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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Jan 09. 2022

윤두서<채애도>, 카미유 피사로 <허브 줍기>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시대의 거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곳엔 글의 일부만 남기고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시대가 바뀌었어도 봄철이면 산과 들에서 나물캐는 여인들을 보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생계를 위한 일이고, 누군가에게는 취미이다. 도시 사람들이 나들이길에 눈에 띄는 나물을 마구 캐가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어느 날 라디오를 들으니 청취자가 보낸 편지를 읽는데 “도시 사람들, 머위는 캐는 것이 아니고 꺾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제철에 출하할 머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마구 캐간 모양이다. 머위는 순을 꺾으면 몇 번 더 새순을 얻을 수 있는 나물이다. 뿌리째 뽑힌 머위를 보고 농부는 얼마나 속이 상했겠는가. 더구나 경제적 손실도 클 것이다. 

나물은 뿌리째 먹는 것은 캠대로 캔다. 뿌리를 먹지 않고 잎을 먹는 것은 뜯거나 꺾는다. 반찬으로 먹는 것뿐 아니라 약초도 있고, 쌀과 함께 식량이 되기도 한다. 춘궁기에  나물은 곡식을 느루먹는데 한 몫 단단히 한다. 특히 솜털 보송한 애쑥은 쑥버무리로, 나중에 나온 쑥은 쑥개떡으로 만든다. 쌀이 귀하던 시절엔 밀가루와 섞어서 쑥개떡을 만들어 끼니를 대신했지만 요즘엔 개떡도 쌀가루로 만든다. 온실재배가 없던 시절엔 채취한 온갖 나물들을 건조하여 저장하고 일년 내내 먹었다. 

 

그림을 보며 옛 문인의 나물에 관한 시를 음미해본다.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전간기사田間紀事 6편(1810년)중에 <채호采蒿>라는 시를 쓰며 스스로 주석을 앞에 두었다.

『다산시문집』 권 5, <채호采蒿> 채호는 흉년을 걱정하여 쓴 시다. 가을이 되기도 전에 기근이 들어 들에 푸른 싹이라곤 없었으므로 아낙들이 쑥을 캐어다 죽을 쑤어 그것으로 끼니를 때웠다.[釆蒿閔荒也 未秋而饑 野無靑草 婦人釆蒿爲鬻以當食焉 채호민황야 미추이기 야무청초 부인채호위죽이당식언]
 
다북쑥을 캐고 또 캐지만 / 釆蒿釆蒿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로세 / 匪蒿伊莪
양떼처럼 떼를 지어 / 群行如羊
저 산언덕을 오르네 / 遵彼山坡
푸른 치마에 구부정한 자세 / 靑裙偊僂
흐트러진 붉은 머리털 / 紅髮俄兮
무엇에 쓰려고 쑥을 캘까 / 采蒿何爲
눈물이 쏟아진다네 / 涕滂沱兮
쌀독엔 쌀 한 톨 없고 / 甁無殘粟
들에도 풀싹 하나 없는데 / 野無萌芽
다북쑥만이 나서 / 唯蒿生之
무더기를 이뤘기에 / 爲毬爲科
말리고 또 말리고 / 乾之䕩之
데치고 소금을 쳐 / 瀹之鹺之
미음 쑤고 죽 쑤어 먹지 / 我饘我鬻
다른 것 아니라네 / 庶无他兮
다북쑥 캐고 또 캐지만 / 采蒿采蒿
다북쑥이 아니라 제비쑥이라네 / 匪蒿伊菣
명아주도 비름도 다 시들고 / 藜莧其萎
자귀나물은 떡잎도 안 생겨 / 慈姑不孕
풀도 나무도 다 타고 / 芻槱其焦
샘물까지도 다 말라 / 水泉其盡
논에도 전청이 없고 / 田無田靑
바다에 조개 종류도 없다네  / 海無蠯蜃
높은분네들 살펴보지도 않고 / 君子不察
기근이다 기근이다 말만 하면서 / 曰饑曰饉
가을이면 다 죽을 판인데 / 秋之旣殞
봄에 가야 기민 먹인다네 / 春將賑兮
남편 유랑길 떠났거니 / 夫壻旣流
나 죽으면 누가 묻을까 / 誰其殣兮
오 하늘이여 / 嗚呼蒼天
왜 그리도 봐주지 않으십니까 / 曷其不憖
다북쑥을 캐고 또 캔다지만 / 采蒿采蒿
캐다가는 들쑥도 캐고 / 或得其蕭
혹은 쑥 비슷한 것도 캐고 / 或得其䕲
제대로 다북쑥을 캐기도 한다네 / 或得其蒿
푸른 쑥이랑 흰 쑥이랑 / 方潰由胡
미나리 싹이랑 / 馬新之苗
무엇을 가릴 것인가 / 曾是不擇
다 캐도 모자란데 / 曾是不饒
그것을 뽑고 뽑아 / 搴之捋之
둥구미와 바구니에 담고 / 于筥于筲
돌아와 죽을 쑤니 / 歸焉鬻之
아귀다툼 벌어지고 / 爲餮爲饕
형제간에 서로 채뜨리고 / 兄弟相攫
온 집안이 떠들썩하게 / 滿室其囂
서로 원망하고 욕하는꼴들이 / 胥怨胥詈
마치 올빼미들 모양이라네 / 如䲭如梟 1


쑥은 지금처럼 별미, 특별식이 아니라 끼니를 잇는 식량이었다. 조선왕조 실록에도 곳곳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세종 26년(갑자, 1444) 4월 23일(임인) 기록.
병조 판서 정연(鄭淵)이 아뢰기를, “신이 청안(淸安) 지방에 가니, 남녀 30여 인이 모두 나물을 캐고 있으므로, 신이 종자(從者)를 시켜서 살펴보니 모두 나물만 먹은 빛이 있었습니다. 또 지인(知印)이 서울에서 와서 말하기를, ‘백성은 나물을 캐는 자로 들판을 덮고 있으며, 대개 나물만 먹은 빛이 있다.’ 하오니, 신은 백성들의 기아(飢餓)를 염려합니다.” 2
세종 26년(갑자, 1444) 4월 27(병오)일 기록.
"신 등이 여러 고을을 돌아보오니, 혹 양식이 떨어진 자도 있고 혹 나물만 먹는 자도 있으며, 혹 부종浮腫이 난 자도 있었사온데, 쌓아 둔 곡식은 많아야 1, 2두斗에 불과했으며, 적은 자는 1, 2되(升) 밖에 없었으되 혹은 다 먹고 없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3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16992&menuNo=200018 

윤두서 <채애도>《윤씨가보》 18세기 초, 모시에 수묵, 30.2×25.0cm. 고산유물관 전시. CC BY 공유마당


고산 윤선도尹善道(1587-1671) 유물관에 전시된 공재 윤두서의 그림 <채애도採艾圖>이다. 앞에 소개한 다산 정약용은 윤두서의 외증손이다.  윤두서의 풍속화는 <경전목우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양에 살았던 1713년 이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윤두서 사후 1722년(경종 2)에 이하곤李夏坤(1677-1724)이 녹우당에 들렀을 때 아들 윤덕희가 아버지의 화첩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현재 남아있는 《가전보회》, 《윤씨가보》 화첩으로 추정되고 있다. <채애도採艾圖>는 《윤씨가보》에 들어있는 그림이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를 삭제함.


https://www.wikiart.org/en/camille-pissarro/peasant-gathering-grass-1881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허브줍기Peasant Gathering Grass / Paysanne ramassant de l'herbe > 1881. 캔버스위에 유채, 개인 소장



왼쪽 https://www.wikiart.org/en/camille-pissarro/gathering-herbs-1882

<허브줍기Gathering Herb> 1882. 36.8 x 27.3 cm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오른쪽 https://www.wikiart.org/en/camille-pissarro/peasants-gathering-grass-1883

<허브줍기Peasants Gathering Grass> 1883.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카미유 피사로는 그림을 그릴 때 높은 시점을 즐겨 선택했다. 도시 풍경을 그리기 위해 맨 꼭대기 창에서 내려다보는 식이다. 색으로는 백악질 색조를 개발했고, 녹색과 파란 색조를 선호했다. 위의 그림들은 이러한 피사로의 화풍이 잘 드러난다. 초록빛 풀밭 위에 푸른 옷의 여인은 그의 선호하는 색감이며, 나물을 뽑기 위해 엎드린 여인의 등은 높은 시점이다.

위 그림들 외에도 나물캐는 여인의 그림이 더 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중후반에 프랑스 시골에서는 '나물캐기/풀 뜯기'가 일상화된 풍경이었을까?  그들도 조선시대 백성들과 21세기의 대한민국 국민들처럼 들에서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을 채취했을까? 프랑스어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어느 것은 “Grass”로, 어느 것은 “Herb”로 되었는데 피사로가 붙인 제목은 '허브'이다. 윤두서의 <채애도>처럼 칼로 캐거나 뜯는 행위는 아니지만 허브를 주워모으는(Gathering Herb / Paysanne ramassant de l'herbe.) 모습이다. 식용으로 섭취하든지, 향료로 사용하기 위해 허브를 채취한다. 허브를 모으려고 비탈진 곳에 오르기도 하고, 땅바닥에 구부리기도 하는 모습은 조선의 그림이나 서양의 그림이나 다를 게 없다. 담을 그릇으로는 다래끼나 바구니가 등장한다. 다만 조선의 다래끼는 입구가 몸체보다 좁게 오므라진 모습이고, 서양의 바구니는 헤벌어진 모습이다.

 

조선시대에 나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배고픔을 달래는 고된 삶을 살았다. 양반들은 안빈낙도의 삶으로 나물을 말했다. 

“飯蔬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 ” 『논어』 술이 述而 편15장.

“반소사음수 곡굉이침지 낙역재기중의 –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베고 잠을 자는 궁핍한 생활일지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안에 있으니”라고 읊었다. 이 글은 공자님 말씀으로 가난한 삶이 즐거움이라는 뜻은 아니다. 뒤에 붙은 구절은 “不義而富且貴 於我 如浮雲 불의이부차귀 어아 여부운”으로 비록 가난하더라도 생활이 궁핍하더라도 그 가운데서 도를 즐거워하며 산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생활신조로 나물을 내세워 청빈한 삶 속에 여유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가 진정한 평안이었다면 선비의 기품이고, 쓰디쓴 빈곤을 이겨내려는 자구책이었다면 눈물겨운 안쓰러움이다. 

프랑스 향수가 귀부인들의 기호품으로 인기였다면, 허브를 채취하는 여인들에겐 허리 통증이 심한 노동이었다. 프랑스에서 자연산 허브의 맛이 미식가들의 혀를 행복하게 해줄 때 그들은 들판에서 땅에 바짝 엎드려 허브를 채취하는 노동의 강도를 이해하기나 했을까?

 

작가 소개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 07. 10 버진 아일랜드 세인트 토마스 출생, 1903. 11. 13 프랑스 파리 사망)는 프랑스 인상파 운동의 핵심 구성원 중 한 명이다. 야외 회화(플랭에르En plein air/Plein air painting)에 전념한 그는 모네Claude Monet(1840-1926), 시슬리Alfred Sisley(1839-1899)와 함께 19세기 후반 최고의 풍경화가 중 한 명이다. 풍경, 초상화, 정물, 농민 장면을 포함한 대부분의 회화 장르에 걸쳐 다양한 주제를 그렸다.

프랑스계 포르투갈인 유대인 아버지가 화가의 길을 반대하자 1852년 그는 친구인 덴마크 예술가 프리츠 멜뷰Fritz Melbye(1826-1869)와 함께 베네수엘라로 도망갔다. 그들은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 정착하여 열대 조건에서 자연과 소작농 생활을 연구했다. 그곳에서 피사로는 인상파 주제로 이론화하는 데 도움이 될 색상에 대한 빛의 영향을 집중 연구했다. 3년 후 그의 아버지는 마음을 돌이키고 1855년에 피사로는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1856년 그는 에꼴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 1859년에 아카데미 스위스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급진적인 젊은 화가 클로드 모네를 처음 만났다. 피사로는 1859년 ‘살롱’에서 작품을 수락했지만, 1860년대에 반체제 인사들과 함께 ‘낙선전’에서 전시회를 했다.

피사로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준 사람은 코로 Jean-Baptiste-Camille Corot(1796-1875)이다. 코로의 영향으로 자연주의 감각과 ‘야외 회화’에 대한 열정이 더해갔다. 1864년과 1865년 파리 살롱 카탈로그에 자신을 코로의 제자로 기재했다.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 12마일 떨어진 루브시엔느Louveciennes에서 그는 농민을 주제로 그렸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조명 효과와 대기 조건에 중점을 두었다. 

1870-71년 프로이센 전쟁으로 피사로는 1870년 9월 루브시엔느에 있는 그의 집에서 탈출해 런던으로 갔다. 이 기간동안 그의 초기 작품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1874년 4월 인상파 화가들의 첫 공개 전시회가 열렸다. 피사로의 풍경은 미술 평론가들에 의해 질타를 받았으나 그는 1874-1886년 8번의 인상파 전시회에 모두 출품한 유일한 화가이다. 

1880년대 중반, 점묘법의 선구자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1859-1891)와 폴 시냑Paul Signac(1863-1935)과의 만남은 피사로가 찾던 영감을 주었다. 점묘법에 대한 실험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정치적으로 그는 헌신적인 아나키스트였다. 보색의 병치에 의해 생성된 점묘주의의 색상 조화는 개인의 결합에 의해 달성되는 사회적 조화에 초점을 둔 아나키스트 정신과 연결되었다. 1894년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가 프랑스 대통령을 암살한 후, 피사로는 정치적 박해를 피하기 위해 잠시 벨기에로 망명했다.

피사로의 예술은 그의 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 사회주의-무정부주의적 정치적 성향을 반영하여 공동 마을의 농민 노동을 존엄하게 만든다.

 

낯선 말 풀이

캠대                - 풀뿌리를 캘 때 쓰는, 끝이 뾰족하고 단단한 나무 막대기.

느루먹다          - 양식을 절약하여 예정보다 더 오래 먹다.

전청田靑           - 논우렁이.

다래끼            - 아가리가 좁고 바닥이 넓은 바구니. 대, 싸리, 칡덩굴 따위로 만든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60A_0050_010_1260_2000_002_XML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604023_002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604027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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