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내 친아빠가 맞는지를 의구심을 품은 적이 있었어요. 초등학생 어린 눈에 왜 그렇게 밖에 보일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우리 삼부자(아버지, 나, 남동생)는 매해 1월 1일 신정 연휴에 항상 마치 신성한 의식처럼 행하는 의식이 있었어요. 바로 극기훈련이에요. 말 그대로 나를 이기는 그 힘든 훈련을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고학년 때까지 했었어요. 물론 아빠가 모든 것을 기획하고 진행했어요.
우리 삼부자, 왼쪽부터 남동생, 아빠, 그리고 나
새벽녘 동이 트기도 전, 나와 동생 이렇게 두 꼬맹이는 아빠의 재촉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면서 결국 배낭에 짐을 구겨 넣습니다. 항상 포근하고 다정하던 친구 같던 아빠가 그날은 무섭게 논산훈련소의 조교로 변하는 날이에요. (실제로 아빠는 군생활 시절, 논산 훈련소 조교 출신이었어요) 배낭을 싼 뒤, 엄마가 챙겨준 밥을 먹는데, 그 밥이 맛있을 리 있겠어요? 잠도 덜 깼을뿐더러,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두 눈만 꿈뻑꿈뻑 뜨고 있을 뿐이에요.
새벽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추운 겨울날 밖을 나섭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집에서 약 30분 떨어진 산이었어요. 삼부자는 배낭을 메고 등산을 시작했어요. 우선 첫 극기훈련 과제는 정상까지 쉬지 않고 최대한 빨리 도달하는 것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등산하는 것도 사실 힘들었어요.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쉬려고 했는데, 아빠는 휴식시간이 없다고 하며, 다음 훈련을 진행하겠다고 엄포했어요.
정상에는 마치 이미 우리를 환영하기라도 하듯, 흙과 자갈이 잘 정돈돼 보였어요. 아빠는 회초리를 어디서 구해왔는지 우리 두 형제 뒤에 밀착하여 따라다니며, 뒤쳐지는 사람에게는 배낭에 회초리를 가격하며 우리를 극한의 한계로 몰아넣었어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때쯤 쉴 때 됐지, 더 하면 정말 죽을 것 같아.. 설마 아빠가 우리를 죽게 내버려 두시겠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식은 주어지지 않았어요. 몇 바퀴를 뛰어 몸이 예열이 되자, 그다음은 오리걸음을 했어요. 이미 허벅지가 터질 만큼 근육이 올라왔어요. 동생은 나보다 두 살이 어렸는데도 잘 따라와 주었어요.
산에 등산 오신 어르신들은 우리 삼부자가 만들어낸 희귀한 광경을 보고 반은 웃으시고 반은 의아해하는 눈치였어요.
"분명 아빠 맞는 것 같은데, 왜 저런다냐 신년부터!"
어느 한 등산객 할아버지의 혼잣말을 뛰는 와중에 듣고 제발 내 편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랬어요.
산 정상에서 한 40바퀴는 뛰었을 거예요. 1월 1일, 한 겨울에 땀이 비 오듯 하고, 옷은 이미 다 젖어 더욱 뛰기도 질펀할 정도였어요. 머리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우리 두 형제는 급기야 다리가 풀려 버렸어요. 가장 힘들고, 극한의 고통이 나를 괴롭힐 때, 그리고 마침내 포기하고 싶을 때, 아빠는 귀신같이 눈치를 채고 한마디를 합니다.
"아들들아, 너희들 인생에서 힘들 때가 분명히 찾아올 거야. 항상 사람이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는 없는 법이거든! 그럴 때마다, 극기하거라. 극기는 나를 이기는 것이다. 정신이 육체를 다스린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살거라, 그리고 아빠와 함께 한 이 훈련을 기억하거라"
아빠의 말씀에 두 형제는 그렇게 뛰고 또 뛰고, 쓰러지고 싶어도 못 쓰러지게 나를 붙잡는 정신을 질타하며 몇 시간을 또 그렇게 뛰었어요. 뜀박질을 다 한 후, 엄마가 손수 싸주신 주먹밥 몇 개를 게눈 감추든 먹어 치웠어요. 군대에서도 독한 훈련 중에 주먹밥을 먹은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군대에서의 그 맛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인생 최고의 주먹밥이었네요.
이만하면 극기훈련이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가 되는 줄 알았어요. 우리 두 형제의 큰 착각이자 오산이었던 거죠. 그날의 극기훈련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어요. 산부터 집까지 아빠 차를 타고 복귀하는 게 아니고, 뛰어서 와야 하는 시련이 부여됐어요. 나중에 기회가 되어 한번 검색을 해보니 산부터 집까지 거리는 약 13km 정도 되었어요. 어른 걸음으로 걸으면 평균 3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를 저희는 뛰기 시작했어요. 이때 우리 친아빠가 맞는지에 대한 생각이 저절로 들었어요.
우리 형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극기훈련이 우리들 스스로를 위한 것임을 잘 알았기에 포기하고 싶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두 형제는 배낭을 메고 영차영차 뛰고, 아빠는 우측 길로 서행하면서 우리를 따라오며 우리들의 표정을 관찰하는 모습을 그려보세요. 마치 실제 마라톤 경기를 방불케 했어요. 힘들었지만 우리 두 형제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략 한 시간 반 걸렸을 까요, 집에 도착하니 두 다리는 이미 풀려서 흐물흐물거렸어요. 아마 그날 탈진 직전까지 갔었을 거예요. 우리 삼부자는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욕실에 같이 들어가서 샤워를 했어요. 목욕탕에 들어가서도 아빠는 절대 따뜻한 물을 틀어주지 않았어요.
"얘들아, 추운 날씨에서 고생하고 오면 몸이 얼어 있는데, 그런데 거기에다가 뜨거운 물을 부어주면 몸에 동상이 걸리기 쉬워, 이리 와 보렴, 아빠가 미지근한 물로 씻겨줄게"
아빠는 두 아들을 정성스레 비누칠도 해주고, 머리도 감겨주고 종아리나 허벅지 등 근육통이 오지 않게 섬세하게 마사지도 해 주었어요. 목욕을 하니 몸이 많이 나른 해졌어요. 삼부자가 거실에 나란히 누워, 아빠의 양 팔베개에 누워 맛있는 낮잠을 잤어요. 우리는 그날 늦은 밤까지 깨어나지 못했어요.
다른 해에는 아버지 고향인 금산으로 극기훈련을 갔어요. 사실, 12월 31일만 되면 슬슬 목이 조여 오면서, 호흡이 가빠지고, 잠도 오지 않고, 긴장되는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어린 나이에 혹독한 극기훈련을 경험했으니, 이제 어떤 극기훈련이 나를 기다릴까 두려움이 있었던 거예요.
금산은 아빠의 고향이자, 할아버지 할머니 댁이 있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를 드린 뒤, 아빠는 할머니께 물과 마른 수건 몇 개를 가방에 싸 달라고 부탁했고, 할아버지께 잘 다녀오겠다고 훈련 보고(?)를 하였어요.
지금은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그때 당시 손자 사랑이 끔찍하셨는데, 아빠한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범! 애기들 감기 걸릴라! 웬만하면 가지 말어!"
엄하면서 카리스마 있으신 할아버지를 뿌리친 채 극기훈련 길을 나서는 아빠를 보고 나는 속으로,
'우와, 호랑이를 이기면 우리 아빠는 과연 무슨 동물에 가까울까?'
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아빠를 더 회유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컸어요.
'제발 좀 더 말려주세요, 할아버지.. 손주들이 죽을 것 같아요..'
아빠와 할아버지가 옥신각신 하실 때, 할아버지 안채에서 고구마와 귤을 까먹으며 집 안에 있는 것을 아주 잠깐 동안 상상을 했어요. 아주 달콤한 상상이죠. 찰나의 상상은 아버지의 고집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우리는 집에서 약 10분 거리에 위치한 근처 냇가로 향했어요.
매우 무심하게도 날씨조차 도와주지 않았네요. 그날따라 유난히 추웠는데, 추위는 둘째치고 눈보라가 너무 매섭게 내리꽂았어요. 강한 바람 때문에 눈이 수직으로 내리지 않고 45도 각도로 뉘어서 매섭게 내리고 있었어요. 극기훈련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어요.
냇가 위에 긴 둑길이 있었는데, 거기서 아빠가 아래와 같이 말했어요.
"아들들, 지금부터 이 둑길을 뛸 거야, 알겠나! 너희들 아빠 믿지? 아빠는 논산 훈련소 조교였고 수천 명을 감기 한 번 안 걸리게 훈련시켰단다. 걱정하지 말고, 오늘도 정신이 육체를 이긴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거라! 자, 뛰기 실시!"
이런 매서운 눈보라를 뚫고 구보를 하였다.
어려서부터 우리 두 형제는 운동신경이 남달랐고, 어린 나이치고 체력이 좋았다고 자신했던 만큼, 처음에는 가볍게 몸 푸는 식으로 웃으며 뛰었어요. 그렇게 둑길을 왕복하며 뛴 게 다섯 바퀴! 영하의 눈보라 날씨에도 온몸이 뜨거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사나운 눈발이 우리들의 눈에 사정없이 몰아닥쳤어요. 추위보다 힘든 게 뛰는 것이었어요.
"헉! 헉! 아빠 저희 죽이시는 거예요?"
나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이 농담 반, 진담 반 물었어요. 아빠는 침묵으로 대신 답변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삼부자는 상의를 탈의하고 뛰기 시작했어요. 둑 길을 한 10번 왕복했을까요? 눈은 그칠 기세를 보이지 않았어요. 뛰는 게 너무 힘들길래, 나는 이 둑길 구보가 올해 극기훈련의 처음이자 끝인 줄 알았어요. 또 착각이었어요.
나와 동생은 미칠 듯이 힘든데, 이 구보는 다음 훈련을 위한 전초 훈련일 뿐이었어요.
다음 훈련은 냇가에 입수하는 것이었어요. 냇가는 얕기도 했고 그날 날씨가 몹시 추워서 당연히 두꺼운 얼음이 얼어 있었어요. 중간에 손자들 걱정에 몸소 나오신 할아버지 손에 붙들려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요.
아빠에 의하면 땀을 충분히 내고, 몸에 열을 내고, 또한 정신적으로 육체를 지배하는 기운이 가장 극도로 다다를 때, 얼음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게 바로 지금이었고요. 아빠가 미리 준비 해온 해머로 허리만큼 오는 살얼음장을 깨고 먼저 들어가서 앉았어요. 먼저 들어가서는 허허 따뜻하다, 웃으며 우리에게 손짓을 하는 거예요. 나는 어린 마음에 아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았어요. 분명 매우 추울 텐데 왜 따뜻하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했어요. 저희 두 형제는 정말 들어가기 싫었어요. 지금 이 시간에는 따뜻한 방구석에 앉아 귤을 까먹으로 텔레비전 만화 프로그램을 보든, 동생과 신나게 게임을 할 시간이었어요.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어요.
그래도 하는 수 없지요. 두 형제는 아무 말 없이 입수하게 됩니다. 한 발, 한 발 얼음물을 디디는데, 무엇보다 얼음물이 칼같이 내 살을 도려내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디딤발 삼은 냇가에 깔린 돌들이 내 발을 후벼 팠어요. 아빠는 두 형제가 용기를 내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미 좀 더 깊은 곳에 가셔서 목까지 몸을 담갔어요. 우리 아빠지만 정말 미웠어요. 항상 이쯤 하면 됐겠지, 그 이상을 준비해 온 아빠였어요.
얼음물 (출처:https://webhack.dynu.net/gallery/?p=13#7)
두 형제도 아빠 곁으로 가서 품에 안겼습니다. 사실, 우리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어요. 어린 마음에 울고도 싶었고 두 살 어린 동생은 아마 더 그랬을 거예요. 이미 두 형제의 눈에는 독기 어린 눈물이 나올랑 말랑하고 있었어요. 왜, 아시잖아요. 한 번 터지면 그칠 줄 모르는 아이들의 울음 직전의 바로 그 상태. 이제 됐다 싶었는지 아빠가 나가자는 말에 우리 두 형제는 벌떡 일어났어요. 고통과 희열이 공존하는 순간이었어요.
얼음물을 박차고 강변으로 나오자 아빠는 배낭에서 마른 수건 세 개를 꺼내며,
"얘들아, 아빠 하는 것 잘 보고 따라 해 보렴! 이게 건포마찰이라는 건데, 동상이 걸리지 않게 혈액순환을 수건으로 시켜주는 것이란다. 잘 보고 그대로 해 보렴!"
아빠는 속옷까지 벗은 알몸으로 우리 두 형제에게 '건포마찰' 시범을 보여주었어요. 우리 두 형제도 알몸으로 수건을 몸에 미친 듯이 비벼대었어요. 그러기를 삼분이 지났을까요, 몸이 울긋불긋 해 지면서, 미세한 개운함이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전해져 왔어요. 방금 얼음물에 몇 분 있다가 나왔는데, 그렇게 추운 것 같지도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는 이 모든 과정을 이미 경험해 보았고, 아들에게 다치거나 아프게 하지 않으면서 훈련을 진행할 자신 있었던 것이었어요. 그러고는, 강변 한편에 주차되어 있는 아빠 차에 올라탔어요. 언제 틀어 놓았는지, 미리 틀어놓은 가열된 히터 덕분에 몸이 금방 녹고, 우리는 나른해지기 시작했어요. 이때 극도의 행복감을 경험했어요.
'아, 천국에 가면 분명 이런 느낌일 거야'
사실 다른 해 겨울에, 다른 냇가에서 얼음물을 한번 더 깨고 들어갔는데, 그때는 두 번 째라 그런지 몸이 자신 있게 반응을 했어요. 물론 두 번째 얼음물 훈련도 여전히 힘들었지만 그때 사실 더 힘들었던 것은, 우리를 보며 따뜻한 차 안에서 우아하게 독서를 하고 있는 엄마와, 나와 10살 터올 나는 여동생이 사실 더 많이 부러웠어요.
또 다른 극기훈련은 밤에 거사가 이루어졌어요. 어김없이 밝아온 1월 1일. 그런데, 의아하게도 그날따라 아빠가 어디 가자고 안 하는 거예요. 우리 두 형제는 쾌재를 부르며 속으로,
'드디어 우리 극기훈련 졸업이다, 이제 해방이야'
하고 속으로 소리를 질렀어요. 기쁨도 잠시, 1월 1일 신정이라 새해 인사차 금산 할아버지 댁에 있었는데, 밤이 깊어오자 아빠가 극기훈련 얘기를 먼저 꺼냈어요. 이번 극기훈련은 담력훈련이라고 전달받았어요. 아무런 준비물 없이 따뜻한 옷만 두둑이 입고 할아버지 댁 근처 야산으로 우리 삼부자는 향했어요.
할아버지는 저번에 둑길에서 뛰고, 게다가 얼을 물까지 깨고 입수하는 것을 보고 이미 면역력(?)이 생기셔서 그런지, 우리 극기훈련에 대하여 크게 말리지 않으셨어요. 참으로 아쉬웠답니다. 야산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두 형제는 과제를 부여받았어요. 아빠가 말했어요
"남자에게 배짱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담력도 그중 하나야! 너희가 가정을 꾸리고, 또한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려면 이 정도도 가뿐히 해 내야 한단다. 세상을 살다 보면 더 가슴 철렁하고 무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날 거야. 그럴 때마다 어렸을 때 이겨낸 이 담력훈련을 생각하거라!"
미션은 우리 두 형제만 산 중턱까지 가서 한 무덤을 찾아 그 옆에 누워 하늘 별을 보며 대화를 하는 것이었어요. 안 그래도 한 참 겁 많은 나이, 그리고 전설의 고향이 한창 유행일 시절에 그런 담력 훈련을 시키다니, 정말 허를 찌르는 극기훈련이었어요.
실은 많이 무서웠지만 두 형제는 아빠의 의도를 정확히 알기에 훈련에 적극적으로 임했어요. 그래도 내가 형이랍시고 먼저 앞장섰어요. 뒤에 동생이 있어서 그나마 무서움이 덜 했어요. 그때였어요
"파다 다다다닥"
"으억!"
주위 산속에서, 단말마 사람 비명소리가 들렸어요. 가뜩이나 무서운데, 이 소리를 듣고 우리는 더 무서워졌어요.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비명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아빠였다고 해요. 우리 두 형제만 산에 보내 놓고 혹시 밤길에 길을 잃으면 어떡하나 몰래 뒤 따라오다가, 예상치 못하게 꿩이 앞에서 파다 다닥 날아가자 놀라서 아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던 거예요. 나중에 들은 이 얘기에, 배꼽이 빠져라 웃어 댔었네요.
한밤 중, 무덤에 누워 인생을 생각하다. (출처:https://645252.tistory.com/)
우리 두 형제는 무덤에 도착했어요. 무덤가에 누워 무서운 공포심을 날려버린 채 우리들의 미래 모습을 별자리를 그림판 삼아 그려보았어요. 아빠도 언제 뒤 따라왔는지 중간에 누워서 우리 형제 손을 꼭 잡더니,
"아빠는 너희들이 무척 대견스럽단다. 불평 하나 없이 너희들이 너희들 스스로를 이기는 모습에 매우 감동받았다. 앞으로 아빠가 없어도 힘든 일 있을 때는 어렸을 때의 극기훈련을 떠 올리며 절대 포기하지 말고, 극복하도록 해. 사랑해, 아들들"
우리 형제는 왠지 모를 뜨거운 눈물을 흘렸어요. 뜨거운 두 뺨의 눈물은 별빛에 반사되어 빛이 났고, 시골 밤은 그렇게 깊게 익어갔어요.
극기훈련은 수년 동안 지속이 되었어요. 중 2 때 즈음 가서 극기훈련은 비로소 중단이 되었어요. 아빠가 우리 두 형제의 생활을 보고, 이 정도면 그만 해도 되겠다 판단을 했던 것 같아요.
한 번은 아빠 회사 손님이 몇 분 오셨다가 가시려던 참이었어요. 우리 형제는 손님이 나가시면 현관문에서 인사드리는 게 아니라, 아래 1층 대문까지 가서 인사를 하도록 교육받았어요. 우리 두 형제가 그 한 겨울에 민소매 티셔츠만 입고 나와서 인사를 드리는데, 이때 손님께서 우리에게 물어보셨어요.
"얘들아, 너희들 한 겨울인데, 그렇게 입고... 많이 춥지 않니?"
두 형제는 마치 대본 연습을 했다는 듯이 동시에 아래와 같이 말했어요.
"아니요! 저희 극기훈련도 했는데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
아빠는 저희와 눈을 맞추더니, 씩 웃었어요.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보니 그때 극기훈련이 많이 생각이 납니다. 아빠 말씀대로 삶은 항상 원하는 방향으로만 가지 않았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기도 하고,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도 공존해 왔어요. 실제로 극한의 고통과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기면 나는 자주 극기훈련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때 어렸을 때의 극기훈련의 무게가 지금 고통의 무게보다 더 무거웠을 것이라고 인정하고 스스로 상기하곤 해요. 세상에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둘도 없는 값진 경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