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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ug 16. 2020

초상(肖像) 박 춘자 4

4화 / 수채화 2

수채화 2


이국에서 맞는 비는 더 차갑다.  여자는 톡톡톡을 그리워한다.  비는 후두둑후두둑 몇 번인가를 수선스럽게더 흩뿌리더니 슬그머니 물러난다. 여자는 강을 따라 걷는다.  주황, 어두운 빨강, 연한 베이지, 그리고 검은 색이 넓고 좁은 줄무늬로 섞인 숄을 두른 노파의 접은 우산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여자는 생각한다. 저 숄은 노파의 어깨에는 너무 무거운 색깔이라고. 여자는 아이보리 색깔의 숄을 노파의 어깨에 얹어 본다. 봄이 아닌 걸 깨닫고 그걸 다시 걷는다. 다시 연한 갈색의 숄을 노파의 어깨에 두른다. 어울린다. 한번도 고운 빛으로 불태우지 못하고 누렇게 뜬 젖은 잎새들, 역류할 줄 모르고 가던 방향대로 계속 흐르기만 하는 강, 가슴속을 기웃거리며 틈새를 노리는 바람, 여자는 문득 겨울을 느낀다. 기차역으로 간다. 여자를 실은 기차는 겨울 깊숙이 빨려들어간다.


어려서 그리던 산 모양, 그 모양대로 삼각형인 산이 있고, 그 산을 품은 호수가 있는 곳에서 여자는 생각한다. 호수 속에 들어있는 저 산은 물속에 거꾸로 깊이 들어가 있는 걸까, 호수 표면에 평면으로 누워 있는 걸까. 여자는 답을 모른다. 호수의 표면에서 혹은 호수의 속에서 산이 출렁이며 일그러진다. 바람이다. 여자는 생각한다. 산이 움직였을까,물이 움직였을까. 그건 알 것 같다. 물이다. 여자는 또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닮았을까를. 물을 닮았다는 생각의 꼬리를 물고 바람이 몰려온다. 여자는 출렁인다, 일그러진다, 흔들린다, 그러다가 고요해진다, 바람이 잘 때.


호수엔 잿빛과 갈색과, 검은 색이 적당히 섞인 오리떼들이 한가롭게 떠 있다. 스위스의 작은동네 스피츠, 툰 호수에 사는 오리들은 한국의 새우깡을 좋아한다. 고래가 새우를 먹는다는 상식을 붙잡고, 오리도 새우를 먹을까를 생각해보지만, 오리가 사는 곳엔 새우가 살 것 같지 않은 생각만 확실해진다. 그러나 툰 호수의 오리들은 새우깡을 좋아한다. 여자는 주머니를 뒤진다. 새우깡은 없다.


호텔 제 가르텐(See Garten)의 205호실에서 여자는 싱크대 앞에 서 있다. 이따금 거기 와서 끓여 먹었던 음식 냄새가 난다. 닭백숙, 생선 매운탕, 그 속에 넣었던 마늘 냄새를 여자는 맡는다. 여자는 행주를 꺼내어 싱크대를 닦는다. 냉장고를 연다. 아무 것도 없다. 서랍을 연다. 4인분의 포크, 나이프, 테이블 스푼, 티 스푼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여자는 호텔방을 나선다. 언덕을 올라가 수퍼마켓으로 간다. 낯익은 독일어로 쓰여진 식품들이 즐비하다. 버터, 잼, 우유, 달걀, 오렌지, 그리고 스위스 초콜렛 린츠를 산다. 인스턴트 카푸치노 봉지를 집어 넣는다. 문득 생각이 난 듯 소금과 설탕을 찾아 넣는다. 계산대 앞에서 기다리다가 여자는 다시 빵이 진열된 곳으로 종종 걸음으로 다가간다. 아메리칸 스타일의 흰 식빵을 산다.


205호실로 돌아와 뜨거운 물로샤워를 한다. 샤워실 바깥 쪽으로 하늘 색 목욕 가운이 단정히 걸려 있다. 여자는 두 개의 가운 중 하나를 내려 입는다. 여자는 나머지 가운을 손으로 훑으며 만져본다. 가운자락을 끌어당겨 볼에 살짝 대어본다. 남편이 함께 왔다면 이 가운은 남편이 입을 것이다. 그는 지금쯤 회사 앞 식당에서 숭숭 썬 돼지고기와 큼직한 두부를 넣고 끓인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고 있을 거라고 여자는 생각한다.


여자는 다시 옛 남자친구를생각한다. <명태>를 시원스레 뽑아 부르던 그를. 거나한 상태에서 한껏 감정을 넣어 구수하게 부르던 그의 노래를 생각해본다.   “감푸른 바다 밑에서 줄 지어 떼 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  ~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던 원산 구경이나 한 후~ ”  이 부분에서 그는 목청껏 소리를 쭈욱 뽑아낸 후 큰 숨을 한번 쉬고는 다음으로 이어갔다.  “ ~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 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여기서 그는 마치 이제부터는 자신의 이야기라는 듯이 진지한 눈길로 여자를 바라보며 숨을 고른 후 또 다음으로 이어갔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고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쨔악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이렇게 노래를 마칠 무렵엔 그의 눈은 촉촉히 젖어 있었다. 그 자신이 쨔악짝 찢어지는 명태이었거나, 밤 늦게 시를 쓰는 시인이었거나, 그가 그 노래를 부름은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는 명태의 절규가 자신을 대변하기 때문이었으리라.  명태와 시인과 그가 하나되어 여자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여자는 갈증을 느낀다. 오렌지를 통째로 하나 까 먹는다.


남자는 집에 들어와 아내가 만들어 준 로브 가운을 입는다.  흰색의 타월지로 안을 넣고 회색, 청색, 흰색의 체크무늬를 겉감으로 만든 가운이다. 톡톡톡이 남자의 무릎 위로 단짝 올라 앉는다. 아내의 체온이 느껴진다. 남자는 톡톡톡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는다. 목덜미를 슬슬 긁어준다. 그놈이 눈을 지그시 감는다. 거기 아내의 바르르 떠는 속눈섭은 없다. 톡톡톡은 아내가 지어 준 이름이다. 남자가 아내의 생일 선물로 제법 많은 값을 치르고 데려온 그놈은 아내를 무척 따른다.

“톡! 톡! 톡! (Talk, Talk,Talk)” 남자가 늦게 들어오는 날 아내는 톡톡톡을 부른다. 그 놈과 이야기를 나눈다. 남자가 없는 방문 앞에서 아내는 노크를 한다. 톡톡톡. 남자는 없다. 그 놈이 꼬리를 흔들며 달려온다.  아내는 외친다. 톡!톡!톡!  끄응끄응, 그 놈이 말을 한다. 아내는 노크한다. 톡톡톡. 그 놈이 대답을 한다. 그렇게 아내와 톡톡톡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남자는 톡톡톡의 목을 간지럽히며 툭하면 그놈을 불러대던 아내의 목소리를 생각한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3월 중순경, 남자 중학교에서 남녀 공학의 고등학교로 진학한 준호는 교정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여학생들의 목소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여자 동기간도 없이 동생들 다섯이 모두남자인 준호에게 여자들의 음성은 어찌 그리도 낭랑하고 곱게 들리던지! 여학생의 목소리에 신비감을 느낀 것은 어쩌면 준호가 여학생들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모습보다 먼저 접한 목소리에서 첫 설레임을 느꼈다. 수줍음이었든지, 눈부심이었든지, 준호는 여학생들을 바로 쳐다볼 엄두를 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목소리만 듣는 것으로도 준호의 가슴은 설레이곤 했다. 여학생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일은 엄두도 못내던 준호였다.


준호가 가입한 <가람 문학회>에서는 매년 5월에 시화전을 하고, 10월엔 문학의 밤을 개최한다. 입회한 지 겨우 한달 넘긴 신입생들은 특별히 준비한 작품이 없어 10월에 열리는 문학의 밤부터 참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매일 방과후, 문학회 모임으로 쓰이는 교실에 모여 선배들의 시화전 준비를 도왔다. 종이를 재단하고, 물감이 멋대로 섞여버린 파렛트를 깨끗이 닦아내고, 물통에 물을 부지런히 갈아 나르고, 흩뿌린 색지 조각들을 주워 모으고, 시를 적어 넣을 글씨체를 연습해 보고 그러다보면 금방 교정은 어둑어둑해진다.  

솜씨 있고 꼼꼼한 여자 선배는 자작시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넣고 특별히 고안한 글씨체로 시를 써 넣는다. 어떤 남자 선배는 색지에 굵은 매직팬으로 시를 적어 넣는다. 각자 자신의 시를 돋보이게 하려고 열심히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준호는 열린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한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준호는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을 얼른 훽 돌려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기가 가람 문학회 모임이지요?”  

여학생의 목소리가 준호의 붉은귓바퀴를 한바퀴 팽그르르 돈다.

“그런데?”  

어떤 남자 선배가 굵은 목소리로 대꾸를 한다.

“미술반 선희언니가 보내서 왔는데요.”  

“응, 그래?  왜 선희가 안오고?  어이,친구, 일학년이지?”  

" 예, 일학년이에요. 선희 언니가 오늘 집에 일찍 가야 된대요. 그래서 저보고 여기 가서 도와주라고 했어요.”  

“시화전 그림 좀 그려 봤냐?”  

“아니요. 한번도 안 해 봤는데요.”  

“김선희 이거 그냥, 좀 도와달랬더니 그래 신입생을 보내?”  

흰 피부에 선병질적으로 생긴 회장이 짜증을 내며 툴툴거렸다.


준호는 어느새 고개를 돌려 여학생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저한테 시킬 일이 있으면 시키세요. 제가 선희 언니 대신 할께요.”  

“그래, 가만있자, 그런데 네 이름은 뭐냐?”  

여학생은 선뜻 이름을 대지 않고 못들은 척 시선을 딴데로 돌린다.

“어이, 이름이나 알자구.”  

“예, 박춘자에요.”  

여학생이 마지못해 작은 소리로 대답한다.

“너 중학교 때 그림 잘 그렸니?  이리 와서 이 시들을 하나씩 읽어봐. 그리고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이 있거나, 어울릴 것 같은 그림이 떠오르면 네 맘대로 한번 해봐. 잘하면 너 내년에는 우리 시화전 미술 감독 맡길 테니까 한번 잘해봐라.”  


문학회 회원들은 시화전 준비를 하며 미술반과 친하게 지내고, 문학의 밤을 준비하면서는 배경 음악도 넣어주고 음향기기도 잘 다룰 줄아는 음악반하고 함께 지낸다. 교내엔 특별 활동반의 문예반이 별도로 있었지만, 가람 문학회의 활동처럼 활발하지는 않았다. 몇몇은 문예반과 문학회 양쪽에 다 가입을 했고, 몇몇은 특활의 미술반이나 음악반에 들어 있으면서 별도로 가람 문학회에도 가입을했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거나 무대에서 연주를 하지 않더라도 서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준비를 도왔다. 아무것도 안하는 회원이라도 관람하러는 왔으니 미술반, 음악반, 문예반, 가람문학회 학생들은 학교의 행사 때마다 만날 기회가 자주 있었다.


준호는 그런 만남의 자리에서 늘 춘자를 향하여 눈과 귀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녀의 상냥한 말소리, 그녀의 수줍은듯한 몸가짐을 언제까지라도 곁에 잡아 두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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