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읽고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서 염기정은 이렇게 말했다.
"철옹성 같은 4인 가족이 너무 싫어."
그랬더니 역시 싱글인 친구는 이렇게 답한다.
가족이 지긋지긋한데 왜 다시 또 가족을 만들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가족은 뭐길래 이렇게 힘이 되었다가 또 지긋지긋하다가 또다시 꿈꾸게 되는 걸까.
가족에 대한 시선은 개인의 경험에 따라 매우 다르다. 가정의 불행의 이유는 셀 수 없이 흘러넘쳐 많은 작품들이 가족에 대한 소재를 다루어도 또 쓸 거리가 생기는 게 가족의 이야기인 것 같다. 2007년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은 <다섯째 아이>라는 작품으로 가족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꿈꿀 수는 있지만 현실은 이렇지 않더냐고 날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직장 파티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이상적인 가정을 함께 꿈꾼다. 런던 교외에 신혼부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3층 건물에 다락방까지 있는 큰 규모의 저택을 무리해서 구입한다. 그들에겐 아이들을 많이 낳아서 대가족을 이루며 단란한 가정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다. 계획보다는 이른 임신으로 해리엇은 직장을 그만둔 채 아이를 줄줄이 계속 낳으며 전업주부가 되었고 데이비드는 대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돈을 벌며 가장의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여름휴가나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부모님, 형제, 조카, 그리고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들이 꿈꾸는 대가족의 풍요롭고 화목한 시간들을 보내는 데 성공하는 듯하다. 그들의 고단한 육아와 노동은 가족에 대한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라 생각했을까.
육아를 함께 도운 해리엇의 엄마는 아이를 너무 조급하게 많이 낳는다고 눈총을 주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다섯째 아이의 임신 전까지는 그랬다. 의도하지 않게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 이후로 해리엇은 이번엔 뭔가 다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임신 주수와 맞지 않게 태동이 너무 강해 임신 기간 동안 해리엇의 고통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커진다. 간신히 9개월을 넘겨 아이를 낳았지만 다섯째 아이 밴은 지금까지의 아이들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밴의 생김새는 사랑스러운 아기의 모습이 아니었고, 믿기 어려운 힘을 가졌으며, 사람과 교감하지 않는 작은 괴물 같았다고 말한다.
자신이 낳은 아이가 다른 행성에서 떨어진 외계인이라고 느낄 때, 이 외계인이 현재의 우리 가족들에게 끔찍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았을 때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층 창가에서 떨어질 뻔 한 밴을 구출했을 때, 그리고 찻길로 뛰어나간 아이를 다시 끌고 들어왔을 때 해리엇은 안도의 마음과 달리 자신의 감정이 흔들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에게 다섯째 아이 밴은 혼란 그 자체였다.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결혼 초 꿈꾸었던 단란하고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에 이런 그림은 예상되지 않았었다. 밴을 가족들이 집에서 돌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동안 집을 방문했던 손님의 개가 죽어나가고 고양이도 같은 방법으로 죽어나갔다. 휴가를 위해 찾아왔던 친구, 가족들의 발길도 뜸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가족, 친지들의 적극적인 설득에 의해 다섯째 아이 밴을 요양원으로 보내지만 해리엇은 밴이 빠진 가족의 삶도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밴을 포기할 수도 없고 밴을 데려오자니 나머지 가족들이 버림받는다고 생각하게 되는 가족의 모습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불행한 시간만 계속된다. 밴을 임신하고, 낳아 키우며 정신적인 고통을 가장 많이 받은 이는 엄마인 해리엇이었을 텐데 가족, 친지들은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은근히 해리엇에게 지운다. 해리엇은 밴이 다른 아이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 주지 않는 의사에게도 상처를 받고, 그 모든 책임이 해리엇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가족, 친지들에게서도 외면받는다. 함께 헌신하던 남편도 어느새 그 모든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가장의 역할에 빠져들 뿐 정신적인 위로가 되어주는 가장의 모습은 아니다.
가족이란 어쩌면 우리 삶에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유일한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꿈꾸던 가족의 모습과는 달리 남편, 부인, 아이들은 각자의 인생으로 태어난다. 아이들 역시 내가 원하는 가정의 모습이 이런 것은 아니었다고 깨닫게 되더라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고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인간은 신이나 운명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후회와 원망은 할 수 있지만 이미 우린 가족으로 엮인 우리의 관계는 단절이란 손쉬운 단어로 끊을 수가 없다.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의 염기정이 그토록 철옹성 같은 4인 가족을 혐오해도, 내 근원인 가족이 싫어도 다시 누군가를 찾아 가족을 만드는 우리의 모습은 돌이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굴리는 시지프스의 모습과 같다. 물론 불행만 존재하지 않는다. 헤리엇과 데이비드처럼 사랑하는 이를 만났을 때 행복한 가정을 꿈꾸지 않는다면 이게 사랑이겠는가. 사랑의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가 평생 짊어질 큰 돌을 만지작거리게 되는 게 아닐까. 내가 굴리고 있는 돌이 아무리 무겁고 힘들어도 올라가고 내려오는 그 순간순간에도 기쁨과 즐거움은 존재한다. 형벌이라 생각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돌을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돌을 굴리고 다시 내려오는 길목에서 힘든 중에도 슬픔과 분노,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인생이지 않을까.
가족의 관계가 형벌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너무 쉽게 가족을 이상화했던 섣부른 인간의 기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가족은 그저 우리의 삶의 형태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순간의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해리엇의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해결은 없다. 그저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작가는 보여준다. 책을 읽는 동안 그 현실을 직면해야 하는 괴로움이 있었지만 책을 덮은 후엔 결국 작가가 주는 결말을 받아들이게 된다. 가족에 대한 내 오만함도 내려놓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