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록소록 May 11. 2020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인간이 나눌 수 있는 수많은 사랑과 악의 이야기

전쟁 이야기는 두렵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전쟁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그 무게를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지 그걸 봐야 한다면 얼마나 힘든 잔상에 오랫동안 괴로워할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고민 없이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일본군의 포로수용소에서 잔학 행위의 증인이자 유일한 생존자인 조선인 할아버지를 소개하는 글 때문이었다. 2차 대전 직후 전쟁의 책임을 묻기 위한 재판과 함께 그들의 처형이 이루어졌다. 일본의 천황이 지목되지 않는 채 전범으로 몰린 이들은 누구였으며 자신들이 왜 처형당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사라져 버린 그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진실을 알고 기억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펼친 이 책은 순식간에 깊이 마음을 빼앗길 만큼 놀라운 이야기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작가인 리처드 플래너건은 이 작품을 무려 12년간 집필하였다고 한다. 실제 2차 대전중 일본군의 전쟁포로였던 아버지를 기리며 쓴 이 책은 훌륭한 역사의 기록으로도, 전쟁의 참혹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본성과 내면의 기록으로도 훌륭하다. 이 책은 그에게 2014년 영국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지명되게 하였다니 작품성에 대해서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인공 도리고 에반스는 호주에서 의과대를 졸업한 외과의사로 2차 대전의 전쟁에 의무관으로 출정한다.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함락하면서 그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고 타이-미얀마 간 군용 수송 철도를 만드는 노역에 투입된다. 머나먼 정글에서 불가능한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지옥의 노역에 투입된 그들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들을 보낸다. 불가능한 양의 노동과 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식량 배급, 그리고 부상과 말라리야, 콜레라 등의 감염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이야기가 덤덤하게 기록된다. 얼마나 많은 포로들이 그 현장에서 사고로, 병으로, 굶어서 혹은 폭행으로 죽어나갔는지는 실제로도 그 숫자를 통계내기 힘들다고 한다.


죽음의 철도 -나무 위키


일본군은 일본 천황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 모든 일을 하겠다는 신념으로 포로들의 피와 뼈와 죽음을 담보로 공사를 강행시킨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으며 그들에게 포로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계에 불과하다. 도리고 에반스는 포로들을 감독하는 대령으로 처절한 포로의 생을 함께 겪으며 그들을 끝까지 지켜내고자 고군분투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아픈 이들을 돌보고 열악한 상황에서 한 사람이라도 살려 내려고 하는 이야기는 눈물겹다.


무엇을 위한 전쟁이며 누구를 위한 노역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오직 살아남기 위한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전쟁이라는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 안에는 얼마나 많은 개개인의 내밀한 고통과 슬픔과 참담함이 숨어 있는지, 그것들이 얼마나 쉽게 무참히 밟히고 잊히는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다.


여기 조선인 최상민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시절 일본군이 포로들을 관리하기 위해 조선, 대만에서 뽑은 경비병들은 일본군의 지시에 의해 포로들을 착취하는 역할을 하게 한다. 생활의 어려움 속에 월급 50엔을 받기 위해 선택한 그들의 일은 전쟁이 끝난 후 전범으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되는 상황에 놓인다. 그들에겐 일본 천황 만세를 외치며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일본군의 비장함도, 전쟁을 위한 개인적 명분도 없다. 그저 자신이 왜 이 곳에 있으며 왜 전쟁의 주범이 자신들이 되어야 하는지 모른 채 처형당한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외롭게 타국에서 죽어간 많은 조선인들의 이야기에 그들의 외로움과 고통이 전해져 온 몸이 서늘해진다.


누가 이 청년을 전범으로 만들었는가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일본 천황을 위해 죽을 각오로 포로들을 위협하고 구타하며 전쟁을 이끌어 간 일본군은 악이며 살아 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동료 포로들을 돌보는 도리고와 호주 포로들은 선일까? 가족의 생계를 위해 50엔을 일본군으로부터 받기 위해 포로들에게 가학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들은 악일까 선일까. 또다시 전쟁이 끝난 후 전범을 위한 재판에서 자신들의 이익과 명분을 위해 진정한 전범인 일본 천황은 남겨둔 채 그 명령을 충실히 복종한 힘없는 일본군과 조선, 대만인들을 처형한 연합군들의 태도는 선인가, 악인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독일 나치뿐 아니라 여기서도 설명된다. 포로에게 잔학행위를 한 일본군도, 그 트라우마로 남은 평생을 힘들게 살아가는 호주 포로병들도, 그리고 처참히 죽어간 조선, 대만인들 역시 그저 선과 악을 모두 지닌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임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야기는 주인공 도리고 에반스의 사랑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펼쳐진다. 젊고 아름다운 숙모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하면서 결국은 가족에 대한 책임과 사랑을 알게 되는 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인간이란 존재의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책의 표지에 호주판 전쟁과 평화라는 리뷰가 있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전쟁의 이야기이며 또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느끼는 감동과 전율은 그 두 단어로는 모두 표현할 수 없다.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사랑, 책임, 고뇌, 그리고 한계 상황에서의 악한 마음, 그 모두를 냉철하게 관찰하고 풀어낸 작가의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작가가 단지 일본군의 잔학함과 전쟁의 처절함만을 기록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이 책에는 중간중간 일본 시 하이쿠가 등장한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 떠오르는 짧고 아름다운 시는 어울리지 않지만 비현실적인 에너지가 된다. 게다가 책의 목록조차도 바쇼와 잇사의 하이쿠로 표현한다. 선과 악의 판단도, 누군가의 잘못과 용서의 글도 아닌 그저 인간이란 이런 존재일 수밖에 없는 작가의 암시를 듣는 것 같아 마음이 숙연해진다.


좋은 글이란 읽는 이에게 다양한 생각의 질문을 던지는 글이 아닌가 생각한다. 12년간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이 고민한 전쟁과 인간에 대한 고민이 하나의 답이 아닌 독자에게 질문과 생각을 던지게 하는 글로 독자에게 던져진다. 작가의 통찰력과 담담하지만 힘이 느껴지는 그의 글이 부럽다. 흘러가는 역사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을 안겨주는 책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최고의 책으로 평가하고 싶다.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