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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록소록 Nov 09. 2020

진하고 깊은 삶을 위하여

<라이팅 클럽>을 읽고

"거기가 파이팅 클럽 맞나요?"

"파이팅요? 아뇨, 죄송합니다만 라이팅 클럽입니다."...

"라이팅요? 아 조명!"

모두가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라이팅 클럽이라니... 파이팅해서 쓰는 글이 자신의 삶을 환하게 비춰주는 조명 같은 역할이 된다고 말할까.

그러기에 나의 라이팅은 언제나 보잘것없고 스스로를 절망의 굴레로 빠뜨리는 역할에 가깝다. 그래도 내 삶에서 완전히 제거해 버리기에 이 라이팅은 여전히 내 맘 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앉아 꺼져가는 불을 깜빡거리며 파이팅하라고 외친다. 그러니 머릿속엔 언제나 뭐든 쓰자며 스스로를 다그치게 된다.


계동의 작은 공간, 작가라고 하기엔 작은 뭔가가 부족한 김 작가와 그녀의 딸이지만 청소년이 된 이후에야 함께 살게 된 딸 영인의 이야기이다. 글쓰기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함께 계동 작은 공간에 모여 앉아 머리를 맞대고 잃어버린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여자들이 있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에 너무 익숙해진 그들이 글을 쓰며 함께 깊은 삶을 나눈다. 서울의 한 복판이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시골의 작은 마을 이야기 같다. 


깔깔거리고 박수를 치고 또 갑자기 진지해졌다가 또 갑자기 음담패설로 빠지는 계동 여자들의 대화는 다이내믹함, 발랄함, 그리고 수준 낮음 그 자체이다. 아이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힘도 들 텐데 그 여자들은 도대체 뭘 먹고 그렇게 씩씩했던 걸까. 지금도 궁금하다. 


그녀들에게 글쓰기란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은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또 나도 모르는 낯선 나를 찾기도 한다. 보잘것없는 삶과 글쓰기는 어떤 점에서는 아주 흡사하기도 또 어떤 면에서는 생뚱맞은 일탈이 되기도 한다. 나의 일이 아닌 듯한 글쓰기 모임은 그들의 삶에 조금씩 깊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영인은 학창 시절 짝사랑한 남자에게 격렬한 마음의 편지를 적었고 친구와 구체적이고 적나라한 글을 나누기도 하며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채 글과 함께 성장한다. 그런 그녀가 삼십 대가 되어 계동과는 물리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미국 뉴저지의 작은 동네에서 다시 라이팅 클럽을 시작하게 되는 건 생뚱맞지만 당연한 결과일지 모르겠다. 


자신의 삶이 너무 보잘것없고 가볍게 느껴질 때, 내 삶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을 때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 권의 책 <돈키호테>를 읽고 자신의 글을 쓰기 시작한다. 스스로 글을 읽거나 쓰지 않고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녀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미국의 낯선 곳에서 한국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오래전 글을 사랑하는 계동 여자들의 라이팅 클럽을 떠올린다. 


하지만 내가 쓴 글들이 정말 소설답다거나 문학적으로 뛰어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냥 그렇고 그런 글일 뿐이었다. 그러나 왠지 일거수일투족이 다 의미가 있는 것 같고 내가 느끼는 걸 표현하지 않으면 중요한 걸 다 놓쳐 버릴 것 같았다. 시계가 째깍거리는 움직임도 기록해 두어야 할 것 같고 그 순간만큼은 충만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글을 쓰는 영인을 놀리던 동료 N에게 영인은 이렇게 말한다. 

"한 번 써 봐. 인생이 얼마나 깊어지는데."

글을 써본 이라면 그 한 마디에 왜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에 감동받을 것이다. 나의 글이 문학적으로 뛰어난 글은 아니더라도 금방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글이더라도 쓰는 것을 놓칠 수가 없다. 나의 깊어지는 삶을 놓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녀의 글쓰기에 대한 마음을 훔쳐 읽다 보면 어느새 나는 그녀가 내 마음을 훔친 듯이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정말 쓸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거짓말처럼 글을 쓰게 되는 순간을 경험한 그녀의 마음을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흐뭇하게 끄덕거리며 읽게 될 것이다. 뉴저지의 외딴 네일숍에서 누군가의 손톱을 다듬어 주면서 그들의 삶을 상상하고 읽은 책을 떠올리며 깊어지는 글을 꿈꾸는 영인의 삶에 동조하는 마음을 보내게 된다. 


이 책은 말미로 갈수록 더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 글 쓰는 이들이 열심히 글쓰기를 함께 해서 훌륭한 글을 쓰고 작가로 문단으로 데뷔한 내용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저 그들에게 라이팅이란 삶을 살아가는 라이팅일 뿐이다. 고단한 투병으로 삶이 피폐해질 때에도 무언가를 적고자 하는 김 작가와 그 열정을 눈여겨보는 딸 영인은 뼛속까지 순수한 작가의 태도이다. 


그들은 쓰는 것에 대한 열망이 삶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져 다시 그곳 계동으로 컴백한다. 영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털어 김 작가를 위해 다시 소박한 글쓰기 공간을 만들어 낸다. 돈키호테도 미쳤고 김 작가도 미쳤었다. 돈키호테에겐 꿈꾸는 세상이, 김 작가에는 쓰고 싶어 하는 작품의 세상이 마음속에 항상 어려 있었을 것이다. 영인은 김 작가가 너무 글을 쓰고 싶어 죽음 대신  다시 제정신을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글이란 그런 것이다. 뭔가 대단한 작품을 내지 않더라도 내 삶을 더 깊고 그윽하게 만드는 일, 그래서 더 쓰고 싶어 죽지 못하는 삶, 그런 글쓰기의 맛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생을 경험하고 싶다. 


글이 있어 진하고 깊게 살 수 있었다는 말을 나도 언젠가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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