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박완서 에세이 중에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작품이 있다. 책장에 진즉부터 꽂아둔 오래된 책이다. 어디서 데려왔는지 알 수는 없으나 신간에 파묻혀 차일피일 읽기를 미루고 있었다. 책을 읽지 않은 채 나는 읽은 것처럼 책에 대한 이야기를 혼자 상상해 왔는데 책에서 말하는 꼴찌란 당연히 학교에서 공부를 꼴찌 하는 아이들에게 격려의 이야기를 담은 글이 아닐까 생각했다. 누군가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성적표를 보고 우울에 빠진 학생에게 이 책을 건넸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주말에 한숨에 완독 했다. 여러 단편으로 이루어진 2002년에 출판이 된 책이지만 책에 실린 단편 에세이들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70년대의 글들이 있어서 놀랍고도 반갑게 읽었다. 박완서 작가의 초창기 시절 글들이다. 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하면서 밤에 몰래 글을 썼다는 작가의 고백처럼 초기의 글에는 살림에 관한 이야기, 아이들을 키우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그 당시의 아이들 연령이 현재의 내 아이들과 비슷해 작가의 글이 더 실감 나게 읽힌다.
"긴긴 겨울밤 올해도 얼마 안 남았구나 싶으니 이런 일 저런 일을 돌이켜보게 되고 후회도 하게 된다. 이런저런 시시한 후회 끝에 마지막 남은 후회는 왜 이 어려운 세상에 아이들을 낳아 주었을까 하는 근원적인 후회가 된다. 그리고 황급히 내 마지막 후회를 뉘우친다. 후회를 후회한다고나 할까. 아아 어서 봄이나 왔으면. 채 겨울이 깊기도 전에 봄에의 열망으로 불안의 밤을 보낸다."
아이를 낳기 좋은 시기라고 생각된 때는 언제였을까. 그래도 지금보단 예전이 좀 더 나은 환경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는데 그때도 아이들을 어려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다니 놀랍다. 지금의 상황은 아이들에게 환경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더 힘들어지는 세상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매 시대마다 부모의 한결 된 마음이었나 보다. 그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지 못한 본능적 자책감이라고 해 두어야 할까.
꼴찌를 위한 갈채 내용은 작가가 우연히 목격하게 된 마라톤 대회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마라톤 대회 때문에 막히는 시내버스에서 차라리 마라톤이나 구경하자는 심산으로 버스에서 내린다. 마라톤에서 뛰는 선수를 보게 되는데 작가는 1등도 아닌 꼴등 주자가 힘겹게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의 표정이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여태껏 그렇게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은, 그렇게 정직하게 고독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기술한다. 환호와 영광을 한 몸에 받고 있을 우승자와는 달리 혼자 사투를 벌이는 그에게 작가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용감히 차도로 뛰어들어 열렬한 박수를 보내고 환성을 질렀단다. 그가 그만 자리에 주저앉는 모습을 보게 될까 두려웠다고 했다. 그 순간의 작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나는 그때의 선수의 마음은 누군가의 응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과의 외로운 대화 속에 있었을 거라 짐작해 본다. 내가 나를 버리지 않는 마음이 끝까지 달리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인정하고 환호해 주지 않아도 내가 완주하겠다고 약속한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그 순간이, 고통스럽고 고독하지만 일그러진 얼굴로 버텨내고 있는 힘이 아니었을까.
이 책 한 권에는 칠십 년대, 구십 년대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작가의 다정하고 솔직한 언어로 기술되어 있는데 그게 전혀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거나 혹은 지금 시대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게 놀랍다. 오히려 그 시대에도 이런 생각으로 살아온 작가의 지혜가 놀라울 뿐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내 엄마의 지혜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다 읽고 나니 책날개에 박완서 선생님의 선한 미소가 따뜻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문득 선생님이 지금 살아계시다면 지금의 이 상황에 대해 뭐라고 하셨을지 듣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