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이라하면 나는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옛 영화 “졸업”이 떠오른다. 사실은 영화의 어떤 장면 보다는 멜로디가 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폴 사이먼으로부터 시작된 생각은 사이먼 앤 가펑클로 이어지고, “미세스 로빈슨", "스카보로의 추억",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에 이어 “Bridge Over Troubled Water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까지 멜로디가 강물처럼 출렁인다.
며칠 전 손녀(친손)의 초등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작년에는 첫 손녀(외손)의 졸업식이 있었지만 코로나로 모든 것이 통제되던 시기여서 참석을 못했다. 학교에서 준 비밀번호로 줌zoom에 접속하여 졸업식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손주들 유치원 졸업식에도 빠지지 않고 모두 참석했었는데 첫 손녀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졸업식에는 사돈(손녀의 외가)댁에서도 참석하여 아이가 어렸을 때의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면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우리에겐 첫 손주가 외손녀이고 이번에 졸업한 손주는 첫 친손녀이다. 노인들이 모여서 손주들을 보며 하는 말은 항상 “벌써!”가 앞서곤 한다. 제 몸보다 더 큰 가방을 메고 어린이 집에 처음 가는 날이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에나 항상 “언제 저렇게 컸나!”가 모든 말의 시작이 되곤 한다.
올해 졸업한 손녀, 언제 이렇게 컸나! 벌써 중학교에 가는구나! 세월은 참 빠르지… 눈물도 쏟았고 웃음도 터졌던 세월이었다.
“아까 거봉(포도)을 일곱 개나 먹었어.” 이제 무슨 이야기 거리나 되나. 그런데 아기가 처음으로 포도를 일곱개 씩이나 먹은 것은 우리집에서는 큰 화제였었다.
“그러게요” 아니 어린 아이가 이런 대꾸를 하다니? 모든 말이 완전하지 않은 아이가 “그러게요” 같은 말로 대답을 할 때는 그저 놀랍기만 했었다.
손녀는 안사돈(손녀의 외할머니)이 보살피고 있다가 금요일에는 내가 데려왔다. 하루 자곤 토요일에 자기 집으로, 가끔은 토요일도 그냥 우리집에서 자고, 자기 집에서 일요일 저녁을 먹은 후엔 다시 외가로 갔다. 이렇게 세 집을 돌아다니던 아이는 가끔 “오늘은 어디서 자요?”라는 질문을 하곤 했다. 이제 생각하면 내가 참 잘못했다. 그냥 전적으로 맡아서 우리집에 계속 데리고 있어도 됐을 걸. 아이를 좀 더 안정적으로 키울 수 있었을텐데… 그땐 나도 어린(?) 할머니였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부모라는 이름의 첫 발짝을 떼는 것처럼 손녀가 태어나면서 할머니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초보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금요일에 아이를 외할머니로부터 인도받으면 그동안 내가 해준 게 아무것도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을 업어주는 것으로 대신하곤 했다. 할머니가 해줄 것이 참 많은데 그저 업어주는 것으로 애정표현을 하곤 했었다. 손녀는 나의 가방을 꼭 챙겼다. 내가 아이를 업으니 다른 사람이 내 가방을 대신 들어주면 손녀는 마구 떼를 쓰며 내 가방을 빼앗아 나의 손에 들려주었다. 아이를 업고 가방까지 들어야하는 나는 힘들다는 생각도 없이 내 가방을 챙기는 손녀가 기특하기만 했다.
손녀는 어린이집에 다닐 때부터 자신의 캐리어를 직접 꾸렸다. 세 집을 돌아다니며 자는 아이는 짐꾸리는 일을 참 빨리도 익힌 것이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하는 손녀는 지금도 주말에 우리집에 올 때면 캐리어를 끌고 온다. 동생 짐까지 다 자기 캐리어에 넣고 온다. 자고 가려고.
옛 말에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이 있다. 손녀는 든든한 맏딸이다. 저보다 일찍 출근하는 엄마를 대신해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동생을 깨우고 먹이고 학교에 데리고 간다. 저녁이면 동생 목욕도 시킨다. 지금은 동생도 스스로 목욕을 하지만 유치원 다닐 때는 언니가 목욕을 시켰다. 토요일에 우리집에서 자는 날이면 일요일아침에 동생 공부 시중까지 든다. ZOOM으로 논술 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손녀는 이제 중학생이 된다. 동생과 학교가 갈라지니 저 혼자 홀가분하게 등교길에 나서면 될 것이다. 스트레스 하나가 날아간다.
학교에서 어떤 사람이 되고싶냐는 질문이 있었단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늘 나오는 질문이다. “할머니 같은 사람이 되고싶다.”는 것이 손녀의 답이었단다. 며느리의 말로는 담임선생님이 좀 당황한 것 같단다. 아이들의 꿈이 얼마나 다채롭고 화려한가. 그런데 어떤 대단한 꿈도 아닌 고작 “할머니 같은 사람”이 되겠다니…
이 에피소드는 나를 옭아매는 멍에가 되었다. 어찌 살아야하는지, 그래서 손녀에게 어떤 모범을 보여야 하는지 깊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제 나는 허투루 살면 안 된다. 바르게 살아야한다!
몇 년 전 손녀의 꿈은 파티시에가 되는 것이었다.
“멋있는 생각이네. 그런데 할머니는 네가 만든 맛있는 디저트를 먹어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지.”
“할머니 걱정마세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거거든요. 그러면 그때 맛있는 거 만들어드릴게요.”
눈물나게 고마운 마음이다.
1년 전쯤 손녀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싶어하는 것 같았다. 웹툰 작가가 꿈인지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 나는 구체관절인형을 선물했다. 다양한 포즈를 그려보는데 좋을 것 같아서. 졸업 기념으로 나는 칠보반지를 선물했다. 돈으로 치면 몇 푼 안되지만 내가 처녀때부터 수십년 동안 가지고 있던 반지라 손녀에게 주고싶었다. 물론 학교에는 끼고 갈 수 없지만 주말 나들이할 때는 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졸업식장에서 뜻밖에 그동안 변한 손녀의 꿈을 알게되었다. 학생수가 적으니 졸업생 한 명 씩 졸업장수여를 다 했는데 졸업생이 등장할 때마다 스크린에 그 학생의 사진과 장래 희망을 적은 영상을 띄웠다. 손녀의 꿈은 “연극배우”였다. 처음 듣는 꿈이었다. 그대로도 좋고, 다시 변해도 좋다.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졸업식 후 식사자리에서 아들은 영상에서 보았던 졸업생들의 장래 희망을 화제 삼았다. 크리에이터, 스트리머, 웹툰 작가, 우주과학자, 축구선수 등등 자신이 학생 때 꾸던 꿈과는 달라졌다는 것이다. 당연히 다르겠지,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그런데 기초 학문에 대한 희망을 엿볼 수 없다고 걱정했다. 서비스업종이 많고 인문학적인 근본이 안보인다는 것이다. “아이구, 아들아, 너도 어른이 되었구나!”
오래 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께서는 “애들 시집가는 건 보고 죽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가끔 하셨었다. 시어머니께는 손녀가 9명이었는데 어느 손녀라고 지명을 하시진 않으셨다. 물론 우리들은 “몇 번 째 손녀요?”라고는 여쭙지 않았었다. 이 글을 쓰는 순간 이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어머니는 몇 번 째 손녀가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고싶으셨던 것일까?
“큰 손녀(외손녀 중2, 친손녀중1) 시집가는 건 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슬쩍 뒤를 잇는다.
글 쓰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나이 탓인지 무언가를 쓰려고 하면 옛날이 떠오르는 것이다. 앞날의 희망을 써야될텐데 자꾸만 회상하는 글만 나온다. 읽는 사람의 마음은 모른 채.
아닌 척해도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