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글을 읽고 의리를 강론하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요, 부녀자는 절서에 따라 조석으로 의복ㆍ음식을 공양하는 일과 제사와 빈객을 받드는 절차가 있으니, 어느 사이에 서적을 읽을 수 있겠는가? 부녀자로서 고금의 역사를 통달하고 예의를 논설하는 자가 있으나 반드시 몸소 실천하지 못하고 폐단만 많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나라 풍속은 중국과 달라서 무릇 문자의 공부란 힘을 쓰지 않으면 되지 않으니, 부녀자는 처음부터 유의할 것이 아니다. 《소학》과 《내훈(內訓)》의 등속도 모두 남자가 익힐 일이니, 부녀자로서는 묵묵히 연구하여 그 논설만을 알고 일에 따라 훈계할 따름이다. 부녀자가 만약 누에치고 길쌈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먼저 시서에 힘쓴다면 어찌 옳겠는가?『성호사설』16권 인사문 <부녀지교婦女之敎> 1
『성호사설』은 조선의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이 평소에 제자들과 나누던 문답을 엮은 책이다. 위 글은300여년 전 조선 여인들에게 준 가르침이었다.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책읽기에 대해 가장 많이 쓰는 말은 “독서삼매경讀書三昧境”일 것이다. 불교 용어 '삼마디samadhi'의 한자 표기인 삼매三昧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이 '삼마디'의 경지는 곧 선禪의 경지와 같다. 독서삼매경은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책 읽기에만 골몰하는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독서망양讀書亡羊이라는 말이 있다. 『장자莊子』 변무편駢拇篇에 나오는 말이다. 다른 일에 정신을 뺏겨 중요한 일을 망쳤다거나, 중요한 일을 하다가 다른 일을 그르친 상황에서 인용되는 말이다. 문자 그대로 보자면 책을 읽다가 양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이야말로 독서삼매에 빠진 것 아닌가!
위편삼절韋編三絶, 공자는 주역을 읽고 또 읽느라고 가죽으로 묶은 끈이 세 번씩이나 끊어졌다는 고사가 있다. 죽간竹簡(대나무 조각을 가죽끈으로 엮어 만든 책)을 엮은 가죽끈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하나의 책을 정독한 예이다.
두보의 시 <제백학사모옥題柏學士茅屋>에는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는 글귀가 있다.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 만큼의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독을 권하고 있다.
조선시대, 17세기부터는 많은 여성들이 한글로 된 『규중요람』 『내훈』 『삼강행실』 등 현모양처가 되기 위한 지침서를 읽기 시작했다. 여성의 독서가 여성용 책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구운몽』을 쓴 김만중金萬重(1637-1692)의 어머니 해평윤씨는 『소학小學』, 『사략史略』, 『당률唐律』을 읽고 아들들에게 손수 가르쳤다고 한다. 문인 학자나 과거지망생들의 전유물이었던 독서가 여성들에게까지 퍼진 것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에 전해진 패관소설의 인기가 한 몫을 했다.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모아 기록한 것이 패관소설이다.
한편 독일 작가 슈테판 볼만Stefan Bollmann(1958- )은 그의 저서에서 ‘책과 여자’를 집중 조명했는데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Frauen, die Lesen, sind gefährlich.』(Elisabeth Sandmann, 2005)]라는 책을 출간했다. 한국어로도 번역 출간되었다(조이한, 김정근 역. 웅진지식하우스,2006).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시대에 자의식이 강한 여성이 위험하다고 여긴 것은 정황상 이해할 수 있으나 2000년대에 서양에서 출간된 책에서 책 읽는 여성의 위험성을 다루다니 놀랍고 또 놀랍다. 물론 여성의 독서에 대한 위험성을 집중적으로 다룬 책은 아니다. 화가들이 책 읽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그린 그림들을 중심으로 쓴 그림읽기 책이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이어서 새로운 버전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고 현명하다Frauen, die lesen, sind gefährlich und klug.』로 출간됐다. 새로운 그림과 텍스트가 추가된 신간은 여성들의 책에 대한 접근이 그들을 훨씬 더 현명하고 지식이 풍부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가부장 시대에는 책읽는 여성을 급진적이라고 여겼다. 자존감이 강하고, 전통적인 세계관 특히 남성중심적 세계관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왜 위험했을까?
지금은 ‘책 읽는 여성’은 시대의 요구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수백년 전부터 여성이 책을 읽어왔다. 조선시대 여인의 책읽는 모습을 풍속화로 만나본다.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16957&menuNo=200018
윤덕희 <독서하는 여인> 비단에 수묵담채, 20×14.3㎝,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CC BY 공유마당.
윤덕희는 아버지 윤두서가 개척한 풍속화를 계승했고, 윤덕희의 아들 윤용도 가풍을 이었다. 해남 윤씨 종가 녹우당綠雨堂은 책이 많기로 유명하다. 아버지 윤두서의 <미인독서>와 아들 윤덕희의 <독서하는 여인>은 녹우당의 서책들이 만들어낸 그림이리라.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밤에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녹우당의 서책들이 뿜어내는 책냄새를 맡으며 생활한 윤덕희의 풍속화이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를 삭제함.
아, 조선 여인들의 삶이여! 책도 마음대로 못 읽었구나.
https://artvee.com/dl/young-girl-reading/#00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 Honoré Fragonard <책 읽는 소녀Young Girl Reading> c. 1769. 캔버스에 유채. 81.1x64.8cm. 워싱턴 국립미술관, 워싱턴 DC, 미국
서양화에서 책 읽는 여성이 등장하는 것은 주로 종교화의 성모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이다. 성모 마리아는 수태고지 그림에서 성서를 읽고 있는데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고, 막달라 마리아는 성무일과서聖務日課書(Breviary)를 열심히 보고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18세기에는 책 읽는 여성을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많은 문학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특히 여성들은 소설을 즐겨 읽었다.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긴장감에서 해방된 모습으로 책 읽는 그림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프라고나르의 <책 읽는 소녀> 그림에는 우아한 노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대고 책을 읽고 있다. 프라고나르 ‘환상의 인물 Figures de fantaisie’ 시리즈의 일부인 이 그림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프랑스 로코코시대 그림 중 하나이다. 로코코 컬러로 여성스러움의 감성과 무드를 표현하였다. 소녀의 얼굴과 드레스는 정면에서 빛이 들어오고, 어두운 배경 색상은 피사체를 강조한다. 소녀의 뒤쪽 벽에 희미한 그림자가 있다. 더 어두운 황토색은 팔걸이와 함께 배경 벽과 그림자에 힘을 준다. 갈색 벽의 강한 수직 구조는 수평 막대인 팔걸이와 결합되어 견고한 구성을 드러낸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 상류사회의 라이프 스타일은 문화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 무렵에 볼테르Voltaire François-Marie Arouet(1694-1778)의 『캉디드Candide』 같은 작은 책들이 출판되어 엘리트들이 손에 들고 다니며 읽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림 속 소녀가 읽는 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그 당시 유행하던 작은 책이다.
프라고나르는 얼굴에 미세한 붓놀림을 사용했고 드레스와 쿠션에는 느슨한 붓놀림을 사용했다. 러프의 정확한 디테일을 구현하기 위해 나무 브러시(혹은 미술용 나이프)를 사용하여 페인트를 조각했다. 부드럽고 섬세한 색상과 노란 색조의 구성은 전형적인 로코코 색 스타일이다. 베개의 바이올렛 틴트, 짙은 톤의 벽과 팔걸이, 소녀의 장미빛 피부와 화사한 노란색 드레스가 따뜻함과 환희, 관능적인 느낌을 연출한다. 소녀의 손가락은 마치 어떤 신호처럼 그녀의 책을 둘러싸고 있어 붓놀림의 빠른 유동성을 볼 수 있으며, 이는 프라고나르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1985년에 엑스레이 촬영에서 프라고나르가 이미 존재하는 초상화 위에 독서하는 소녀의 머리를 그렸다는 것을 발견했다. 밑 그림은 얼굴이 4분의 3 정도 보인다. 관객과 수줍게 눈을 마주치는 중년 여성이다. 스케치의 소녀는 팔꿈치를 얹은 난간으로 표시된 창가에 앉아 오른손에 책을 들고 큰 베개에 기대어 있다. 스케치에서도 밑 그림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머리는 보는 사람을 향하고 있다.
서양미술에서는 13세기부터 현재까지도 책 읽는 여자를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전해진다. 이탈리아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 1430∼1479)의 <수태고지> 이후 수없이 많이 그려진 ‘책 읽는 여성’의 모습은 비슷비슷하다. 여성이 읽는 책이 성서에서 세속의 책으로 바뀌어 갔을 뿐, 여성과 책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윤덕희는 사대부 가문 출신이다. 그림에서도 그 기품이 엿보인다. 프라고나르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친밀한 분위기와 가려진 에로티시즘을 전달하는 풍속화이다. 위 그림 속 조선의 여인과 서양의 소녀가 읽는 책은 어떤 내용일까? 현미경을 대고 들여다봐도 알 수 없을 그 내용이 궁금하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시집가는 큰 딸에게 교훈서 『우암계녀서尤庵戒女書』를 남겼다. “부인의 소임이 의식衣食밧게 업사니…”. 지금 시집가는 딸에게 이런 편지를 써서 손에 쥐어준다면 딸은 아버지 집에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책은 정독을 하지 않아도, 함께 있기만해도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 숲의 피톤치드처럼 책나무들은 책냄새를 뿜어낸다. 책냄새에 취하면 환상의 세계를 거닐기도 하고, 지식의 빛을 쬐며 지혜의 열매가 영글어가기도 한다. 독기를 뿜어내는 것을 피하기만 하면 말이다.
작가 소개
장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1732. 04. 05 프랑스 그라스 출생, 1806. 08. 22 프랑스 파리 사망)는 로코코 예술의 화가이다. 사랑을 추구하는 연인들의 그림, 휘날리는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숙녀들, 전원적인 장면으로 유명하다. 18세기, 특히 루이 15세의 통치 기간 동안 파리에서 나타난 로코코 양식은 밝은 색상, 비대칭 디자인, 곡선형의 자연스러운 형태가 특징이다. 프라고나르의 회화는 내러티브 드라마처럼 독특하다. 화면은 종종 무대처럼 구성되며, 빛을 사용하여 사건의 순서가 명확해지도록 보는 사람의 눈을 유도한다
1747년, 프라고나르는 장 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Siméon Chardin의 화실에서 견습생으로 일한 후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밑에서 공부했다. 1752년 로마 대상(Prix de Rome)을 수상한 그는 1756~61년을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에 거주하면서 골동품과 르네상스 회화를 공부했다. 1761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와 17세기 네덜란드 풍경의 영향을 결합한 그의 캐비닛 그림(small cabinet-size paintings)으로 미술 시장에 진입했다. 1765년에서 1770년 사이에 유명 인사들의 공상적이고 외설적이며 에로틱한 초상화를 그려 본격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로코코 운동을 대표하는 <그네Swing>와 같은 에로틱한 걸작을 그렸다. 루이 15세의 공식 정부인 뒤바리 백작부인(Jeanne Antoinette Bécu, comtesse du Barry) 같은 개인 고객을 위해 이젤 그림을 그렸다.
1773~1774년, 부유한 장군인 피에르 자크 오네심 베르제레(Pierre Jacques Onésyme Bergeret de Grancourt)의 예술적 동반자로서 두 번째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이 시기에 브라운 워시 기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프라고나르의 페인트 적용은 캔버스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옷의 주름을 나타내는 길고 유동적인 스트로크, 나뭇잎과 꽃을 전달하는 짧은 붓터치, 흐르는 물은 빛과 그림자 사이의 극적인 대조를 통해 색상과 톤 사용으로 보완된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프라고나르는 평면적인 구성과 매끄러운 표면으로 새로 유행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재창조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행정직을 맡았다. 인물과 풍경을 가까이서 보면 하나의 획으로 분해되도록 이끄는 프라고나르의 표현적인 붓놀림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주제는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에 관심이 있는 21세기 예술가들에게 관심을 끌었다.
낯선 말 풀이
절서節序 - 절기의 차례. 또는 차례로 바뀌는 절기.
곁마기 - 여자가 예복으로 입던 저고리의 하나. 연두나 노랑 바탕에 자줏빛으로 겨드랑이, 깃, 고름, 끝동을 단다. 저고리 겨드랑이 안쪽에 자줏빛으로 댄 헝겊.
삼회장 - 여자 한복 저고리의 깃, 소맷부리, 겨드랑이에 대어 꾸미는 색깔있는 헝겊.
다리 - 예전에, 여자들의 머리숱이 많아 보이라고 덧넣었던 딴머리.
얹은머리 - 땋아서 위로 둥글게 둘러 얹은 머리.
삽병揷屛 - 그림이나 서예, 조각품을 나무틀에 끼워서 세운 것을 말하는데,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실내 장식용 가구에 속한다.
1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8A_0170_010_0220_2002_006_XML
2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7A_0300_020_0040_2000_006_XML
https://brunch.co.kr/@erding89/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