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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Mar 27. 2023

신한평 <자모육아>

조선의 풍속화

엄마와 아이가 나누는 사랑의 주제는 모든 국경과 언어, 이념을 초월하여 땅의 모든 영혼에게 울려 퍼진다. 세상 모든 엄마와 아이의 모습이 가지가지 형태로 예술 작품으로 표현됐다. 미술에서도 ‘엄마와 아기’ ‘여성과 어린이’ 모티프는 젖먹이 아이를 품에 안은 엄마,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산책하는 엄마 등등 미술사를 통틀어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종교에서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 주제는 미술사에서 빠질 수 없는 큰 주제이다. 특히 라파엘Raffaello Sanzio da Urbino(1483-1520)은 여성과 어린이가 관련된 수많은 그림과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위한 여러 그림을 그렸다. 성모가 모유 수유하는 장면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동요했다. 모성을 다룬 주제에 감탄하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가하면 성모를 성적으로 모독했다고 거세게 반발했다. 여성의 가슴을 성적인 대상으로 여기고, 여성에게 노출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유수유는 엄마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자연의 선물이다.  생명의 원천이다. 수 세기 동안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고대 이집트부터 현대까지 계속되고 있다.

신화에서 우주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젖’을 기본 체액, 세상의 창조자, 생명을 주는 존재로 제시한다. 우리가 잘 아는 ‘은하수’도 ‘젖’을 근본으로 한 이야기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우주의 무수한 별들이 신들의 여왕인 헤라Hera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젖이 흩뿌려진 것이라고 한다. 

젖은 영유아의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유수유를 할 수 없는 상황일 때  상류층에서는 유모를 따로 두었고, 가난한 집에서는 동냥 젖을 얻어먹였다. 심청전의 심봉사가 심청이를 키울 때 젖동냥을 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있다. 조선시대 왕의 유모는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는 종1품 벼슬을 받았다. 일반 상류층 가정의 유모는 가난한 집 여성들이었다. 유모가 되면 자신의 아이가 먹을 젖이 부족하여 아이를 잃기도 했다. 

근대 이후 우유牛乳의 보급이 대중화되면서 유모나 젖동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우유의 보급은 여성들이 모유수유 육아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주었고, 모유 부족으로 배곯는 아기의 훌륭한 영양공급이 되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생활방식의 변화는 늘 있기 마련, 많은 출산 여성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모유 대신 우유 수유를 선호했고, 그런 흐름은 다시 모유수유를 주장하는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루쏘Jean-Jacques Rousseau(1712-1778)는 저서 『에밀Émile/ On Education』 (1762)에서 어머니의 “자연스러운 의무natural duties”로의 복귀만이 핵가족 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친밀감과 강한 감정적 유대를 키워 갈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모유수유의 담론을 이끌어냈다. 모유수유가 엄마와 아기 사이에 더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그것은 정서적 안정을 준다는 데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모유이든 우유이든 생명을 살리는 젖을 단순히 '먹이'로만 여기지 않은 개념이다. 수유를 '양육'의 관점에서 살펴보자는 것이다. 

루쏘의 『에밀』은 260년 전의 책이다. 지금과는 다른 환경 속에서 쓴 책이다. 사람이 사람을 낳고 먹이고 양육하는 근본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방법의 변화가 있을 뿐. 


조선시대 풍속화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을 찾아본다. 신한평의 <자모육아慈母育兒>이다. '수유'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육아"라는 제목을 붙인 것에 잠시 마음이 머문다.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68501&menuNo=200018 

신한평 <자모육아> 조선. 종이에 담채. 23.5x31cm. 간송미술관 소장. CC BY 공유마당.


가슴을 풀어헤치고 아기에게 젖을 물린 어머니와 딸의 앉은 자세를 보면 이들은 방 안에 있다. 그림에는 인물을 제외한 방안의 어떠한 배경도 없다. 눈길이 인물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구도이다. 인물 중심이면서도 인물의 배치를 중앙에 두지 않고 한 구석에 몰아놓았다. 이렇게 편향된 구도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낙관落款이다. 만약에 낙관이 저 위치에 없었다면 그림은 미완성의 느낌을 주지 않겠는가? 오른쪽 아래의 인물들, 왼쪽 위의 낙관은 서로 사선대각의 위치에서 텅 빈 방안의 구도를 착실히 잡아주는 그림이다. 

일재逸齋는 신한평의 호, 자신의 호를 쓰고 바로 아래에 “산기일석가山氣日夕佳”라고 새긴 백문방인을 찍었다. 호와 도장을 합한 크기를 보라. 그림 속 아이들의 키 보다 더 크다. 화가 자신을 밝히는 것이 그림의 모티프보다 더 큰 경우는 드물다. 그림 속 인물들은 자신의 가족이고 함께 자리하지 않은 자신(아버지 일재)도 방안에 있다는 존재의 상징처럼 낙관은 큼지막하다. 백문방인의 문구 “산기일석가山氣日夕佳”는 도연명陶淵明(365-427)의 시 <음주>의 한 구절로 산 기운은 해 저녁에 아름답다는 뜻이다. 이렇게 글귀를 새긴 도장을 사구인詞句印이라고 하는데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조선의 화원들이 즐겨 사용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이남일녀를 둔 신한평의 가족이다. 장남이 신윤복이고 그림 속에서는 엄마 옆에서 징징거리며 눈물을 짜내며 서있는 사내아이다. 아우 본 아이가 엄마 젖을 빼앗기고 엄마 곁에서 눈물을 훔치며 서있다. 엄마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자 아이는 신윤복의 누이다. 엄마 젖을 빼앗긴 경험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벌써 두 번째이다. 동생 둘이 생기는 동안 마음이 성숙해진 것일까, 체념한 것일까,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엄마 곁에 앉아있다. 젖을 빨고 있는 아기는 신윤복의 동생 신윤수申潤壽이다. 한쪽 손으로는 다른 젖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양쪽 젖 모두 아기 것이다. 잠시라도 형에게 한쪽을 만지게 하지 않는 본능적인 욕심이다.

이 시대에는 저고리 길이가 짧아서 옷고름을 풀지 않고도 수유를 할 수 있었다. 엄마의 옷고름은 그대로 매어있다. 오른팔로 아기의 엉덩이를 감싸안고 다른 손으로는 아기의 다리를 다독거린다. 시선을 아기의 눈에 맞춘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이다. 아버지 신한평, 가장 신한평은 사랑의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살붙이들을 관찰하고 화폭에 옮겼다. 그림 속에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위치에서 붓질을 하던 그는 자신도 그들과 함께 한다는 징표로 자신의 호를 큰 글자로 남겼다. <자모육아>는 지금까지 알려진 신한평의 작품중에 유일한 풍속화이다. 

모자상母子像, 모녀상母女像은 미술사에서 고대로부터 중요한 주제였지만 조선에서는 흔치 않았다. 특히 수유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은 찾기 어렵다. 김홍도金弘道(1745-1806)의 <점심/새참> 속에도 젖먹이는 여인이 등장하지만 이 그림처럼 단독으로 주제가 된 것은 아니다. 여럿 속에 한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여인들의 일상이 그려진 것도 풍속화가 활발해지면서부터이다. <자모육아>는 모성애가 듬뿍 녹아있는 풍속화이다.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treasure/view?relicId=549  

김홍도 <점심> 단원풍속도첩. 조선. 종이에 채색. 28x23.9cm.  국립중앙박물관.

https://www.rct.uk/sites/default/files/collection-online/d/1/255812-1661359029.jpg  

장바티스트 그뢰즈Jean-Baptiste Greuze <쉿, 조용! Silence!1759. 캔버스에 유채. 62.2 x 50.5 cm . 

영국왕실 콜렉션. 버킹엄궁전, 런던, 영국.


젊은 엄마가 고만고만한 아이 셋을 키우려니 얼마나 힘들까? 젖을 빨던 아기는 잠이 들었는데 큰 아이가 입에 나팔을 물고 있다. 첫째 아이인가 본데 역시 어린 아기다. 동생이 없었다면 엄마 품에 안겨있을 아기다. 동생에게 엄마 품을 빼앗겨 심술이 나서 나팔이라도 크게 불면 잠든 아기는 깜짝 놀라 깰 것이다. 엄마 마음은 조마조마하다. “쉿, 조용히 해!” 소리를 낮추어 부탁한다. 오른쪽 의자에는 둘째 아기가 잠들어 있다. 의자 뒤에 걸린 작은 북은 이미 찢겨져 있다. 동생 둘이 잠들었으니 큰 아이는 이제 엄마랑 놀 기회가 왔다. 어렵게 얻은 기회인데 막내가 깨기라도 하면 엄마는 다시 막내를 달래는데 집중할 것이다. 큰 아이는 그 상황을 이미 알고 있다. 입에 댄 나팔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불지는 않는다. 엄마는 야속하게도 잠든 막내를 자리에 눕히지 않고 품에 안은 채 조용히 하라고만 한다. 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는 아름답고, 가슴을 드러낸 것에 부끄러운 기색도 없다. 다산이 축복이던 시절에 아이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가슴을 풀어헤치는 것이 부끄러울 것은 없다. 오히려 자랑이기도 한 시대였다. 

한편으론 그뢰즈의 다른 여인 그림에서 가슴을 드러내 관능미를 표현한 것이 많다.  젖먹이를 안고 있지 않은 여인들도 가슴을 풀어헤친 모습으로 그린다. 모성애를 보여주는 어머니의 순수함 또는 관능적인 하인은 그뢰즈 인물의 다중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그림이 파리 살롱에서 전시될 때(1759) 제목은 <휴식을 나타내는 그림 Un tableau représentant le repos.>이었다. 관람한 사람들은 그림의 내용에 따라 <휴식 Le Repos>, <침묵 Le Silence>, 이런 제목들을 제안했다. <침묵! Silence!>이라는 제목은 1765년 로랑 카Laurent Cars(1699-1771)가  판화를 만들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영어로 정한 것이다. 이 그림은 그뢰즈 예술의 매우 특징적인 예이다. 비록 비평가들로부터 압도적인 찬사를 받지는 못했지만 1787년 보드레이유Vaudreuil 카탈로그에는 “작가에게 가장 큰 영예를 안겨줬다”고 씌여있었다. 그뢰즈의 그림에 묘사된 주제는 종종 현대 문학에 묘사된 모성과 자녀 양육에 대한 18세기 프랑스 환경을 반영한다.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는 <침묵 또는 좋은 어머니 Le Silence ou La Bonne Mère>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https://blanton.emuseum.com/objects/13221/le-silence-or-ne-leveille-pas-after-jeanbaptiste-greuze?ctx=9620256d9453bfdfb6d0593a472768291df88246&idx=14# 

로랑 카 Laurent Cars <조용! 그뢰즈 이후Le Silence, after Jean-Baptiste Greuze> 1721. 에칭 판화. 50.7 × 36.2 cm. 레오 스타인버그 콜렉션/블렌톤 미술관, 텍사스 대학, 오스틴, 미국.

판화를 통해 그뢰즈의 작품은 상당한 명성을 얻었고, 그의 영향력은 19세기 영국 예술에서 볼 수 있다. <침묵Silence>에 대한 준비 도면이 많이 있다. 


https://artvee.com/dl/a-boy-asleep-on-a-table#00 

장바티스트 그뢰즈 Jean-Baptiste Greuze <잠들어있는 소년 Child sleeping in an armchair.>캔버스에 유채. <침묵! Silence!>의 오른쪽 하단에 있는 어린이를 위한 예비 연구이다.


작가 알기

장바티스트 그뢰즈(Jean-Baptiste Greuze 1725.08.21 프랑스 투르누스에서 출생, 1805.03.21 프랑스 파리 사망)는 프랑스 로코코시대 화가이다. 

그는 윤리적 교육으로 예술의 기능을 강조했다. 예술은 사람들에게 나쁜 행동의 비극적 결과를 보여주고 양심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1745-1750년에 리옹에서 초상화가 샤를 그랑동Charles Grandon(1691-1762)에게 그림을 배운 후 파리로 갔다.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에서 드로잉 수업을 들었고, 로코코 화가 샤를 나투아르Charles-Joseph Natoire(1700-1777)에게 배웠다. 1755년 중하류층과 중산층 사이의 사회적 가족적 문제를 다루는 작품을 발표했다. <가족에게 성경을 읽어주는 아버지>가 이때 발표한 작품이다. 1755년 후반, 당시 그랜드 투어를 경험한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뢰즈도 자신의 견문을 넓힐 목적으로 이탈리아 여행길에 올랐다. 유명한 고고학자이자 대평의회 의원인 아베 구즈노Abbé Louis Gougenot(1719-1767)와 함께 나폴리와 로마를 돌며 일년을 보냈다. 

1756년에 왕실 건축물 총리를 지낸 마리니 후작(Marquis de Marigny)의 주선으로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에 머물렀다. 그는 그랜드 투어에서 이탈리아의 유적과 풍경을 그리는 대신 17세기 볼로냐 학파의 작품에 더 관심을 보였다. <기타 연주자>를 이 시기에 그렸다. 로마에 있는 동안 그는 프랑스에서 발전시킨 스타일로 주제를 도덕화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1757년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이탈리아 의상을 입은 네 개의 그림을 살롱에서 전시했다. <나태> <깨어진 달걀> <나폴리식 제스처> <파울러>, 이 네 개의 그림은 교훈적인 함의와 현대의 관습에 대한 도덕화 논평을 제시한 그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그림들은 프랑스 로코코 전통에 속하는 에로티시즘과 관능을 강조한다. 

많은 동료 장르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뢰즈는 개인 소장품의 원본 작품뿐만 아니라 판화를 통해 장르 이미지에 접근할 수 있었던 17세기 네덜란드 선조들의 영향을 받았다. 

장르 그림(Genre-painting)으로 성공했지만 그는 꾸준히 프랑스 아카데미 예술의 최상위 등급인 역사화가로 인정받고 싶었다. 1769년 역사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를 아카데미에 제출했다. 푸생Nicolas Poussin(1594-1665)의 영향을 받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그림이었으나 아카데미는 역사화가로서의 그뢰즈를 거부하고 장르회화 범주 안에서만 그를 인정했다. 화가 난 그는 1800년까지 다시는 살롱에 전시하지 않았으나 그뢰즈 최후의 작품은 현재 릴 팔레 드 보자르(Palais des Beaux-Arts de Lille)에 걸려있는 <프시케가 왕관을 씌운 큐피드>로 역사화이다. 아카데미에서 거부당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는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그뢰즈 작업의 특징은 과장된 파토스(pathos 청중의 감성에 호소하는)와 감수성, 자연의 이상화, 세련미의 조합이다. 도덕적 내러티브가 있는 장르 그림과 뛰어난 초상화로 사랑받던 그의 로코코 양식은 신고전주의 회화로 대체되었다. 바로크와 로코코는 귀족과 부도덕한 관계 때문에 폐기되었다.

역사화가로서의 인정을 그토록 갈망하던 그뢰즈는 1805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낯선 말 풀이

낙관落款            - 글씨나 그림 따위에 작가가 자신의 이름이나 호(號)를 쓰고 도장을 찍는 일. 또는 그 도장이나 그 도장이 찍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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