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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록소록 Jul 11. 2020

그 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면

책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읽고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 줘.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
태어나 처음으로 해 본 일이었다. 그를 내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 나는 그전에, 어쩌면 그 후에도 타인과 공유한 적이 없는 영역으로 들어갔다. 


몇 년 전 흥미롭게 본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단순히 아름다운 퀴어영화라고 기억했다. 배경이 되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도 아름다웠고 등장인물들은 악역 한 명 없이 아름다운 인물들이라 생각했다. 그들의 솔직하고 낯선 감정들을 생생하게 표현한 영화가 잔잔하게 마음을 울렸었다. 


우리나라에선 <그해, 여름 손님>으로 번역되어 나온 책이 원작과 같은 제목 <콜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파스텔 빛깔의 아름다운 책이 내용과도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인이 인생 책이라고 꼽았기에 영화를 잠시 잊기로 하고 찬찬하게 읽어 보았다. 누군가의 인생 책이 되었다면 그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배경은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마을, 17세의 소년의 티가 아직 남아 있는 엘리오의 집에 그해 여름, 손님이 찾아온다. 학자인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멀리 미국에서 온 젊은 학자 올리버는 누구에게나 호감 가는 미남의 청년이다. 올리버의 호탕한 성격에 그리고 그의 거침없는 행동과 말에 엘리오는 저항할 수 없이 끌린다. 그를 알아가면서 엘리오는 자신을 알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해 여름, 그들에게는 평생 잊히지 않을 경험을 한다. 엘리오는 처음 느껴보는 자신의 감정이 혼란스럽다. 올리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커지기만 하고 그런 자신을 스스로 받아들이기 위한 내적 갈등을 작가는 다채롭게 그리고 사실적인 섬세함으로 그린다. 영화에서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기억했는데 책을 읽는 동안 사랑을 시작한 소년의 성장에 더 관심을 두며 읽게 되었다. 


엘리오의 시선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문장을 읽다 보면 독자 역시 함께 그의 감정을 따라가게 한다. 잊었던 젊은 시절의 혼란스러웠던 마음으로 살짝 여행 가는 기분도 든다. 한마디로 표현되지 않고 뿌연 안개 같았던 그 시절의 일들이 그의 방황과 함께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내 감정을 다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가꾸어 나가는 일은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늘 주변의 무엇에 의해 방해를 받기도 하고 또 숨겨야 하기도 한다. 고통스럽지만 나를 바라보는 일, 그리고 현재의  마음에 흠뻑 젖어 충분히 느끼고 행동하는 일은 우리의 삶을 더 깊고 충만하게 만든다.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부분은 올리버가 미국으로 떠난 후 슬픔에 잠긴 엘리오에게 아버지가 말을 건네는 대목이었다. 그들의 관계를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지켜보고 있었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심하지만 가장 따뜻한 어조로 말한다. 


"우린 고통에서 치유되기 위해 자신을 너무 많이 망쳐버리지. 그 때문에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마음이 결핍되어 버리곤 해. 그러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줄 것이 별로 없어져 버린단다. 무엇을 느끼면 안 되니까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건 시간 낭비야. 우리의 몸과 마음은 단 한 번만 주어진 것이고 너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닳고 닳아버린다는 걸 기억해. "


아들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 것일까. 위험한 불장난으로 여기고 이를 걱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부모라면 엘리오의 아버지는 그의 감정을 존중한다. 오히려 아들이 그 감정에 충실하기를 그리고 온전하게 느끼며 그의 소중한 시간을 보내기를 응원한다. 


"엘리오, 너도 좋은 사람이고 올리버 역시 좋은 사람이지. 너희가 가꾼 우정은, 아니 그 이상의 관계도 역시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해. "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아버지는 엘리오에게 행운 같은 존재이다. 그런 부모의 사랑을 받은 아들이라면 어디에서 누구와 사랑을 하며 살아가더라도 자신의 튼튼한 자아의 뿌리로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은 잠깐 동안의 뜨거웠던 여름밤의 꿈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각자의 삶에서 함께 한 추억이 나머지의 삶에도 큰 부분이 되어 살아간다. 그들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기 위해 밀고 당기던 그 섬세한 감정과 서로가 얼마나 큰 기쁨을 주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그들에게 오래 남는 건 그 순간을 충실하게 온전하게 느끼며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엘리오의 아버지의 조언대로 그 기억이 다음의 사랑에 그리고 다음의 삶에 소진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그들은 책의 제목처럼 너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고 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관계를 원한다. 너와 내가 하나임을 받아들인다. 내가 네가 되는 마음, 네가 내가 되는 마음은 얼마나 서로가 충만해질 때 생기는 감정일까. 

엘리오가 꿈에 젖은 듯 반복해서 부르는 이름이 들리는 것 같다. 

"오, 엘리오, 엘리오, 엘리오..."


부디 지금의 감정에 충분히 느끼고 사랑하는 순간의 삶이길 기원한다. 소진되지 않는 삶의 숨겨진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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