 지나고 봄기운이 한창 생동하니, 타락酡酪을 진상하는 일을 정지하라고 내국內局에 분부하라.” 하였다. 4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16970&menuNo=200018
<우유짜기> 조영석. 17세기. 종이에 수묵, 28.5×44.5㎝. 개인소장, CC BY공유마당.
소 한 마리에서 우유를 짜는 데 갓을 쓴 선비 다섯 사람이나 동원되었다. 송아지를 잡고, 어미소의 머리와 다리를 붙들고, 젖을 짜느라 쩔쩔 매고 있다. 행여나 소가 뒷발로 찰까봐 단단히 밧줄로 붙들어 매고, 코뚜레까지 단단히 부여잡은 모습이다.
종이책 출간으로 일부설명 삭제함.
https://artvee.com/dl/a-maid-milking-a-cow-in-a-barn/
제라드 터 보르히Gerard ter Borch <헛간에서 우유짜는 소녀A Maid Milking a Cow in a Barn> c.1652-54. 캔버스에 유채. 47.6X50.1cm. 폴 게티 뮤제움, LA, 미국.
컴컴한 헛간에서 한 여인이 소젖을 짜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젖소가 두 마리 있다. 크기로 보아 젖을 잘 나오게 하기위해 끌어다 놓은 송아지가 아니라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젖소로 보인다. 그림의 검은 배경 때문에 살짝 빛을 받아 모습을 드러내는 물체들이 더욱 시선을 끈다.
왼쪽 아래 구석에 놓인 거친 의자, 물이 담긴 나무 대야, 부서진 사기 그릇이 있다. 양동이를 동여 맨 금속은 반짝이고, 문틈으로 들어온 빛은 깜깜한 배경에 하얗게 꽃혀있다. 흔한 헛간의 모습이다. 점박이 젖소의 흰 얼룩은 칙칙한 그림에 생기를 불어넣었고, 두 마리 젖소의 흰 얼굴과 젖 짜는 여인의 흰 머리 수건은 그림을 수평으로 가로지른다.
이 그림은 풍속화 화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유머러스한 주제를 거부하고 일상적인 젖 짜기 장면을 사진처럼 직설적으로 묘사했다.
같은 일을 하는 장면인데 두 그림은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관아재의 풍속화는 여러 명의 남자들이 강제로 채유하는 장면이고, 보르히의 그림은 움직임도 안보이고 소리도 없는 정적인 장면이다. 강제성이 없는 채유 모습을 보여준다. 두 작가들이 이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채유장면이 자주 눈에 띄는 환경에서 그림의 주제가 된 것인지 궁금하다.
송아지를 보여주며 다섯 명 씩이나 덤벼들어 젖을 짜는 장면에서 관아재는 무슨 말을 하고싶었을까? 모든 것을 내어주는 소의 우직한 충정? 동물을 강제로 지배하고 착취하는 인간의 잔인성? 일하는 티를 내는 관료들의 작태를 풍자한 것인지… 아니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세심하게 묘사한 것일 뿐일까?
보르히의 채유 장면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스냅사진 한 컷 정도의 느낌을 줄 뿐이다.
작가 소개
제라드 터 보르히(Gerard ter Borch 1617. 12 네덜란드 즈볼레 출생, 1681. 12. 08 네덜란드 데벤테르 사망)은 Gerard Terburg로도 알려져 있으며 네덜란드 황금 시대의 화가이다. 초상화는 터 보르히의 작품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풍속 장면 (Genre Painting)도 세심하게 그렸다. 특히 의상의 품질, 새틴과 실크의 질감에 주의를 기울였다.
화가인 아버지(Gerard ter Borch Elder)로부터 일찌감치 예술 교육을 받았고, 1634년 하를렘에서 유명한 풍경화가 몰린Pieter de Molijn(1595-1661)에게 사사했다. 다음 해에 훈련을 마치고 세인트 루크 길드에 합류했다. 1635년 여름에 런던에 거주하며 샤를 1세 (Charles I of England)의 조각사로 임명되었다. 1636년 봄에 즈볼레로 돌아왔다. 이후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스페인 왕의 작은 초상화와 함께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가 보르히의 작품에 미친 영향은 보르히가 마드리드에 머물렀음을 시사한다.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난 적이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공화국으로 돌아온 직후 보르히가 그린 여러 초상화는 그가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봤음을 암시한다.
1645년 뮌스터에서 스페인과의 평화 조약을 중재하는 네덜란드 대표단에 합류하도록 초대되었고, 그의 유명한 그룹 초상화인 <뮌스터 조약의 비준 선서>(1648)를 그렸다. 그 작품은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다. 조약이 체결된 후 공화국으로 돌아와 브뤼셀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스페인 왕의 이미지가 새겨진 금메달을 받았다. 1673년과 1675년 사이에 암스테르담 섭정 가문인 드 흐라프(De Graeff)로부터 여러 초상화 의뢰를 받았다. 그는 마침내 데벤테르에 정착하여 시의회 의원이 되었으며 현재 헤이그 갤러리에 있는 초상화에 등장한다. 1681년 12월 8일 데벤테르에서 사망했고, 그의 요청에 따라 시신은 즈볼레로 옮겨져 장크트 미하엘스케르크(Die Sint-Michaëlskerk, Zwolle)에 있는 아버지 옆에 묻혔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제자는 카스파 네셔Caspar Netscher(1639-1684)로 호화로운 질감을 표현하는 보르히의 기술을 많이 배웠고, 보르히 작품의 서명된 사본을 여러 개 그렸다. 그는 동료 네덜란드 화가 가브리엘 메취Gabriel Metsu(1629-1667), 게릿 도Gerrit Dou(1613-1675),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1632-1675)에게 영향을 끼쳤다.
낯선 말 풀이
타락駝酪 - 소의 젖. 백색으로, 살균하여 음료로 마시며 아이스크림, 버터, 치즈 따위의 원료로도 쓴다.
직령直領 - 조선 시대에, 무관이 입던 웃옷. 깃이 곧고 뻣뻣하며 소매가 넓다.
세조대細條帶 - 가느다란 띠.
1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1508023_003
2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302009_002
3 https://sillok.history.go.kr/id/WFA_10006001_002
4 http://db.itkc.or.kr/inLink?DCI=ITKC_IT_V0_A02_01A_14A_00140_2003_009_XML
5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2510006_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