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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티나무 Jun 04. 2021

볼링장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라고요?

아빠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내성적인 성격이 잘못된 성격은 아니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나의 생각을 명확하게 전달하는데 많은 불편함을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아빠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아빠는 그런 나를 위해 내성적인 성격을 보다 더 외향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아빠가 영어를 한창 열정적으로 배울 시기가 있었어요. 나는 기껏해야 초등학교 저학년쯤 됐었습니다. 길거리에 외국인을 만나면 외국인에게 거침없이 돌진하는 아빠를, 그 어린 나이에 막아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아빠는 그리 유창하지 않은 영어로, 하지만 크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외국인과의 대화를 그렇게, 아빠만의 방식으로 이끌어갔어요.


나는 아빠의 방식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왜 낯선 사람에게 가서 대화를 거는지, 그 외국인에게 혹여나 피해나 마음의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닌지, 어린 나이에도 이와 같은 마음이 줄곧 나를 괴롭혔어요.


한 번은 바다로 가족여행을 떠난적이 있어요. 크지 않은 숙소에서 묵었는데, 가운데 큰 마당이 있었고 복도를 따라 여러 숙소가 위치해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어요.  자연스레 출입을 하려면 가운데 마당을 지나쳐 갈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아빠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마당 근처 마루에 앉아 있는, 전혀 일면식이 없는 가족에게 다가가더니,


"제가 기분이 좋은데, 노래를 한곡 해도 될까요?"

"(일가족 당황) 네? 네..그럼요, 노래 하세요"

"마누라, 마누라~ 때리지 말아요, 불쌍한 이 남편을. 마누라가 던진 재떨이에 불쌍한 남편 이마가 다..."


이태리 가곡이 한국말로 개사된 노래를 익살스럽게 불러대는 아빠를 보고, 나는 그 어린 마음에도 불구하고 웃어야 할지 혹은 울상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았어요. 그렇게 짧은 노래를 마치고, 아빠는 그 일가족으로부터 엄청난 박수갈채와 웃음을 보답으로 받았습니다.


우리 가족은 볼링장에 자주 가곤 했어요. 부모님 모두 볼링을 어느 정도 잘 치셨고, 개인 소품 (볼링공, 장갑, 신발 등)도 소장할 정도로 애착 가는 취미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 두 형제도 키가 제법 자라고 힘이 어느 정도 되어 볼링공을 스스로 들 수 있었고, 가끔 가족 안에서 팀을 나누어 볼링 게임을 즐기곤 했어요.


우리 가족은 아빠가 제안한 한 가지 재밌는 규칙을 받아들였는데, 볼링공이 양 옆 구석으로 빠져 한 개의 핀도 쓰러뜨리지 못하면, 복귀하는 길에 팔굽혀펴기를 10회 하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히 나와 내 동생만 양 옆 구석으로 공이 굴러가는 경우가 많았고, 부모님은 그런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 두 형제를 타겟팅한 제안이 된 셈이었죠. 우리 두 형제는 실력이 형편없어, 열 번 공을 던지면 그중 절반은 구석으로 공을 내몰기에 바빴고, 구석으로 굴러가게 되면 알아서 팔굽혀펴기를 하고 들어왔어요.


 


그 진귀한 광경을 보고 있던 옆에 있는 볼링 동호회원분들과 근처 손님들은 우리들이 팔굽혀펴기를 할 때마다, 박장대소를 하였어요. 나는 그때 내가 왜 팔굽혀펴기를 해야 하는지 몰랐으며, 또한 팔굽혀펴기를 할 때, 양옆에 사람들이 하이파이브도 해주고 오히려 잘한다고 응원을 해주어서 창피하기보다는, 오히려 어깨가 으쓱했던 기억이 있네요.


나는 자연스럽게 아빠를 보고 배우며, 삶은 즐기면서 살아야 하는 것을 느꼈어요. 세상의 중심은 나고, 나로 부터 모든 일들은 벌어진다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배우게 되었어요.


특히,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한국사회에서 아빠도 어쩌면 그만의 인생 즐기는 법을 터득하려고 무한한 노력을 했던 결과이기도 했었을 것이며, 특히 내성적인 아들을 위해,


"사내 녀석이 그러면 못써"

"사내가 목소리가 그렇게 작아서 되겠어?"


등의 누구나 말로만 쉽게 할 수 있는 핀잔이나 압박보다는, 당신이 몸소 실천과 모범을 보이면서 '인생은 이렇게 사는 거야'를 보여준 것이었어요.


아빠의 노력과 본보기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수십, 수백 명에게 강의를 하고 정보전달을 하는 역할을 도무지 감당할 재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당시의 무수한 창피함의 자잘 자잘한 퍼즐과 조각들이 지금 성인이 되어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되어, 어엿한 가장으로 한 가정을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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