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풍속화
신문은 그날의 뉴스 뿐 아니라 연예, 생활, 스포츠, 정치, 사회, 문화 등등 각 지면마다 전문 기사들을 싣는다. 옛 동아일보 기사를 불러온다. 1933년 11월 15일자 신문 6면을 보면 어떻게 아기를 업는지 사진을 곁들여 친절한 안내를 한다. “어머니의 주의할 일, 업을 띄는 넓을수록 좋습니다, 어린아이 업는 법에 대하여 이 몇 가지는 알아두시요[寫] “ 이런 타이틀의 기사이다. “띄”는 “띠”를 뜻한다.
아이를 업는 것은 안는 것보다 일하기 편하고 걷기도 편하다. 겨울에는 아기의 배를 따뜻하게 하는 점도 좋다. 중국과 일본의 아이 업는 방법을 예로 들었는데 중국에서는 네 귀에 끈을 단 보(포대기)를 두르고 끈 2개는 어깨에, 2개는 허리에 매어 업는다. 일본에서는 가는 끈으로 어깨와 넓적 다리를 매어 업는데 아이에게 좋지 않은 것 같다는 내용이다. 그러니 넓은 끈을 펴서 허리와 볼기를 좀 편하도록 업어주라는 기사이다.
요즘은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거나, 아기띠를 이용하여 앞으로 안고 다닌다. 처네를 둘러 업은 모습은 거리에서 볼 수 없다. 그러나 아기는 앞으로 안는 것보다 등에 업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업으면 아기의 시선이 높아져 눈 앞에 펼쳐지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호기심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시각적인 자극은 두뇌 발달에도 좋은 영향을 준다. 유모차에서는 밀착된 엄마와 아기의 체온을 느낄 수 없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편리한 유모차를 사용하던 서양에서는 아기의 정서적인 안정을 위해 포대기로 업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조선시대에는 엄마들이 아기를 업고 집안 일을 했다. 외출을 하려면 아기를 등에 업고 거리로 나섰다. 아기 업은 여인을 옛 풍속화에서 만나본다. 뜻밖에 젖가슴이 노출된 여인과 맞닥뜨려 당황스럽다. 저고리가 짧아도 너무 짧다.
저고리의 길이는 시대에 따라 짧아지기도 하고 길어지기도 했다. 물론 저고리의 종류에 따라 길이가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다. 기록에 있는 저고리의 길이를 살펴본다.
광해군비 유씨柳氏(1576-1623)의 당의는 장저고리로 등 길이가 76Cm이다(석주선 기념박물관 소장). 평창 상원사上院寺 목조문수보살좌상 복장유물腹藏遺物(현종2년 1661) 회장저고리는 단저고리로 등 길이가 55Cm이다. 18세기에 접어들면 저고리 길이는 짧아진다. 하남시 춘궁동 의원군 이혁李爀(1664-1722) 묘에서 출토된 안동권씨의 저고리가 44Cm이다(경기도 박물관 소장). 인제 백담사 목조아미타불(1748) 복장 노랑 삼회장 저고리는 영조 때의 것으로 길이가 37.5Cm이다(백담사 소장).
18세기 저고리는 길이가 짧고 폭이 좁으며 소매도 좁다. 옷고름은 좁고 짧은 형태로 신윤복의 풍속도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모습이다. 19세기에는 저고리 길이가 더 짧아진다. 사도세자의 맏딸(정조의 누이) 청연군주(1754-1821) 묘에서 출토된 저고리 뒷길이는 23.5Cm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세기 말 이연응(1818-1879) 묘 출토 여자 저고리는 길이 21.5Cm로 가슴 선 위로 올라갔고, 가슴, 겨드랑이 살을 가릴 수 없어 부인들은 가리개용 허리띠를 사용해야 했다. 조선시대는 복식금제 服飾禁制가 있어 의복으로 신분을 구분하였다. 양인 부녀와 양반 부녀의 옷차림이 달랐다. 짧은 저고리에 가슴을 가리기 위해 긴 허리띠를 댄 복식은 원래 기녀의 것이었으나 곧 양반가 여인들에게도 전파됐다. 하층계급은 거들치마를 입었는데 치맛자락을 치켜 여미어 속바지가 바깥에 드러나게 입었다. 신윤복 그림 속 기녀들의 차림이 연상된다.
옛 기록을 살펴본다.
『청장관전서』 30권 「사소절」6 < 부의婦儀, 복식>
지금 세상의 부녀들의 옷은, 저고리는 너무 짧고 좁으며, 치마는 너무 길고 넓으니, 의복이 요사스럽다.
옷깃을 좁게 깎은 적삼이나 폭을 팽팽하게 붙인 치마는 의복이 요사스럽다. 대저 복장에 있어서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창기(娼妓)들의 아양떠는 자태에서 생긴 것인데, 세속 남자들은 그 자태에 매혹되어 그 요사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처첩(妻妾)에게 권하여 그것을 본받게 함으로써 서로 전하여 익히게 한다.
아, 시례(詩禮)가 닦이지 않아 규중 부인이 기생의 복장을 하도다! 모든 부인들은 그것을 빨리 고쳐야 한다. 1
젖가슴을 드러낸 여인의 모습은 화가의 연출이 아니라 실제 모습이었다. 젖가슴 위로 올라갔던 짧은 저고리 길이는 1920년대 후반에는 25-27Cm 정도로 길어졌다. 그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한복을 짧은 저고리에 항아리같이 부푼 치마로 입은 조선 여인들의 그림을 보면 단순히 '기생'이려니 한다. 기록처럼 한 때는 일반 가정의 부인들도 그런 차림새를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1144
신윤복 <아기업은 여인> 조선. 종이에 담채. 23.3x24.8cm. ⓒ국립중앙박물관.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16651&menuNo=200018
신윤복 <아기업은 여인> 조선. 종이에 담채. 23.3x24.8cm. CCBY 공유마당
이 그림은 1910년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이 일본인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로부터 일괄 구입한 화첩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김두량, 김득신, 김후신, 이인문, 변상벽, 강세황 등의 작품이 화첩에 수록되어 있었다. 그 중에 신윤복 그림 <투계>와 <아기업은 여인>이 포함되었다. 이왕가박물관은 해방 후 덕수궁미술관으로 이어오다가 국립박물관(1969, 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통합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번호에 “덕수”가 앞에 붙은 작품들이 바로 덕수궁미술관에서 이관된 작품들이다. <아기업은 여인>은 덕수 2291-13이다.
신윤복 그림 속 여인들이 대개 그렇듯 훤칠한 키에 부풀린 치마, 풍성한 가체를 얹은 모습이 기녀처럼 보인다. 첫 눈에 젖꼭지까지 노출된 여인의 가슴이 들어와 당황하게 된다. 등에 업힌 아이가 없었다면 이 그림은 에로틱한 그림으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관능적이긴 하나 젖먹이 아이를 업고 있으니 모성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한 때 공공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모유수유하는 엄마들에 대한 여러 논란이 있었다. 숭고한 모성이라거나 불필요한 노출이라거나, 각자의 생각은 다 달랐다. <아기업은 여인>을 대하는 관람자의 시각은 어떠한지, 신윤복이 표현하는 여인들의 관능미가 느껴지는가?
가슴을 내놓는 것은 천한 노비들의 옷차림, 아들낳은 여자들의 특권, 모유를 상하지 않게하려는 방법이라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윗글에 적었듯이 실제로 저고리의 길이가 짧았기 때문일 것이다. 수시로 젖을 먹이는 아기 엄마가 가리개로 가슴을 싸매지 않았을 뿐이다. 그림 속 여인의 모습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전쟁 시절의 사진을 보면 같은 모습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림 오른쪽에는 “蕙園申可權字德如 혜원신가권자덕여”라는 글이 적혀 있다. 신윤복의 본명이 신가권申可權, 자는 덕여德如임이 밝혀졌다. 신윤복의 <미인도>(간송미술관 소장)에도 ‘신가권’이라는 도장이 찍혀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호 “蕙園”, 바로 밑에 ″臥看雲″이라 새긴 백문방인을 찍었다. ″臥看雲와간운”은 <투계>에도 찍혀있다. 당나라 왕유王維(699-759)의 시 <종남별업終南別業>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원래 시에는 “坐看雲起時좌간운기시; 앉아 구름이 이는 때는 보기도 한다”라 써 있지만 신윤복은 “앉아서(坐)” 대신 “누워서(臥)” 떠가는 구름을 본다는 와유臥遊의 뜻으로 바꿨다.
그림엔 아기업은 여인보다 더 넓은 여백을 차지한 긴 글이 쓰여있다. 부설거사扶辥居士가 쓴 글인데 그 인물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 <아기업은 여인>과 함께 구매한 <투계>에도 부설거사의 글이 있지만 역시 그가 누군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글은 신윤복의 출중한 그림 솜씨를 당대唐代의 화가 주방周昉의 그림에 빗대어 썼다.
“坡翁見周昉畫背面欠伸內人, 心醉歸來, 賦續麗人行. 恨不今見此四首.
동파(蘇東坡) 노인이 주방周昉의 그림 ‘얼굴을 돌리고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는 궁녀의 그림’을 보고 심취하여 되돌아 와서는 ‘속여인행續麗人行’을 지었으나 지금 이 네 수를 보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는데
嫣然之態, 復作麗人行如昉畵也.
아름다운 자태가 다시 제작되니 주방의 ‘여인행’과 같네.
況又背上小兒, 昉 畫之所無. 而風致幽婉, 有筆外神韻.
또한 아이가 등에 붙은 모습은 주방의 그림에도 없으니 풍취가 깊고 그윽한 붓놀림이 있어 밖으로 기품이 드러나네.
未知昉畵較此, 復如何. 扶辥居士觀.
주방의 그림과 이것을 다시 비교하면 어떨지 아직 모르겠다. 부설거사가 보았다.”
주방周昉은 화려한 색채로 귀족유락貴族遊樂 장면과 미인도가 뛰어난 화가이다. 신윤복의 그림을 주방에 빗대어 평한 부설거사의 의도를 알 것 같다. 그림 속 인물 위쪽 부분이 검게 변색된 것은 백색안료인 연분(납가루)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검어진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위작이라는 설도 있다. 연분은 19세기 후반부터 많이 활용되었다. 신윤복의 그림은 기녀들과 풍류를 즐기는 사대부나 한량들이 많다. 유교주의 사회에서 품위를 잃고 선비정신에 맞지않는 행태를 보이는 자들에 대한 항의였다는 평이다. 또한 계급을 따지지 않고 발현되는 인간주의의 표방이라는 평가도 있다.
조선이 개방된 이후로 한양 풍경이나 조선인들의 인물사진이 서양에 많이 소개되었다. 한국전쟁 때 참전한 외국 군인들이 찍은 사진도 서양에 많이 퍼져있다. 100여년 전, 70여년 전 사진들은 이국의 모습처럼 낯설기도하고, 기억속에 남아있는 흐릿한 흔적이기도 하다. 신윤복의 <아기업은 여인>처럼 젖가슴이 노출된 여성들의 사진도 제법 많다. 사진은 신윤복의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다. 거리의 스냅숏이 아니라 몇몇을 모델로 세워둔 채 찍은 사진이다. 여인들을 모델로 카메라를 들이댄 그들은 왜 젖가슴이 노출된 조선 여인들을, 한국여인들을 피사체로 정했을까? 신기해서? 전혀 아름답지도 않고, 모성애를 느낄 수도 없는 모습이다. 사진속 여인들이 나의 할머니, 증조 할머니, 고조 할머니라는 생각에 이르면 마음이 언짢다.
숨겨진 오지 탐험중 찍힌 원주민들의 벗은 모습을 미개하다고 여기는 현대인들이 있다면 반성할 일이다. 문화적인 이해없이 구경거리로만 여긴다면 반성해야 한다.
1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7A_0300_010_0030_2000_006_X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