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보니 알겠어요. 왜 아빠가 거길 그렇게 좋아하셨는지..
아빠는 젊은 나이에 성공을 했어요. 부를 많이 축적해서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도 아니었어요.
그때 당시, 30대 중반에 개인 단독주택으로 3층 집을 직접 설계부터 완공까지 모두 참여하여 집을 지었으니, 제 기준으로 아빠 인생은 꽤나 성공한 삶이었어요. 비교적 오래된 집들이 즐비한 동네에, 그 중에서도 가장 지대가 높은 곳에 비까 번쩍한 신축 3층 단독주택이 완성이 되었으니, 자연스레 동네 사람들의 이목이 우리가족에 집중 되었어요.
하지만, 아빠는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어요. 부모님은 우리 형제에게 특히 동네 어르신들에 대한 예의를 강조했어요. 동네에서 어르신을 보면, 무조건 허리가 굽힐 정도로 배꼽인사를 했어요. 부모님도 항상 웃는 얼굴로 동네 어르신들과 인사하고 담소를 나눴어요. 아무래도 한 동네에 오래 산 사람들이 많은 동네에 젊은 이방인이 이사를 들어오면 텃세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있었겠지요. 부모님은 주눅들지 않으면서도 또한 기쁘게, 그들만의 방식으로 관계를 잘 헤쳐나가셨어요.
우리 집은 3층 집이었는데, 2층에 우리 가족이 살고, 1층과 3층은 세를 놓았어요. 세로 들어온 분들과도 같이 잘 지냈어요. 저는 어려서, 전세가 무엇인지, 월세가 무엇인지 아예 개념이 없었어요. 아빠는 설날 연휴에 꼭 세입자분들을 찾아가서, 새해 인사와 선물을 주셨어요. 엄청 값비싼 선물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성의와 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전달되는 선물이었어요. 아빠가 세입자 가족분들께 새해나 명절마다 꼬박꼬박 선물과 인사를 직접 찾아가면서 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아빠가 이 집을 지었고, 우리가 이 집의 주인이라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고 위 3층 어르신이 이 집주인이구나. 그래서 명절마다 선물을 들고 가서 인사를 하고, 나도 큰절을 해야 하는구나'
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 정도로 아빠, 엄마는 진한 사람 냄새나는 부부였어요.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결정하고 행한 일들이 모두 쉬운 일은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빠는 비밀공간이 있었어요. 엄밀히 말하면 나도 갈 수 있고, 가족 모두 갈 수 있으니 비밀공간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 공간은 확실히 아빠의 공간이 맞았어요.
3층 위 꼭대기 옥상을 올라가면 조그마한 정자가 있었고, 앞에는 화단과 텃밭이 있었어요. 정자도 일반적으로 사방이 모두 뚫린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형태의 정자가 아니었고, 지붕과 새시, 창문을 모두 설치해서 겨울에는 문을 닫고 들어가 있을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정자였어요. 옥상에 또 다른 하나의 조그마한 집이 있는 셈이었죠.
아빠는 직장에서 퇴근을 하면, 바로 옥상에 올라가곤 했어요. 옥상에 직접 기른 상추, 열무, 배추, 쑥갓, 고추, 토마토, 파 등의 무공해 채소가 아주 풍성했어요. 겨울이 지나면 아빠는 각종 채소의 모종과 씨앗을 사서 화단에 정성스레 심었어요. 그때 저도 옆에서 손을 보태며 흙냄새를 알게 되었어요.
화단 양쪽에는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산소에서 접지해온 나무를 심었고, 가끔 아빠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우리 집안의 뿌리에 대해 말씀을 하곤 했어요. 5월이 지나면 빨간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어요. 멀리서 지나가다 우리 집을 보면, 바로 구별이 갈 정도로 예쁘고 화려했어요.
어렸을 때는 아빠가 왜 그렇게 옥상을 좋아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땡볕에도 수건 하나 목에 걸고 올라가서 초목들과 채소들에 물을 주고는, 정자 안에서 시원한 맥주 한 병드시고 낮잠을 자는 것을 종종 보곤 했어요. 아빠는 정자 안에 조그마한 TV를 들여서 스포츠 경기를 보거나 뉴스를 보기도 하고, 시를 쓰기도 했어요. 어린 나이 다들 그렇잖아요, 덥거나 춥거나 혹은 귀찮은 행동들 잘 안 하려고 하잖아요. 저 또한 마찬가지였어요. 그런 귀찮은 행동들을 왜 그렇게도 부지런히 하시는지 저로써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어요. 마치 사서 고생을 한다는 느낌이랄까요.
우리 집이 동네에서도 지대가 가장 높아서, 옥상에서 보면 동네가 훤히 다 보였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당시에도 전망이 끝내준다라고 생각을 했을 정도예요. 옥상은 우리 가족의 화합의 장이 되었어요. 날 좋은 날은 무조건 주 1회 숯불 삼겹살 파티를 했어요. 숯불에 구운 넉넉한 크기의 삼겹살과 항정살, 쇠고기 갈빗살, 닭다리 등은 정말 꿀맛이었고, 바로 앞에서 갓 솎아낸 열무, 상추, 고추 등 갖은 채소를 같이 싸 먹으면 천국이 따로 없었어요. 아빠가 숯불을 피우는 그 모습과 숯불이 붙는 냄새와 소리는 아직도 눈을 감으면 생생해요.
저는 그걸 행복이라고 느꼈어요. 그리고 아빠는 말씀하셨어요.
"아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렇게 맛있는 식사를 하며, 저기 저 보이는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는 게 바로 행복이야. 아빠는 돈 많고, 권력이 높은 사람보다 이렇게 소소하게 행복을 곁에 두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생각해"
옥상은 우리들만의 공간은 아니었어요. 우리 집과 옥상은 내 친구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우리 집은 나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어요. 아파트가 아니었기 때문에 층간소음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요. 중, 고등학교 친구들을 옥상에 데리고 오기 시작했어요. 아빠는 친구들이 오면 항상 고기를 잔뜩 사 오셔서는 고기를 손수 구워주셨어요. 아이들은 마치 자기 집에 온양 정신없이 먹기에 바빴어요. 항상 그런 아빠를 나는 자랑스러워했어요. 옥상에서 만나던 친구들은 현재 '옥상팸'이라는 이름으로 모임도 하고 있어요. 옥상팸의 시초가 바로 우리 집 3층 그 옥상에서 비롯되었어요.
옥상은 아빠 손님들로도 항상 인기가 많았어요. 시인 등단을 하신 아빠는 항상 주위에 시인들이 끊이질 않았고, 역시나 옥상은 시인들의 최적화된 장소가 되었던 거예요.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경치 좋고, 옆에는 산과 좋은 공기가 있고, 맛있는 식사와 무공해 채소, 그리고 빠지지 않는 주류 등, 한마디로 시인들 풍류 읋기 참 좋았던 셈이죠.
시인 분들은 항상 나에게 와서,
"참 너희 아빠 멋지다, 너는 이런 집에 사니 복 받았다"
등의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아빠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어요.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어요.
'나도 크면 아빠처럼 될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그런 사람'
현재는 전체 집을 세를 주어, 옥상에 가 볼 수 없어요. 그 전에는 이해가 안 갔는데 나이가 들고, 아이들을 키우고,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이제 아빠의 마음이 조금 헤아려져요.
그 옥상은 아빠의 아지트였구나.
아마도 그때 당시 아빠는 온갖 직장 스트레스와 일로 뭉친 피로가 옥상에 올라가면 다 날아갔을 거예요.
지금은 사실 그 옥상이 조금 그립기도 해요. 모두 아파트 삶에 익숙해져서, 그 옥상이 주는 감성과 포근함을 이미 잊은 것 같아 많이 아쉽습니다.
그 옥상에서 아빠는
가장의 무게를, 남편으로써의 책임감을, 인생의 설계를, 직장의 힘듦을 혼자, 그렇게 달래 왔던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