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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록소록 Jan 07. 2022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새해가 시작하기 며칠 전이었다.

큰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스키장을 간다고 해서 따뜻한 점심밥을 먹여 보내고 싶었다. 급히 밥을 안치고 된장을 끓였다. 된장이 든 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으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옆 기둥에 부딪혀 된장병을 와장창 깨고 말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뭐가 잘못된지도 모른 채 소리를 질렀다. 

"으악!" 소리가 너무 크게 울렸고 된장병은 온 데로 다 튀어 부엌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손엔 된장과 피가 얼룩덜룩했고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지 순간 얼음이 되고 말았다. 방에 있던 아이들이 다 뛰어나왔다. 얼굴엔 엄마에 대한 못 미더운 눈초리와 우리 엄마니까 그럴 수 있지 하는 당연함이 그 순간에도 왜 하필 내 눈에 보이는 걸까. 엄마 손에 묻은 피에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작은 아이는 약통으로 뛰어가 밴드를 찾았고 나는 겨우 키친타월을 뜯어 피가 나는 손을 지압했다. 


유리가 꽤 날카로웠는지 손가락 상처에서 피가 계속 흘렀다. 임시로 밴드와 붕대로 지압을 한 후 아들들의 도움을 받아 심란한 부엌을 정리한다. 유리 파편이 구석구석 박혀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는 어찌 이리 칠칠치 못한가. 버리게 된 된장병 속 남은 된장이 아까워 또 한숨이 나온다. 지인이 주신 맛난 된장 아껴 먹고 있었는데...


결국 병원에 가서 몇 바늘을 꿰매고서 손가락 부상도 정리가 되었다. 덕분에 오른손을 쓰지 못한 채로 연말연시를 보내게 되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꿀이 박힌 밀양 얼음골 사과도 깎아 먹을 수가 없고, 맛난 밥도 왼손으로,  상큼한 김장 김치도 숟가락으로 얹어 먹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먹는 건 그렇다 치고 그럼 밥은 누가 하나. 다행히 입시를 마친 백수 아들이 내 손이 되어주긴 하지만 평소에는 밥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줄 아는 녀석인지라 내 가슴만 칠 뿐이다. 아들의 기습적인 질문에 당황하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행주로 식탁을 닦은 후 "엄마, 이 행주는 이제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는 거지?"라든가, 냉장고에 넣을 음식과 냉동실에 넣을 음식을 잘 구분 못하는 걸 보고 내 육아 방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들의 설거지는 그릇 하나하나의 존재를 인식하며 비누칠과 헹굼의 섬세한 작업을 거치기에 삼십 분은 너끈히 걸린다.


부상 후 일주일이 지난 지금, 마음이 앞서 몸이 튀어 나가는 일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나의 천사 엄마가 반찬도 자주 잘라다 주신다. 날름날름 엄마 반찬을 얻어먹으며 이 호사를 누린다. 다음 주면 꿰맨 실밥을 풀 예정이고 곧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게 될 거다. 다시 내 손을 사용해서 생활을 해 나갈 일들에 왜 기쁨보다는 서운함이 앞서는 것일까. 엄마 반찬도 계속 계속 얻어먹고 싶고, 누군가가 깎아준 사과도 먹고 싶고, 삼십 분 너머 걸리는 설거지 서비스도 이젠 좋기만 하다, 또 벌러덩 누워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이 상황이 슬그머니 마음에 들려고 하는 건 비밀이다. 

내 손가락이 준 휴식의 시간이 째깍째깍 얼마 남지 않았다. 일부러 사고 친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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