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와 인연에 대한 탐구 4
수필 <끈, 줄, 선>
큰맘먹고 꼼꼼한 청소를 했다. 청소할 때 제일 싫은 일은 정리정돈이다. 내가 단순노동자 기질이 있는지, 쓸고 닦기만 하는 일은 별로 귀찮을 것도 없지만, 물건들을 정리하는 일은 쓰레질하는 일보다 걸레질하는 일보다 머리를 좀 써야하는 일이어서 영 귀찮기만하다. 이 첫 단계를 허술하게 하면 쓰레질 할 때 편치 않고,쓰레질을 깔끔히 못하면 걸레질이 또 어렵게 되니 청소 한번 하는데도 그 순서를 지켜야한다.
빗자루에서 진공청소기로 쓰레질이 바뀐 후부터는 정리정돈의 첫 단계가 더욱 중요해졌다. 진공청소기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적용하도록 만들지 않았는지, 아무것이나 마구 빨아들인다. 제일 만만한 게 레고 블록의 작은 조각, 퍼즐 조각, 그리고 동전이다. 좀 더 큰 것들은 빨아들이려는 청소기와 버티고있는 물건과 실랑이를 벌인다. 커튼자락이나 치맛자락도 가끔은 청소기에 끌려들어가는 위기를 맞는다.
오늘은 책상주변의 전자제품 선들을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쉽게 생각하고 엉거주춤 구부린 채 손을 댔다가 잠시 후엔 아예 바닥에 털석 주저앉고 말았다. 주저앉아서도 한참을 얽힌 선들을 따로따로 분리해가며 가지런히 하느라고 애썼다. 소켓에 꽂혀있는 쪽과, 전자제품에 붙어있는 쪽을 서로 확인해가며 자리 찾기를 하는 일이 처음엔 짜증이 나더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게 주어진 중요한 사명처럼 열중하게 되었고, 약간의 흥미까지 느끼게 되었다.
얽힌 선 사이를 이리 빠져나가서, 저리로 들어가고, 다시 다른 선의 밑으로 위로 통과하며 가로지르며 실마리를 찾느라고 진땀을 뺏다. 마치 얽힌 실타래를 풀 듯, 그것도 실꾸리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복잡하게 얽힌 선들을 정리하듯, 인생의 뿌리 찾기를 하듯, 그런 작업을 하는데 짧지않은 시간을 보냈다.
별것도 아닌 선들 몇 개 정리하면서도 제대로 찾아서 가지런히 바로잡고 깔끔해지면 만족감을 느끼는데, 인생의 얽힌 선들을 정리한 후엔 뿌듯한 성취감이 있는 게 당연하다.
컴퓨터와 연관된 선들 – 모니터, 마우스, 자판, 앰프, 두 개의 스피커, 프린트, 마이크겸 헤드폰, 컴퓨터용 소형 비디오 카메라, 인터넷 전용선, 게다가 아이들이 가끔 하는 게임기의 선까지 열 손가락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꼽아도 모자라는 선들이 컴퓨터와 연결돼 있다. 그런데, 컴퓨터와 그 주변기기들 끼리만 연결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컴퓨터와도 이어져 있어야하며, 전기소켓과도 이어져 있어야 한다.
환자가 필요한 것을 몸안으로 공급하기 위해 꽂아 놓은 호스, 불필요한 것을 몸 밖으로 빼어내기 위해 꽂아놓은 호스, 이렇게 몇 개의 호스를 주렁주렁 매달고 연명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환자의 몸에 꽂힌 줄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인데, 집안에 너울너울 늘어져있는 전자제품의 줄들은 과연 우리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일까? 그럴 것이라는 답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쉽게 나온다. 그 선들에 얽힌 노예가 된 현대인들이 아닌가!
책상 위에는 컴퓨터 외에도 팩스 기기가 있고, 전화기가 있다. 한 구석엔 TV가 있고, 그와 연결된 비디오 기기, 전기 스탠드, 전기난로가 있다. 뿐만 아니라 전자기타의 앰프와 그에 연결된 전자기타도 함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제법 많은 선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오디오셋트는 다른 방에 있는데도 거실엔 한도끝도 없이 많은 선들이 공중에 너울너울 늘어진 모습으로, 바닥에 둥그레 똬리를 튼 모습으로, 벽에 붙어 꼬불꼬불 기어가는 모습으로 사방을 점령하고 있다.
선, 끈, 줄. 가지런히 정리한 후에도 마치 내 몸이 얽매인 듯 답답했다. 긴 칼을 시원스레 큰 동작으로 휘둘러 척척 다 끊어버리고싶은 충동이 일었다. 주저앉아서 예리한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내고싶은 충동도 일었다. 방안의 수십개 끈들이 나를 포박하고 옥죄는 느낌으로 숨이 답답했다.
이제 모든 선들은 얌전히 벽쪽에 붙어있다. 그 선들이 나를 직접적으로 가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합세하여 짜놓은 촘촘한 시간의 그물망에 나는 걸려들고 말았다. 그물에 걸린 것들이 그렇듯이 가끔은 벗어나려고 허우적거려 보기도한다. 그물을 벗어나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버둥거릴수록 덧씌워지는 것이 그물의 속성인 것을.
낮에 꼼꼼한 청소를 시도한 일은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방문객을 맞을 준비였던 것이다.
저녁에 방문객과 함께 차를 마시며 우리들이 나눈 이야기는 한국사회의 학맥, 인맥이었다.
유학중인 내 아들에게 그 분이 해준 이야기는 좋은 논문을 국제적인 유명 학술지에 일년에 서너편씩 꾸준히 몇 년간 발표하라는 충고였다. 한국 사회에서 대단한 힘을 가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학맥과 인맥을 뛰어넘는 길은 그 방법-좋은 논문 발표 밖에는 없다고 일러주셨다.
밤이 깊도록 우리들은 그 저주스러운(?) 줄서기, 연잇기, 맥찾기, 끈 대기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한 가지 더. 입양아의 이야기를 하면서 혈연이야기도 나왔었다. 종일 끈에 매인 하루였다.
(옛날 일기에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