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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티나무 Jun 11. 2021

아빠, 당구치다가 왜 화를 내세요?

아빠와 스포츠

우리 형제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스포츠를 접하게 되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두 형제는 달리기, 축구, 배구 등 다양한 운동에 소질을 보였어요. 학교 체육대회의 한 종목인 축구경기에 대표선수로 뽑혀 출전 한 경험도 있고, 체육대회의 꽃이라 불리는 달리기 계주도 뛰게 되었어요. 동생은 축구를 남달리 잘해서, 학교 축구부 코치가 축구로 진로를 가볼 생각이 없겠냐고 부모님께 제안을 하기도 하였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내 삶의 많은 즐거움을 차지하는 것 중에 하나가 스포츠였던 것 같아요. 스포츠를 즐기게 된 계기는 아빠로부터 시작해요.


아빠와 치는 배드민턴이 가장 재미있었던 시절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습니다.


주말이면 삼부자는 축구공 하나와 물만 챙겨서 근처 학교 운동장에 가서 신나게 축구를 즐겼어요. 성인인 아빠가 어린 꼬맹이들하고 즐기면 얼마나 즐겼겠냐만은, 아빠는 우리 눈높이에 맞춰서 운동을 즐기는 법을 알려주었어요.


"아들, 공을 높이 찰 때는 이 왼발의 디딤발이 공하고 나란히 있어야 해. 왼쪽 디딤발이 공보다 뒤에 있으면 공을 높게 그리고 멀리 보낼 수 없단다"


"이리 와, 다시 한번 차봐"


두 형제는 아빠의 가이드에 따라 열심히 슈팅 연습도 하고 드리블 연습도 하였어요. 삼부자가 축구 연습을 하다 약간 무료해지면, 아빠는 항상 반대편에 놀고 있는 아이들 무리에게 찾아가더니,


"얘들아, 아저씨하고 그리고 아저씨 아들들하고 같이 편 나눠서 축구할래?"


아빠는 아이들과 어울리는데도 거침이 없었어요. 한 여름 땡볕에 축구를 하고 나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온몸에는 땀이 장맛비처럼 주룩주룩 흘러요. 그늘에서 쉬고 있으면 아빠는 언제 다녀왔는지 근처 마트에서 아이스크림과 이온음료를 사 와서 같이 나눠 먹었어요.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에는 아빠에게 탁구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키도 작고 힘도 없는 작은 초등학생이 성인과 탁구를 치기는 쉽지 않았죠. 사실 그렇잖아요. 상대가 나보다 실력이 좋거나 비슷해야 모든 스포츠가 재밌거든요. 아빠는 나와 치는 게 그렇게 재미가 없었을 텐데요, 한 번도 귀찮아 하는 내색을 보이거나, 그냥 대충 치는 시늉만 하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그리고 모든 운동을 할 때마다 각 운동 종목의 메커니즘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고 시범을 보였어요.


 


탁구를 아빠에게 배우고 나서부터 탁구에 취미가 생겼어요. 이를 계기로 중학교 탁구부도 들어가고, 이후 학교 체육대회에서 우승도 했어요. 탁구는 전교 1등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해졌고, 탁구를 즐겨치셨던 체육선생님, 수학선생님도 저를 따로 불러 탁구를 같이 쳤어요. 중학생 실력이었지만, 그 정도로 만만한 실력은 아니었죠.



스포츠를 잘하니 생각보다 장점이 많았어요. 사내아이들 세계에서는 특히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는 게 또래 집단에서 인정받는데 중요한 영역이예요. 탁구를 줄곧 잘 쳐서, 군대 가서도 대대장님에게 불려 가서 같이 탁구를 쳤고, 군대에서 축구, 족구를 잘해서 포상휴가도 많이 받게 되었어요.




아빠는 스포츠를 하며 가장 강조하는 게 두 가지가 있었어요. '팀워크와 페어플레이'였어요.


"운동을 할 때는 팀웍(teamwork)이 가장 중요하단다. 내가 혼자 아무리 잘해도 팀 동료가 잘하지 못하거나 실수하면 그 팀은 곧 지게 되는 거야. 그래서 운동할 때는 너무 자만하지 말고, 옆에 못하는 친구들도 잘할 수 있도록 같이 도우면서 하는 게 중요하단다"


어렸을 때, 너무 팀워크라는 단어를 많이 듣다보니 저는 그 단어가 '티목'이라는 한국말인 줄 알았어요. 나중에 크고 보니 teamwork라는 영단어였더라고요. 그냥 대충 그 단어가 주는 느낌만 알고 있었던 것이죠.


아빠는 페어플레이도 많이 강조 했어요. 공정한 규칙 아래 경기를 치러야 하고, 비열하게 경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패배를 하게 될 경우 패배를 시인하고 승자를 축하해 주는 것이 진정한 '스포츠맨십'이라고 알려주었어요.


"아빠도 어렸을 때, 큰아빠와 어떤 내기를 하면 이길 때까지 울고 불며 달려들었단다. 사실 그게 페어플레이는 아니거든. 상대가 이기면 나의 패배를 시원하게 인정하고, 상대를 축하해줘야 해. 그리고 패배한 원인을 스스로 찾아서 보완해 나가면 되는 거야"


나는 그때 당시, 운동감각에 대한 자신감도 팽배 해 있었고 꽤나 다양한 운동을 잘 해왔기 때문에 지는 것은 용납을 못하는 성격이었어요. 못하는 친구가 실수를 해서 우리 팀이 지면 비난을 하기도 하고, 스스로 분을 못 이겨 많이 화를 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아빠를 통해 점차 좋게 바뀌었어요. 경쟁심이 불타오르던 나의 성격은 점점 스포츠를 즐기는 방향으로 성향이 바뀌게 되었어요. 아마 아빠에게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배우지 않았다면, 저는 학교 스포츠계에 아주 악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아빠는 스포츠를 통해 많은 인생사를 알려주었어요. 경기에서 한번 붙으면 이기고마는 필승의 의지, 멋지게 지는 법, , 그리고 다치지 않게 즐기며 운동하는 법을 알려주었어요. 우리 두 형제에게는 아빠가 정말 만능으로 보였어요. 아빠는 모르는게 없는 것으로 보였으니까요.


구기종목을 포함한 일반적인 스포츠뿐만 아니라 수영도 아빠에게 배웠어요. 아빠도 정식으로 수영강습을 받지는 않았지만, 생존수영은 가능했어요. 할아버지 댁 근처 냇가에서 가족이 휴가를 즐길 때면, 내 가슴만큼 오는 물 깊이에 아빠가 저만치 서 있고 나에게 물장구를 쳐서 오라고 반복 훈련을 시켰어요. 꽤나 깊은 거리까지 혼자 헤엄쳐가면, 그다음에 아빠는 더 멀찌감치 뒤로 가서 또 혼자 헤엄쳐서 오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몇 번 반복이 되고 나중 되어 아빠까지 도달하고 일어서면 발이 닿지 않아요. 내가 알지 못하게 깊은 곳으로 차츰차츰 뒤로 갔었던 것이죠. 항상 물 관련된 안전사고는 발이 다지 않는 곳에서 사고가 더 많이 일어나니까요. 이를 대비하기 위해 혹독하게 아들에게 수영을 알려준 셈이죠.






아빠는 스포츠를 직접 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는 것도 즐겼어요. 특히, 우리 형제들이 어렸을 때 야구를 많이 즐겨보았는데 종종 직접 야구장에 관람하러 가기도 했어요. 야구장에 가면 가장 열심히 응원하는 사람 중에 하나가 아빠였어요. 목이 터저라 응원을 해서 오죽하면 나와 내 남동생이 옆에서 귀를 막았을 정도예요.


야구장에 가면 아빠가 꼭 하는 의식(?)이 있는데, 바로 '파도타기' 응원이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응원이 체계적이거나 다채롭지 않았어요. 아빠는 야구경기를 관람하다 말고는 관중석을 보더니 큰 소리로 고함을 쳤어요.


"여러분들, 오늘 한화의 굉장히 중요한 경기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어서 되겠습니까? 자! 열심히 경기에 임하고 있는 저기 저 선수들까지 우리들의 응원이 들리도록 파도타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시작을 하면 제 앞에 있는 구역부터 일제히 일어나 파도타기에 동참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아빠는 이러더니 파도타기를 직접 시작했어요. 아빠의 땀의 양과 사람들의 웃음은 비례 해졌고 아빠의 모습은 아주 열정적인 응원단장의 모습이었어요. 아빠가 시작한 파도가 저기 저 먼발치 야구장 반대편을 돌아서 다시 아빠에게까지 도달하면 큰 박수와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어요. 저는 생각했어요.


'아빠는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구나'


아빠만의 스포츠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식이었어요. 지금 프로야구에서는 응원단장 주도하에 응원이 굉장히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그때 당시는 아빠처럼 누가 먼저 시작을 하지 않으면 꽤나 밋밋한 응원이 되거나 응원이 단합되지 않았어요.


엄마와 자식들은 창피하기도 하고 굳이 저럴 필요가 있나 생각했지만, 뭐 어떻게 하겠어요?


아빠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특히 남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으면 그만이었죠.




아빠는 내가 초등학생이 되자 장기를 가르쳐 주었어요. 어리다 보니 각각의 말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조차 외우기 벅찼었는데, 나중에는 제법 잘 두게 되었어요. 옥상 정자에 항상 장기판과 장기알이 구비되어 있었어요. 식사를 하면 아빠와 나는 옥상 정자에 앉아 산바람을 시원하게 맞으며 장기를 두었어요.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아빠와 간단히 맥주 한잔하며 두는 장기는 내 삶의 시름과 입시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내려 놓을 수 있는 중요한 창구가 되었어요.


장기 (출처: 클라우드픽)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가끔 아빠를 이기기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이 연세가 많은 할아버지 선생님이었는데, 어디서  소문을 듣고는 학교 끝나고 남으시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당시 어린 나이에 장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학생들도 많은데, 게다가 나는 제법 '' 읽으며 전략적으로  두는 편이었으니, 선생님 연습 상대로  괜찮았던 모양이에요.


"어이, 김 선생, 일루 와바. 얘가 우리 반 학생인데, 허허 장기를 제법 잘 두네? 김 선생도 같이 한 번 겨뤄봐"


옆반 담임선생님까지 모셔와서는 장기를 같이 두게 했어요. 저는 나중에 깨달았어요. 제가 자꾸 이기면 집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요. 선생님들은 승부욕에 불타서 본인들이 만족하며 이길 때까지 장기를 두자고 했어요. 그 어린 마음에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때로는 일부로 진적도 꽤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아빠와 장기를 두면 다섯 판 중 세 판은 이기게 되었어요. 아빠와 장기를 둘 때면 분위기는 편안했지만 아빠의 집중력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아주 무시무시했어요. 아빠도 아들이 벌써 커서 아빠와 독대하며 장기를 두고 있으니 꽤 제가 대견스러웠나 봐요. 가끔 큰아빠나 작은아빠에게도 내 장기 실력을 말해 주었어요.


부자지간에 장기를 두는 행위 자체도 참 좋은 모습이라 생각해요. 부모와 자식이 서로 몰두하며 같이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것, 그리고 같이 공유하는 취미생활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복일까요. 장기를 두는 행위도 아름답지만, 장기를 두는 와중에 나누는 소소한 대화도 부자관계에 있어 아주 좋았어요. 장기는 생각하며 둬야 하기 때문에, 차례가 오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데 그 찰나의 공백에 나누는 대화가 저에게는 특별히 좋게 느껴졌어요.





성인이 되어서는 아빠와 당구를 치러 다니기 시작했어요. 출가를 했어도 가까운 거리에 살았기 때문에 매주 주말마다 당구장을 갔어요. 가끔가다 부자끼리 당구장에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렇게 주기적으로 오는 부자 커플은 우리 밖에 없었어요. 그런 우리를 보고 대부분의 당구장 단골손님들은 굉장히 부러워하기도 하면서 신기 해 하기도 했어요.


한 번은 어떤 아저씨가 아빠에게 아들하고 어떻게 그렇게 친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본인은 아들과 대화를 하려고 하면 아들이 저만치 도망간다고 했어요. 아빠는 아마 속으로 씩 웃었을 거예요.



당구를 즐기는 아빠와 아들


어렸을 때부터 유대관계가 없으면, 커서는 더 친해지기가 어려워요. 아빠는 항상 이런 말을 해 주었어요.


"부모와 자식 관계는 축복이야. 얼마나 가까운 사이야. 혹시 아빠 목숨과 너희 목숨 둘 중에 하나만 살려야 한다면, 기꺼이 아빠가 죽고 너희들을 살릴 것이란다. 그 정도로 너희들을 사랑해"


"아들, 이렇게 부모와 자식이 같이 친구처럼 지내면 얼마나 좋니. 부모 자식처럼 막역한 사이가 없단다. 같이 사는 세상, 같이 공유하고 즐기며 살 때, 그게 진정한 행복한 삶이야"




당구를 치다 보면 종종 내가 이기게 되었어요. 그렇게 어렸을 때 스포츠맨십을 강조하던 아빠가 이제는 씩 씩 거리기 시작하였어요. 그런 아빠를 보며 내가 얘기 했어요.


"아빠, 당구를 스트레스 풀려고 치는 건데, 스트레스를 되려 받으시면 어떻게 해요"


"이게 지금 아들한테 져서 내가 화가 나는 게 아니야. 너도 나이 먹어봐. 똑같이 치는데 자네는 늘고, 나는 맨날 제자리걸음이야. 내 몸이 내 맘 같지가 않아서 화가 나는 거야. 스스로에게 화가 나는 거야"


아빠는 결과의 승패에 상관없이, 노화에서 오는 운동감각 손실에 대한 분노가 더 컸던 거예요.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아니, 아빠가 아들한테 진다고 저렇게 씩, 씩 거려? 아들이 이기면 좋은 거 아닌가'



세계 당구선수권대회에 아빠를 모시고 갔다. 사진은 아빠와 이충복 프로 당구선수






스포츠는 현재 제 삶과 떼려야 뗄 수 없게 되었어요. 운동을 하며 땀을 흘리고 집중을 할 때 일상 스트레스가 많이 해소가 되어요. 인생을 즐길 수 있게 하는 스포츠를 친구로 삼게 되어 굉장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어려서부터 아빠와의 스포츠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만큼 삶을 즐기면서 살 수 없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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