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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Feb 12. 2022

조영석 <이잡는 노승> 바톨로메 무리요 <거지 소년>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시대의 거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곳엔 글의 일부만 남기고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열 손가락을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편견이 없다는 의사 표시이다. 특히 부모의 자식 사랑에 편애가 없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이규보李奎報(1169-1241)의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된 <슬견설蝨犬說>- 이(蝨슬)나 개(犬견)의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손(客)과 내가 논쟁을 벌인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큰 것(개)과 미물(이)의 생명은 다 같이 소중하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우리에게 개는 사랑해줘야 하는 동물이고, 이는 박멸해야하는 해충이지만 이규보의 시에서는 둘 다 같은 ‘생명’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동국이상국전집』 제21권 / 「설設」 <슬견설蝨犬說>
어떤 손이 나에게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어떤 불량자가 큰 몽둥이로 돌아다니는 개를 쳐 죽이는 것을 보았는데, 그 광경이 너무 비참하여 아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네. 그래서 이제부터는 맹세코 개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네.”
하기에, 내가 대응하기를,
“어제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이글한 화로를 끼고 이[虱]를 잡아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나는 아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네. 그래서 맹세코 다시는 이를 잡지 않을 것이네.”
하였더니, 손은 실망한 태도로 말하기를,
“이는 미물이 아닌가? 내가 큰 물건이 죽는 것을 보고 비참한 생각이 들기에 말한 것인데, 그대가 이런 것으로 대응하니 이는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닌가?”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무릇 혈기가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ㆍ말ㆍ돼지ㆍ양ㆍ곤충ㆍ개미에 이르기까지 삶을 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은 동일한 것이네. 어찌 큰 것만 죽음을 싫어하고 작은 것은 그렇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개와 이의 죽음은 동일한 것이네. 그래서 그것을 들어 적절한 대응으로 삼은 것이지, 어찌 놀리는 말이겠는가? 그대가 나의 말을 믿지 못하거든 그대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게나. 엄지손가락만 아프고 그 나머지는 아프지 않겠는가? 한 몸에 있는 것은 대소 지절(支節)을 막론하고 모두 혈육이 있기 때문에 그 아픔이 동일한 것일세. 더구나 각기 기식(氣息)을 품수(稟受)한 것인데, 어찌 저것은 죽음을 싫어하고 이것은 죽음을 좋아할 리 있겠는가? 그대는 물러가서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해 보게나. 그리하여 달팽이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큰 붕새처럼 동일하게 보게나. 그런 뒤에야 내가 그대와 더불어 도(道)를 말하겠네.” 하였다. 1

이의 생명도 귀하니 잘 지켜주자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다만 생명의 귀함에 크고 작음이 없다는 뜻일 게다. 이 자체는 크게 해로운 것이 아니지만 사람에게 옮기는 발진티푸스를 생각하면 이는 반드시 박멸해야 할 해충이다. ‘발진티푸스’가 얼마나 무서운 전염병인가.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무릎을 꿇고 원정에서 실패한 것도 발진티푸스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전쟁 때 집단생활하는 군인들이 적들과 싸우는 것에 더해 이와도 싸워야 했다. 이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도 비인간적인 속어를 제공했다. ‘이를 박멸한다.’는 말로 유대인의 학살을 이야기했다. 발진티푸스는 열 명중에 네 명이 죽을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병의 매개체인 이가 옛 그림 속에 등장한다. 전혀 무섭지 않은 그림,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그림이다. 조선시대 선비 화가 조영석은 <이를 잡는 노승>을 그렸는데, 아마도 이규보의 <슬견설>을 읽은 후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http://www.daej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9942 

조영석 <이 잡는 노승>, 종이에 담채, 23.9 ×17.0㎝, 개인소장


그림 제목은 <이 잡는 노승>이라 했지만 사실은 잡는 게 아니라 털어내는 것이다. 

나뭇가지의 녹음으로 보아 한 여름이다. 노승이 만행 길에 몸이 근지러워 참지 못하고 나무 그늘에서 이를 잡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를 삭제함.



https://collections.louvre.fr/en/ark:/53355/cl010060879

바톨로메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거지 소년The Young Beggar/ The Louse(Lice)-Ridden Boy> c.1647-1648.  캔버스에 유채 134X300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프랑스.

 

그림의 주제는 17세기 스페인의 가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빈곤이 만연하고 엄청난 전염병이 많은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고 거리에서 스스로 버티며 살아갔다.  일찍 고아가 되어 친척들 손에 자란 화가의 어린 시절은 이 그림의 영감이 되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스타일로 유명한 테네브리즘 효과(빛과 그림자의 뚜렷한 대조)를 사용했다. 배경의 그림자 같은 어둠과 전경에 있는 어린 소년은 조명의 매우 강한 대조를 보여준다.  창을 통해 옷이 찢기고 발이 맨발인 소년에게 빛이 쏟아진다. 그림의 왼쪽 위에 있는 창턱에서 볼 수 있듯이 빛과 그림자 사이의 보완적인 대조를 사용했다. 소년은 반대쪽인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 앉아 이를 잡는다.

그의 옆에는 도자기 주전자와 과일과 밀집 바구니가 발치에 놓여있다. 바구니는  안에 몇 가지 음식이 더 들어 있는 듯 불룩하다. 점토 주전자, 밀짚 주머니, 먼지 투성이 사과는 모두 네덜란드와 플랑드르에서 파생된 정물화 유형처럼 정밀하고 신중하게 묘사했다. 소년은 옷을 움켜쥐고 이를 잡는듯 보이지만 그의 마음은 이잡기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다. 식사를 하거나, 침대를 찾거나, 너그러운 행인이 무언가를 던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클 것이다. 소년이 처한 상황에 대한 슬픈 느낌을 자아내는 그림이다. 프란체스코 회원이던 무리요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종교적 믿음으로 거지 소년에게 시선을 집중했고, 작품의 주제로 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네덜란드, 플랑드르 화풍은 가난한 하층민의 인물은 우스꽝스럽고 어색하며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정신적으로 혼란한 인물로 묘사되기 일쑤다. 반면 무리요의 거지 소년은 가난해보일 뿐 우스꽝스럽거나 타락해보이는 모델이 아니다. 

이 그림은 그의 가장 인기있는 작품중 하나로 한때 루이16세의 왕실 컬렉션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 그림은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ès(1547-1616)의 소설 『돈키호테Don Quixote』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소설에 나오는 말 로시난테Rocinante는 해충에 감염된 하찮은 말로 묘사되는데 무리요 그림의 몸에 이가 꼬인 소년이 로시난테에서 비유된 것이라고 한다.


지금 시대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장면이다. 머릿니 때문에 디디티(DDT)를 머리에 뒤집어쓰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전쟁 후, 거리에서 행인들에게 디디티를 살포하기도 했다. 요즘 세상에 구제역이 유행할 때는 그 근처의 출입구에 자동 소독제를 살포하는 장치를 두고 통행하는 차량에 소독약을 뿌리는 모습과 같았다.

우리 풍속화 <이 잡는 노승>은 스님의 표정과 상황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풍속화가 지닌 해학이다. 그러나 서양 풍속화 <거지 소년>은 감상자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지금 눈에 띄지는 않지만, 어느 그늘에서 현대의 거지 소년이 저런 모습으로 앉아있지는 않을지, 외면할 수 없는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마음은 편치 않다.


작가 소개

바돌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holomé Esteban Murillo 1617.12. 스페인 세비야 출생, 1682.04. 세비야 사망)는 바로크 시대의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그는 14명의 가족 중 막내로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1630년경, 그가 약 12살이었을 때 무리요는 지역 화가 카스티요Juan de Castello(1584-1640)의 견습생이었다. 당시 세비야는 번성한 상업 도시였기 때문에 무리요는 다른 많은 지역의 예술을 경험할 수 있었다.  무리요 그림의 세부 사항에 대한 관심, 색상의 세련미, 복잡한 구성은 플랑드르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와 동시대 화가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1599-1660)도 세비야 출신이다.  

26세에 마드리드로 이사하여 벨라스케스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1645년,  무리요는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저명한 빌라로보스(Beatriz  Villalobos, 그와 11명의 자녀를 낳게 됨)와 결혼했다. 같은 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성인들이 행한 기적을 묘사한 그림을 위임받았다.

1649년의 재앙적인 전염병으로 무리요의 자녀 넷이 사망했다. 1652년 섬유 노동자의 격렬한 봉기에도 불구하고 1640년대 말과 1650년대는 예술가로서 무리요에게 가장 바쁜 해였다. 1656년에 무리요는 세비야 역사상 가장 큰 제단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를 제작했다.

세비야는 소수의 부자들을 풍요롭게 했지만, 잦은 농작물 실패와 지속 불가능한 경제로 인해 엄청난 수의 거지가 거리에 나타났다.  무리요의 미술수업 초기에 영향을 받은 세비야 지역 화가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án(1598-1664)과 벨라스케스의 사실주의 영향은 세비야에 만연한 빈곤과 결합되어 가난한 사람들이 일상을 그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수도원과 교회의 수가 증가했으며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자선 행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교회는 바로크 미술을 사용하여 대중에게 기독교 신앙에 접근하고 반종교 개혁 동안 권력을 유지했다.  무리요는 교회로부터 많은 위임을 받았다.

1660년 스페인 최초의 예술 아카데미(Real Academia de Bellas Artes de St. Isabel de Hungría)가 세비야에 문을 열었다. 이탈리아의 미술 학교를 모델로 한 아카데미이다. 무리요는 동료 세비야 예술가 프란시스코 데 에레라 Francisco de Herrera(1576-1656)와 공동으로 아카데미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682년까지 무리요는 카디즈Cadiz에 있는 카푸친Capuchins 교회의 주요 제단을 위한 그림을 의뢰 받았다. 이는 예술가에게 큰 영예이다. 작품은 비계를 사용하여 현장에서 직접 실행되어야 했다.  중앙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때 무리요는 최소 20피트 높이에서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복벽이 파열되었고 몇 달 간의 끔찍한 고통 끝에 사망했다.  탐험가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1451-1506)와 같은 매장지인 세비야 대성당, 그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페드로 데 캄파냐의 십자가에서 내려오다> 앞에 묻혔다.


낯선 말 풀이

기식氣息         - 숨을 쉼

품수稟受        - 선천적으로 타고남.

붕새             - 하루에 구만 리(里)를 날아간다는, 매우 큰 상상(想像)의 새. 북해(北海)에 살던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변해서 되었다고 한다

만행萬行       - 불교도나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여러가지 행동. 여러 곳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닦는 온갖 수행.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004A_0230_010_0040_2000_003_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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