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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ug 16. 2020

초상(肖像) 박 춘자 3

3화 / 유화 1

유화 1


오전 강의가 끝난 문화센터 앞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수강생들로 북적거린다. 장을 보러 지하 식품점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들이 통로에 줄을 서 있다. 매장을 한바퀴 둘러보고 갈 사람들은 주로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에스컬레이터에도 한꺼번에 나온 수강생들이 빈 칸 없이 서 있다. 유아실에 맡겨 놓은 아이를 찾으러 가는 젊은 엄마들이 종종걸음을 친다. 다른 반에서 마치고 나온 친구를 찾아 분주하게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오전 강의가 끝난 직후엔 백화점 식당가의 자리는 삼삼오오 모인 문화센터 회원들로 만원이다.

문화센터의 다른 반들은 대개 12시 반에 끝나지만 지선이 속한 수채화반은 그림 그리던 뒷처리를 하고 나면 항상 1시나 되어야 끝이 난다. 그들은 가끔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곤 한다.


“저기요! 시간 어떠세요?  우리 점심 먹으러 가는데 같이 가실래요?”  

수채화 반에서 제일 젊은 미연이었다.

“그럴까...”  

지선은 미연을 따라 나섰다.


달리는 차 속에서 다섯 여자들은서로 즐겁게 재잘거렸다.

“우리 그이는 홍콩 출장 중이에요. 우리앤 학원에서 독서실로 곧장 가니까 저녁은 나 혼자 그럭저럭 때우면 돼요.”  

“그럼 애는 저녁 어떻게 하구?  밥 싸들고 독서실로 쫓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

“수빈이네 사진반에서 전시회를 한대요. 지난봄 철쭉 폈을 때 찍은 내 사진을 낸다지 뭐에요. 사진반 선생 말이 그 사진이 전시용으로 아주 좋다고했대요.”  

“철쭉이 좋은 거야, 모델이좋은 거야?”  

“당연히 모델이지요, 형님.”  

“그런데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지?”  

“지난 번에 한 번 갔었던 쉔부룬있죠?  거기로 가려고요. 괜찮죠?”

“고양까지?  좀 멀다. 그리고 점심 시간도 좀 늦었잖아?”  

“낮 시간이라 차가 잘 빠져요. 시장하세요들?”  

“아니 괜찮아요. 그냥 거기로 가지 뭐.”  

“그러자, 그럼 쉔부룬으로 그냥 가자구.”  


지선은 오랜만에 화이트 소스에 버무린 해물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저기요, 이번에 완성한 그 정물 있잖아요, 레이스 테이블 보를 어쩜 그렇게 섬세하게 잘 그리셨어요, 유화도 아닌 수채화로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미연씨, 이젠 그만 저기요,로 불러요. 그냥 박지선씨, 하고 부르면 돼요.”  

“그렇게 잘 안 되더라구요. 한참 형님이신데. 거기다 또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질색을 하시니까 부르기가 어려워요.”  

“괜찮아요. 이제 내 이름으로 불러요.”  


리퀴드 마스크를 가는 펜으로 찍어서 레이스를 그리고 원목의 테이블 색깔을 맘 놓고 그 위로 편하게 칠한 그림이었다.  지선은 리퀴드 마스크를 쓰는 일이 정직하지 못한 것 같아서 붓질은 편하지만 마음은 편치 못하다. 결코 그것이 사기나 눈속임이나 그런 것이 아니고 그림의 한 기법이라고 다들 편안해하지만 지선은 별스럽게 마음이 개운치 않다.


삼개월 단위로 등록한 이번 학기는 두 주일, 네 번의 렛슨이 남았다. 지선이 속한 수채화 중급반에 20명의 여자들이 등록을 했지만 교대라도 하듯이 늘 몇 사람씩 결석을 하여 보통 열 댓명 정도가 모여 그림을 그린다.  대학에서 미술 관련 학과를 졸업한 사람도 몇 명 끼어 있다.

그리기 시작하면 완성까지 예사로 너댓 시간이 걸리는 수채화의 특성상, 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서로 한담도 나누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도 조바심 내지 않을 중년들이 그들 그룹이다. 3개월 단위의 기초1반, 2반의과정을 모두 마쳤거나, 기초반에서 수강하지 않아도 될만한 사람들이 중급반에 들어왔다.     

막내인 이미연이 38세, 연장자인 김정자가 55세, 자기 스스로에게 선뜻 투자할 수 있는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중년들이다.  누가 보든 중급 수준을 훨씬 넘은 김정자는 자신의 그림이 남보다 한결 나은 것에 우쭐대는 맛에 중급반을 떠나지 못한다. 이미연은 제일 막내로서 그림을 잘 그리든 못 그리든 스트레스 받을 일 없이 편하다. 그림 그리는 재주가 나이에 따른 것이 아님을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이영숙은 성격이 야무지고 욕심이 많아 기본적인 그림일지라도 그 완성도가 높다. 절대로 남보다 먼저 붓을 놓는 일이 없다.  강성주는 손보다는 입을 더 열심히 움직이며 그린다. 그의 미술사 실력은 지도 강사보다 더 뛰어나고, 감정을 배제한 그의 그림은 철저히 이론에 따라 구성된다. 한영애는 기초반을 거치지 않고 중급반에 처음 등록했다. 오랫동안 집에서 혼자 그림을 그려왔다.  자신의 실력보다 높은 반에 적을 두고 보조를 맞추며 따라가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화구에 대한 정보를 꿰뚫고 있는 정순실은 반원들이 물감을 사러갈 때나 종이를 사러갈 때 자신의 차에 태우고 다니는 재미로 문화센터에 나오는 듯했다.

지선이 문화센터의 수채화반에 등록한 것은 고등학교 때 붓을 놓은 이후로 30여 년만의 일이다.  기초 1반에서부터 결석 한번 않고 착실히 그림을 배웠다. 남편의 출장길에 동행하는 것도 포기하고 꼬박꼬박 출석하여 열심히 그림을그렸다. 중급반을 끝내면 6개월 과정의 연구반에 들어갈 계획이다.


쉔부룬에서 지선을 태우고 함께온 순실이 베란다 쪽으로 다가간다. 동승한 회원 세 명을 일일이 집에까지 태워다 주고 지선의 집에 들어오니 벌써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아파트의 커다란 통유리창 밖으로 도시의 밤이 펼쳐지고 있다. 어둠이 서서히 내리는가 했더니, 마치 두루말이 그림을 주욱 펼치듯이 이쪽 편에서부터 저쪽 편으로 삽시간에 밤이 깔렸다. 거실에 세워둔 클라식 기타가 창 밖 어둠 속에 하나 더 서 있다.  진식이 입대한 지 거의 일 년이 다 돼가는데 그의 기타는 아직도 거실에 있다.  방금 전에 주인의 손길이 닿았던 것처럼.


“아, 홍차 색깔이 정말 예쁘다. 역시 홍차는 유리 찻잔으로 마셔야 제맛이야.”  

“레몬 있는데 한쪽 넣을래요?”

“아니요, 레몬을 넣으면 떫은 맛이 나서 저는 안 좋아해요.”  

순실은 찻잔을 들고 벽에 걸린 지선의 그림 앞으로 갔다.

“연구반에 등록하셨어요?”  

“아직요. 이번 목요일에 가서 해야지. 순실씨는?”  

“안 할 거에요. 정자 형님도, 미연씨도 다 등록 안 했어요. 아마 영애씨랑 성주씨도 등록 안 할 거에요.

“뜻밖이네...”   


지선은 사과를 깎던 손을 멈추고순실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도 선생님을 한 분 모시고그룹지도를 받을 계획이에요. 문화센터 교실에서 하는 것보다 단촐하고 자유롭고 더 좋을 것 같아요. 우리랑 함께 하시는 거지요?"

"누구 적당한 선생님이 계신 거에요? 다들 정말 본격적으로 그리려는 모양이네."

"하하, 그게 아니구요, 그 반대에요.  자유롭게 슬슬 그리자는 뜻이에요. 우리랑 같이 해요. 교실은 좀 답답하잖아요.  경치 좋은데 나가서 풍경도 그리고 싶잖아요. 꼭 같이 하시는 거에요!"

지선이 과일을 깎는 동안 순실은 찻잔을 든 채 이 쪽 저 쪽으로 옮겨다니며 벽에 걸린 지선의 그림들을 감상했다.


“수채화 배우는 것 이번이 처음 아니시지요?”  

순실이 자신의 생각이 틀림 없다는 듯이 묻는다.

“아니요. 정말이지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그림을 제대로 그려보지 못했어요. 늘 마음에 두고는 있었는데…”    

“그런데 지선님 그림은 손을 놓고 있던 사람 그림같지 않아요. 오래 해오던 작업처럼 안정감이 있어 보여요.”  

“그래요? 붓을 들지는 않았지만, 눈으로 보고 다니긴 제법 많이 보고 다녔어요.  그림과 인연을 아예 끊고 살지 않아서 그런가?”  

“지선님은 무슨 과목 전공하셨어요?”  

순실은 오랫동안 궁금해하던 질문을 넌즈시 꺼냈다.

“난 대학 안 다녔어요. 전공한 것 없어요.”  

지선이 담담히 답했다.

“어머, 그러세요? 저는 지선님이 미술 쪽으로 전공하신 줄 알았어요.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시니까요. 그런데 전공한 사람보다 더 잘 그리시는 것 같아요.”  

“이제 배워보겠다고 나선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부끄러워요.”

순실은 새로 조직하는 수채화 개인지도 반에 지선이 꼭 합류할 것을 당부하며 돌아갔다.


호수 저편의 산은 가을 색이 완연했다. 호수는 차갑게 은빛으로 빛났고, 바람 또한 수선화 회원들의 머리카락을 멋스럽게 휘날려 주고 있었다. 물감은 칠하는 대로 잘 말라서 그림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지만 누구도 완성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허리를 펴고 다른 회원들의 그림을 훑어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변화백이 흩어져 놓여 있는 이곳 저곳의 이젤 쪽으로 움직일 때마다 회원들은 어린아이들 모양 우루루 그쪽으로 몰려가 함께 평을 들었다.

그럴 때  이영숙의 눈은 제일 반짝였고, 김정자는 팔을 뒤쪽으로 돌려 자신의 허리를 꾹꾹 누르며 배를 앞으로 불쑥 내밀고 허리를 폈다. 강성주는 변화백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자신의 그림을 해부하며 변화백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렇죠 화백님? 그렇죠 화백님?

“박지선씨는 오늘 그림이 영 안 되는구먼.”  

“그러네요, 언니, 오늘 웬일이야?”

지선의 호칭은 무에든 한 가지로 정해질 때도 됐건만 아직도 그렇게 이것 저것으로 왔다갔다 한다. 형님,언니, 지선님, 박지선 씨, 이렇게.


지선은 가벼운 스케치를 한 후 물칠을 많이 하고 푸른 하늘, 노란 산, 하늘의 푸른 빛깔과 산의 노란 빛이 다 담긴 호수를 경계없이 그라데이션으로 그렸다. 그게 실패였다. 하늘과 산의 경계는 너무 또렷했다. 새파랑과 샛노랑으로.  호수는 그라데이션으로 칠할 게 아니었다.  잔 물결 사이사이에서 마치 금속 사슬의 고리처럼 은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산과 호수와 하늘은 선명했다. 나이를 잊은 여자들의 깔깔거림도 선명했다. 아련히 피어오르는 봄이 아니었다. 청명한 가을이었다. 유리 구슬처럼 투명한 가을이었다. 뭉그러진 색깔들이 둔한 자세로 게으르게 들어앉은 지선의 그림은 그 모든 것들 앞에 민망했다. 변화백의 염색하지 않은 은발이 바람에 휘날려 머리카락 한올한올이 다 반짝반짝 빛났다.


 “사진 촬영은 제대로 다 했지요? 다음 시간에 완성된 그림을 한번 봅시다. 이 그림은 사진대로 완성하면 안 되겠는 걸. 여기 산은 그대로 그라데이션을 살려요.  단풍색이 아주 좋구먼. 호수에 다시 손을 대야겠어요. 하늘 색깔과 호수의 색깔을 잘 맞추라구.  자 그리고 여기는 호수에 얼비친 산의 모습.  너무 흐리지 않게, 너무 선명하면 또 안 되지, 물에 얼비친 산에도 단풍색을 쓰는 것 잊지 말고.  늘 같은 말이지만, 사진 인화한 다음에 현장에서 그린 그림이 완전히 바뀌는 사람이 많아요.  사진이 현장 그림을 망치는 수도 있고, 완성을 도와주는 수도 있단 말이야.”


그 가을의 끝 무렵 수선화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리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그림을 남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욕구가 빼죽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가을을 넘기며 그들은 인사동으로 과천으로 홍대 앞으로 몰려다녔고, 여자 특유의 남에 대한 부러움이 이스트를 넣은 빵반죽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우리도 전시회 한번 해볼까’하는 말들이 장난처럼 몇번 나왔었지만 누구도 그 말을 받아 전시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지는 않았다. 애써 그린 그림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고 귀한 생각으로 은근히 남에게 자랑삼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얼마쯤 후에는 전에 그린 그림들이 부끄러워 모두 찢어버리고 싶게 화가 날 과정이 기다리고 있음을 그때는 예감하지 못했다. <화(畵)사랑>이란 이름을 제치고 결정된 <수선화(水仙畵)>였다. 지선은 가끔 그 모임이 수선화(水仙花)들의 모임이라는 생각을 한다. 곧 연못에 빠져버리고 말 나르시시스트들. 지선 자신도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음을 문득 깨닫곤 헤어나려고 허우적거리곤 했다. 그러나 흰 눈발이 속눈섭위에 수줍게 내려앉을 때까지도 지선은 수선화(畵)에 속한 수선화(花)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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