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연 VS 연인의 연
이제 그만 잊기로 해요
부부의 연이 아니라 연인의 연이라고 했다.
사주 명리학을 공부했다는 선생님이 우리 부부의 사주를 보고 하신 말씀이었다.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이십 년을 넘게 살면서 이젠 볼 것 안 볼 것, 아는 것,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 우리 부부가 부부의 연이 아니었다니... 그럼 도대체 연인의 연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삶인가.
독실한 기독교의 믿음으로 사시는 시부모님과 천주교 신자인 친정 부모님을 둔 우리는 결혼 전 궁합이란 걸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들이 그럴 생각이 없으니 젊은 우리들이야 굳이 궁합을 봐서 고민거리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궁합이 좋지 않다고 해서 결혼을 하지 않을 것도 아니었고 궁합이 좋다고 해도 그게 우리의 실제 결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우린 그럭저럭 이십 년의 시간을 함께 살았다.
한참을 지나서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우리가 부부의 연이 아니고 연인의 연이었다니 이것은 웃어야 할 포인트인지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애인이라면 그래도 알콩달콩 사랑이 뿜 뿜 샘솟는 관계가 되어야 할 텐데 이십 년을 함께 살아오면서 그런 감정으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인의 연이라면 서로 애틋하게 연인관계로 데이트를 하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져 평생 가슴속의 사랑으로 절절한 사연의 추억이 되어줘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철학을 공부하셨다는 그 선생님은 자고로 부부의 연이란 서로의 다른 성향이 조화되면서 미움의 감정도 함께 존재하는 인연이라고 했다. 반면에 애인의 연에는 미움의 마음이 서로에게 없는 거라 하신다. 그럼 남편과의 부부싸움 뒤에 그의 뒤통수에 대고 날린 나의 무수한 눈흘김은 도대체 미움의 감정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우린 그 말을 듣고 서로에게 가졌던 각자의 감정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허허...' 하고 헛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어쩐지... 그럴 줄 알았지 그럴 줄 알았어. 우리가 어디 손 잡고 나가봐라. 누가 부부라고 보겠어. 애인이지..."
하며 느끼한 너스레를 떠는 남편을 두고 흐흐흐 함께 웃어주긴 했지만 그럼 우린 결혼하면 안 되는 인연이었나 하는 다른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 어쩐지... 부부의 인연이라면 푸근하게 내가 기대는 마음이 좀 있어야 할 텐데 이건 내가 꼭 아들을 돌보는 느낌이었단 말이야... 그랬구나. 아이고 결혼 전에 궁합을 봤어야 했나...'
내 머릿속의 풍선 글이 줄줄이 사탕으로 연결되어 나온다. 남편 머릿속의 풍선 글은 짐작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부부의 연과 연인의 연의 오묘한 차이에 대해 우린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녁식사를 하고 남편과 산책을 다녀오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 야심한 밤도 아닌데 중년이 훌쩍 넘은 한 남자가 약간 취기에 오른 듯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동승하게 되었다. 처음 보는 얼굴의 주민이었다. 그는 25층을 누르고 핸드폰을 꺼내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와도 엘리베이터 안에선 끊을 상황일 텐데 버젓이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하는 그를 향해 우리의 관심 안테나가 꽂혔다.
"음... 나야... 잤어?, **아... 나...돈이 없어. 네가 원하는 그 돈을 마련해 줄 수가 없어.... (침묵)
그래... 안 되겠지? 우리 이제 더 못 만나겠지?... 돈 없는 나랑 어떻게 만나겠어... 그래... 우리 헤어지자..."
헉! 이런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화가 우리의 귀에 들렸다. 나와 남편은 서로 쳐다보면서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얼른 내려야 하나 아니면 못 들은 척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어야 하나... 이미 타이밍을 놓쳤고 우린 얼음이 된 채로 엉거주춤 그에게서 시선을 피한 채 황급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우리는 그 순간 알아버렸다. 애인과 부부의 관계를. 돈이 없어서, 그녀가 원하는 돈을 마련해 줄 수가 없어서 헤어져야 하는 건 부부의 연이 아니고 연인의 연이었다. 부부는 돈이 없으면 바가지는 긁을 수는 있지만 그 이유로 헤어지자 하지는 않을 관계. 우리가 내린 결론은 명확해졌다. 우린 심오한 눈빛과 마음을 교환했다. 그 마음에 남편은 돈이 없어 이혼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후로 25층의 그 가련한 아저씨의 사연은 알 수가 없다. 정말 돈을 마련해주지 못해서 애인과 헤어진 걸까. 오히려 돈이 없는 게 그 아저씨에겐 다행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럼 돈 많은 남자는 애인이 많은 걸까. 나와 남편이 애인관계로 지속했다면 헤어졌을까... 마음의 풍선 글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제 연인의 연은 그만 잊고 싶어 졌다. 상큼발랄한 애인의 모습을 기대했다가 뿌옇고 끈적거리는 물을 만난 기분이 든다. 부부의 연은 훤하게 바닥이 보이는 맑은 물이다. 너무 훤해서 숨길 것도 숨을 수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그런 부부의 연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