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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ug 16. 2020

초상(肖像) 박 춘자 2

2화 / 수채화 1

수채화1


방금 웨이터가 가져다 놓은 카푸치노 잔을 들여다보며 여자는 찻숟가락 든 손을 공중에서 잠시 살짝 아래로 떨구었다 다시 약간 위로 올렸다 그런 자세를 두세 번 반복한다.  여자는 받침 접시 위에 찻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왼손으로 찻잔을 들어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신다. 여자는 남자 친구에게 말했었다.  “다방에서 차를 마실 땐 왼손으로 마셔요. 많은 오른손 잡이들이 마시는 반대 편으로” 다시 찻숟가락을 든다. 까마득한 기억 속에서 옛날 남자 친구가 썼던 시의 한 구절을 생각해낸다.   ‘티스픈으로 인생을 저울질한다’는 구절이 떠오른다. 이번엔 머뭇거리지않고 곧장 설탕을 한 숟가락 푼다.  카푸치노에 설탕을 넣고 젓는다. 이제 여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카푸치노를 달게 마신다. 찻잔 밖으로 약간의 커피가 넘쳐흐른다.


언제나, 카푸치노를 마실 때마다 여자는 잠시 고민에 빠진다. 짤름거리는 찻잔에 설탕을 넣어도 될지 안 될지를 심각하게 생각한다. 설탕을 넣어서 마시고 싶은데 커피가 넘쳐서 받침 접시가 더럽혀질까봐 걱정이다. 넘치지 않도록 설탕 넣는 일을 조심스럽게 성공한다 해도 그 다음에 젓는 일은 또 어떻게 해야할 지 여자는 아직도 잘 모른다. 가슴 속에 넘실대는 강물을 어떻게 넘치지 않게 할 지 모르는 것처럼. 그 여자의 나라에 카푸치노가 흔하지 않던 때부터 여자는 이국에서 카푸치노를 마셔왔고, 항상 처음에 겪었던 그 고민, 설탕을 넣을까 말까를 아직도 하고있다.


실내는 때 아닌 겨울비를 피해 몰려 들어온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여자는 비가 쏟아지기 전부터 카페에 앉아 있었다. ‘마주 보면 가까운 그대, 돌아서면 지구 한 바퀴 사이’ 여자는 다문 입 속에서 시를 읊는다.  ‘돌아서면 지구 한 바퀴 사이’ 여자는지구 한 바퀴의 길이를 가늠한다. 한반도의 서쪽에서 황해를 건너 중국대륙을 가로지르고, 뮌스크, 프랑크푸르트, 암스테르담…    서쪽으로 서쪽으로 징검징검 몇몇 도시들을 짚어간다. 서부 유럽을 훑어가던 중 여자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거리의 출발이 왜 한반도에서부터였을까,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장소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모든 출발은 항상 태생지로부터,라고 여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종점은 다시 태생지가 되리라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여자는 출발지로부터 여기까지 혼자 왔다.


이제 출발지로 다시 돌아가는 길은 남자와 함께이고 싶다는 생각이 유럽 대륙의 지형을 훑고 있는 여자의 마음 속에서 뾰쪽히 고개를 든다. 여자를 곁에 태우고 자동차를 몰아 지도에 그려진 유럽의 테두리를 돌아보는 꿈은 그 여자의 남자에게도 있다.  둘이서 공유한 꿈이었다.


포르투칼의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유럽의 서부 해안을 따라 스페인으로 내려간다. 길가에 오렌지 나무가 늘어선 세빌리아를 지나, 모로코행 승선객으로 붐비는 알헤시라스를 지나, 그라나다에 가서 알함브라 궁전을 봐야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여자의 가슴에 단발머리 시절에 즐겨 듣던 타레가의 <알함브라궁전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몸체보다 훨씬 더 큰 축전지를 짊어진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기타 연주의 멜로디를 여자는 허밍으로 흥얼거린다. 뚱뚱한 트랜지스터의 단음 방송을 듣던 기억도 그 남자와 공유한 추억이다.

다시 출발하여 발렌시아로, 바로셀로나로 스페인의 남부에서 동쪽으로 자동차를 몰아간다. 여자의 마음이 계속 동쪽으로 향한다. 프랑스 남부의 넉넉한 햇빛 속을 뚫고 니스를 거쳐 이태리의 제노아에 닿는다. 그 나라의 땅 모양인 장화의 앞정갱이 부분을 쭈욱 훑어내려가면 낭만의 항구 나폴리가 나온다. 장화의 뒤축을 돌아 북상하면 물의 도시 베니스에 닿고, 한번도 가보지 못한 크로아티아의 해변을 따라 다시 남으로 남으로 내려간다. 끝까지 내려가면 다시 동쪽으로 전진하리라. 여자가 그렇게 동으로 동으로 마음을 달리고 있는데, 방금 들어와 앞 자리에 합석한 사람이 여자에게 말을 걸어왔다.


 “유 머스트 비 어 쟈패니즈.(일본사람이군요.)”  

 “노우, 아임 어 코리언.(아니요, 나는 한국사람입니다.)”   


외국으로 다니면서 벌써 몇번 째인지 셀 수도 없이 많이 되풀이해온 문답이다. 앞 사람은 호들갑을 떤다. 미안합니다, 서울, 코리아, 감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그것으로 그 사람의 한국말은 바닥이 났다. 여자는 잠시 생각해본다. 서울, 코리아, 그것도 한국말인지 아닌지를. 앞 사람은 세 마디만 한국말을 한 것이라고 여자는 결론을 내린다.


말이 끊어지고 여자는 갑자기 어깨를 움찔한다.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여자의 어깨 위로 겨울 비가 후두둑후두둑 떨어진다. 여자는두 손을 교차하여 양 어깨를 감싸며 손바닥으로 어깨를 쓸어내린다. 손은 젖지 않는다. 여자는 카페 안에 앉아 있다. 그래도 비는 자꾸만 여자의 어깨를 두드린다. 여자는 느낀다. 벌써 가슴까지 질척거리고 그 속엔 비가 흥건히 고여 있음을. 남은 카푸치노를 왼손으로 마신다. 다 마신 카푸치노 잔은 지저분하다. 거품을 일궈 짤름짤름 넘치도록 풍요롭게 담아낸 찻잔의 끝 모습이 여자의 눈에 거슬린다. 여자는 다 마신 찻잔이 깔끔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카푸치노 잔은 언제나 지저분하다. 아름다운 삶이 때로는 눈물로 얼룩지듯이.  

여자는 일어선다. 남들이 다 의아해 하는 이름, 톡톡톡을 목욕시켰을 때 그 놈이 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는 몸짓처럼 여자는 다 털어버리는 몸짓을 해본다. 갑자기 톡톡톡이 보고싶다.  다시 몸을 털어낸다. 후루룩 몸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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