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수유동, 한강
2023년 설 명절치레를 마치고 할머니에서 엄마에서 나로 돌아왔다. 제일 먼저 한 일은 핫팩을 허리밑에 깔고 자리에 눕는 일이었다. 그렇게 30분, 핫팩을 어깨쪽으로 옮겨 다시 30분, 몸을 위한 시간이었다. 눕기 전엔 잠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오히려 맑아진 정신은 나를 책상 앞으로 불러낸다.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널 때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한강물을 보며 감탄한다는 브런치 이웃님의 글을 읽으며 서울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강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기억들, 동서로 강변을 달리던 기억, 저녁무렵 황금빛 강물에 눈이 멀 것 같던 기억.
이상국 시인의 “혜화역 4번 출구”를 필사한 브런치 이웃님의 글을 읽으며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구절 구절이 떠올랐고, 내 나이답게 자연스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유행가 가사를 읊조리다가 그 가사는 난데없이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까지 연결되었다. 이쯤되면 나는 이미 과거행 타임머신에 올라탄 것 아닌가. 타임머신은 무질서하게 달린다. 동서남북 지역 구분없이, 선행 후행 순서도 없이, 쾌속이거나 완행이거나 등급없이, 게다가 지정된 정거장도 없이 아무데서나 멈춘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곳곳에 멈춰선 타임머신의 창밖을 내다본다.
글을 써야겠다.
글을 쓰려면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여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글에 대한 예의이고 독자에 대한 예의이다. 비문의 남발은 글에게도 독자에게도 무례한 짓이다. 그러나 어쩌지? 오늘은 “글”에 “독자”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싶다. 뇌 속 갈피갈피에 숨어있다가 톡톡 튀어오르는 단어들을 그대로 뽑아올린다. 서울살이는 당연히 나이대로 순서가 있지만, 두서없이 쓴다. 기억은 질서있게 시간의 순서대로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아무데서나 불쑥불쑥 나타난다. 마중물 한 바가지 퍼부은 추억의 샘은 펌프질을 할 때마다 콸콸 쏟아져(?) 아니 솟구쳐 오른다.
광화문
참 많이도 걷고 또 걷던 길이다. 시청에서 동아일보와 교보문고를 지나 직진하여 경복궁을 가거나, 길 끝에서 안국동 방향으로 가다가 인사동으로 꺾어 들어가거나, 반대로 내가 살고싶어하던 동네 가회동으로 휘어지거나 그렇게 걷던 길이다. 광화문과 직결된 단어는 은행나무이다. 나의 감성을 휘어잡았던 광화문 가을의 은행나무들은 이미 오래 전에 뽑혔다(잘렸다?). 노랗게 물들기 시작할 때부터 그 길을 걸을 설렘을 안고 이번 주말? 다음 주말?을 재던 시절이 있었다. 노란 은행잎이 봄나비처럼 팔락이며 춤을 추며 날아다니던 광화문의 가을길은 그곳이 아닌 내 안에 남아있다. 은행나무는 인도에 있지 않아서 떨어진 은행열매에 대한 불쾌한 기억은 없다. 남자친구가 군대 갔을 때 혼자 걷던 거리,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대로 북적거리는 그 거리에서 나 혼자만 외톨이가 된 것같은 진저리치는 외로움을 삼키며 걸었다. 그가 휴가를 나오면 온 거리가 다 나의 길인양 활개를 치며 걸었다.
아, 갑자기 생각나는 문학회 후배 ㅇㅇㅇ. 그 애와 함께 여러 번 광화문 길을 걸었었다. 광화문길이 변했듯이 그 애도 변했다. 그 후배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버리고 자신이 선택한 이름으로 개명했다. 뿐만 아니라 성까지도 바뀌었다. 미국에서 사는데 남편의 성을 따라 완전히 성과 이름이 다 바뀐 것이다.
당주동에서 내자동으로 가는 골목에서 990원짜리 질긴 냉면을 사먹거나, 뒷 길로 접어들지 않고 큰 길로 걷다가 성곡 미술관에도 가고, 역사박물관에도 들르고, 길 건너 정동길을 따라 덕수궁을 만나 다시 시청 앞에 이르는 그 길에 셀 수 없이 많은 발자국을 남겼다. 대한문(大安門/大漢門)을 이쪽저쪽으로 들었다놨다하던 시절도 있었다. 어디 대한문뿐인가, 독립문도 그렇게 자리를 잡았지.
술도 안마시고 해장국도 안마시던 내게도 청진동의 기억은 남아있다. 교보문고 뒤쪽으로 한참을 걸어가면 인사동까지 걸을 수 있다. 낙원동 악기상가까지 걷던 날도 있었다. 낙원동에 있는 극장에서 한번 입장에 두 가지를 상영하는 영화를 보던 가난한 우리는 피카디리극장이나 단성사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이제 생각하니 몸이 고된 것은 느끼지도 못했던 청춘이었네. 마음만 고달팠을 뿐이었지.
시청에서 곧바로 향하던 덕수궁 돌담길! 광화문쪽에서 돌아 들어가던 덕수궁 돌담길. 우리 부모님의 연애시절과도 인연이 있는 그 길을 어찌 잊으랴. ‘덕수궁 돌담길’을 걷기 위해 걸은 일은 꽤 오래되었다. 전시회를 관람하러 가기 위해 그 길을 걸을 뿐이다. 함께 미술 전시회에 다니던 친구를 만난지도 벌써 몇 년되었다. 나보다 몇 살 아래인데 눈에 문제가 생겨 책을 못 읽는다고 한다. 나도 그럴 날이 바로 올 것 같다. 갑자기 바빠진다. 읽을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더 읽어야겠다.
얼마전에 ‘정동1928 아트센터’ 행사에 갔었다. 그 건물에 이르는 길이야말로 덕수궁 돌담길을 그대로 따라 도는 길이었는데 산책은 하지 못했다. 애인도 옆에 있었고 귀찮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비도 내렸었는데… 아, 다시 꼬리를 물고 달라붙는 생각. 비! 나이 60넘었을 때도, 70 넘어서도 비오는 날이 싫지 않다. 운전은 힘들겠지만 폭우가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달리는 기분도 좋다. 영화 "남과 여"의 음악을 들으며 비오는 창밖을 내다보며 달리는 기분이 좋다. 왜일까. 내 인생이 비를 그리워할만큼 고갈되었단 말인가.
이래 주소에 광화문 은행나무에 관한 기사가 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04/2009090401260.html
수유리(수유동)
신접살림을 시작한 곳이다. 결혼 전 연애시절에 몇 번 갔던 화계사의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안가본지가 벌써 수십년이 지났다. 화계사는 설경으로 내게 다가온다. 1970년대는 겨울에 영하12도 정도는 예사였다. 그래도 눈 오는 날에는 집안에 들어앉아 있을 수 없었다. 지금은 버스편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굳이 인터넷 검색까지는 않고) 그 때는 중앙대학교와 화계사를 오가는 84번 버스가 있었다. 여름에 갔던 기억은 없고 겨울 생각만 난다. 내 앞에 도화지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화계사의 겨울 풍경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거기 눈밭위를 뛰노는 사슴 두 마리도 그려넣고. 참 아름다운 풍경이었고 추운 줄도 모르던 청춘이었다. 세상은 그만큼 아름답지 않았고 많이 추웠었지만…
연애시절에 갔었던 4.19 기념탑도 떠오른다.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 때 4.19 혁명이 일어났고 갈월동에 탱크가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땐 혁명이 무엇인지 몰랐었다.
주택들이 차경을 이용하여 자리잡은 낮으막한 산길, 결혼 후에 갔던 도봉산, 여러 기억들이 있다. 롱드레스, 홈드레스, 월남치마의 차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기 엄마인 나는 집에서 입는 긴 치마를 입고 아이를 업고 장을 보러 다녔다. 첫 딸이 수유리에서 태어난 후 우리는 수유리를 떠났다. 둘째는 논현동에서 낳았고, 셋째는 대치동에서 낳았다. 10년전쯤 수유동에 간 적이 있었는데 신혼집은 어디쯤인지 감도 안 잡힐 지경으로 변해있었다. 논현동 주택가는 그대로이고, 대치동 우리가 첫 입주했던 아파트는 44년의 세월을 그대로 버티고 있다.
아, 이 겨울이 가기전에 화계사를 한 번 가봐야겠다. 우리가 화계사에 가는 날 눈이 내리는 날이면 더욱 좋을텐데. 아니, 눈이 내리는 날에 가면 될 것을.
한강
그동안 다녀본 유럽의 여러 도시들에 있는 어떤 강보다 큰 강이다.
20대 때에는 한 겨울에 치마를 입고 한강다리를 걸어서 건너기도 했다. 스타킹이 지금처럼 따뜻하지도 않았는데, 모직코트는 지금의 다운패딩처럼 따뜻하지도 않았는데 걷는 것이 그냥 좋았었다. 친구와도 걸어서 건너고 오빠와도 걸어서 건넜다. 20대 나이를 넘어서는 한강다리를 걸어서 건넌 적이 없다. 전철이나 버스, 승용차를 타고 건널 때는 별 감흥이 없는데 지금도 기차를 타고 건널 때는 창밖으로 강을 내려다본다. 바다같지 않아서 물결의 큰 변동은 없지만 강물을 바라보는 마음은 볼 때마다 다르다. 생각을 맡긴 채 '물멍때리기'도 하고, 추억을 건져올리기도 하고, 앞날을 가늠해보기도 한다. 강물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도 흐르기 때문이다. 얼마나 숱한 생각들을 강물에 실려서 떠내려 보냈던가!
한강을 남북으로 건너다닌 것 뿐만 아니다. 이 긴 강을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강변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한강변을 따라 교회도 다니고 출퇴근도 하고 그러던 때는 설을 쇠고나면 바로 강변의 나무들 색깔이 달리 보였다. 실제로는 눈에 띠게 색깔이 변한 것이 아닌데 마음이 눈보다 먼저 보는 것이다. 나무는 분명히 점같은 초록색을 매달고 있었다. 봄은 기다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서울에 강이 없었다면(도시가 들어서는 첫째 조건이니 강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가시 거리에 안정감있게 병풍을 둘러준 산이 없었다면 나의 서울살이는 어땠을까? 참아내야 할 많은 것들을 잘 참고 견뎌낼 수 있게 해준 것은 반짝이는 강물이 주는 위로였고, 적당한 거리에서 시선을 끌어당기던 듬직한 산의 힘이었다.
한강이 없는 서울, 남산 인왕산 북한산 삼각산 도봉산이 없는 서울은 생각할 수도 없다. 대모산 쪽에는 여러 해 살았었고 구룡산에는 올라가봤지만, 청계산 우면산 관악산은 나의 이동동선에 그리 눈에 잘 띠지 않았었다. 수락산 불암산 소요산도 거리가 있었다. 봄철 강변북로를 따라 오가는 길에는 흐드러진 개나리에 마음까지 노랗게 물이 들었다. 여름철 올림픽 대로를 지날 때는 매미들이 살겠다고 어찌나 아우성을 치는지 매미소리가 자동차 소리를 뚫고 귓바퀴로 들어왔다. 강변은 능소화로 원추리로 치장을 하고 가을엔 소음방지벽이 담쟁이 이불을 덮은 채 계절을 알려주었다.
한강물 속에 회색빛 우울 덩어리를 통째로 던져넣기도 했고, 강물위에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띄우기도 했다. 강과 산, 서울의 한강과 서울의 여러 산들, 그것들 때문에 나는 서울을 사랑했다.
한강 소회 - 한강 조망권과 바람길 (10여년 전 고백)
이사한 후에 알게 되었는데, 그 동안 본의 아니게, 나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큰 죄를 지었구나 하고 느꼈다. 먼저 살던 집은 아침에 한강에 떠오르는 해를, 저녁이면 일몰을 볼 수 있는 전망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누구는 '한강 라운지'라고도 하고, 누구는 '스카이 라운지'라고도 하는 전망 좋은 집이었다. 창 밖으로 한강을 바라보며 자주 모네의 그림을 생각하곤 했었다.
지금 집은(10년전) 24층, 역시 창 밖이 탁 트인 집이다. 제법 푸른 나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눈을 멀리주면 건너편에 아파트가 병풍처럼 둘러쳐져있다. 그 아파트만 없다면 아마 먼데 산이 보이고 아주 멋질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작은 깨달음이 온다. 먼저 집, 그 아파트를 내려다보는 우리 윗동네 사람들은 아마도 '저 아파트만 없으면 우리도 한강을 볼 수 있을텐데...' 이런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한강 조망권 아파트에 살면서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일이다.
미술관에 갔을 때, 키 큰 사람들의 그룹이 앞에 무리지어 버티고 서있어서 그저 그들의 뒤통수만 보고 정작 그림은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던 경험은 종종 있었는데, 내가 살던 집이 다른 이의 시야를 가리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고 조망권의 혜택을 누리기만 하고 살았었다.
그것이 내 죄인가?
아파트를 그렇게 지은 것은 물론 내 죄는 아니다. 그곳에 살게 된 것도 죄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사는 집이 다른 사람의 시야를 가리고 있다는 미안한 마음 한번도 먹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죄인 것 같다. 전망 좋은 집을 짓는 것, 그 집에 사는 것은 누구나의 꿈일 것이다. 그러나 아주 조금 더 생각해야 한다. 한강변 아파트를 병풍처럼 강과 나란히 수평으로 짖지는 말았어야지! 비록 조망권을 가리더라도 최소한 강바람은 소통하게 해줬어야 한다. 강변을 따라 세로로 집을 지었더라면 그 건물들 사이로 강바람은 강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아다닐 수 있었을텐데...
이제 한강변은 모두 점령당했다. 나 또한 일찍부터 그 점령군에 가담하여 오랫동안 특권을 누려왔다. 그 일 때문에 방해받은 이름모를 이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잔뜩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