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나 추석 등의 명절에는 항상 정장에 타이까지 격식을 갖춰 입었어요. 특히, 할아버지 댁(아빠의 본가)에 갈 때보다 외가(아빠의 처가)에 갈 때, 아빠는 특히 옷 마무새 및 용모를 단정히 하였어요.
항상 격식과 예절, 매너를 중요시 여기는 아빠. (좌로부터 아빠, 큰아들, 엄마, 할머니)
아빠와 우리 삼남매의 관계를 보면, 굉장히 유하고 친구처럼 다정한 부분이 많이 있었지만, 예의범절 앞에서는 꽤 엄격하였어요. 유년기를 거쳐 청소년기까지는 솔직히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언제는 한 없는 친구처럼 다정하다가도, 예의범절과 규율 앞에서는 냉정해지고 엄격해지니 쉽게 말하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를 잘 몰랐던 적이 있었어요. 흔히들 규율과 예의범절을 중요시 여기는 분들이 자식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더 엄격하거나 수직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아빠의 예의범절에 대한 교육은 주기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어요.
아빠는 시인으로 등단하면서 많은 '시인'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어요. 전국 팔도에서 모인 시인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같이 식사도 하고, 집 꼭대기 옥상 정원에서 술 한잔도 기울이고 하였어요.
아빠 손님이 오시면 우리 삼남매는 제일 먼저 하는 의식이 있었어요. 손님분들께 '큰절'로 예를 표하는 거예요. 그때 당시만 해도, 시대 배경상 모르는 분들께 다짜고짜 큰절을 올리는 경우가 흔치 않았어요. 아마 내 동년배 또래들은 설날 세배 혹은 오랜만에 친척 어르신을 뵐 때만 큰절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을 거예요.
손님들께 큰절을 이렇게 아주 정성스럽게, 그리고 다소곳하게 올렸습니다.
큰절을 올린다고 하면, 손님들은 극구 손사래를 치시며 안 받겠다고 하셨어요. 우리들을 배려해 주신 것이기도 하고, 실제로 부담을 느끼셨던 분들도 더러 있으셨을 거예요.
사춘기 때는 큰절에 대한 반항심도 조금 생긴 적이 있었어요. 게다가 자주 손님을 모시고 와서 엄마가 힘들어하는 것을 종종 볼 때면 어린 나이에 반감이 조금 들었던 것 같아요.
"왜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큰절을 해야 해? 아빠 지인이지, 내가 아는 분이 아니잖아?"
큰절을 받은 손님들은 '허허' 웃으시며 꼭 우리 자녀들에게 덕담 한마디를 해 주셨어요. 어떤 손님들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용돈을 주시기도 하였는데, 용돈은 아빠가 모두 중간에서 차단을 하였어요. 저희도 용돈을 바라고 큰절을 올린 게 아니었으니, 그러려니 했어요.
손님들께 큰절을 올리는 의미는 아주 뒤늦게 3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어요.
집에 방문한 손님들에게 예를 표하고,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귀한 대접을 해 드리겠다는 의미가 포함이 되어 있는 것이었어요. 큰절이 불과 10초 안팎의 짧은 행위이지만, 가볍게 허리와 목을 숙여 인사하는 인사보다 훨씬 더 정중하고 격식이 있기 때문에, 찾아오신 손님들도 처음에는 당황해도 나중에는 굉장히 흡족 해 하셨어요.
보통 다른 집에서는 보지 못했을 풍경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집 아이들은 방에 있다가 손님에게 인사만 쏙 하고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할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아무래도 큰절을 올리고 인사를 드리면 덕담 한마디라도 더 해주시고, 추후 진로에 필요한 조언을 많이 들을 수 있었어요.
"아빠의 양면성"
아빠는 굉장히 젊게 살려고 노력했어요. 내가 중, 고등학교 시절 아빠 차를 타면 항상 아빠 차에서는 10대, 20대 젊은이들이 즐겨 듣는 최신 유행하는 한국 가요를 큰 소리로 들으며 즐겼어요. 또, 사춘기 때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내 삶의 화두와 기쁨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내 눈높이에 맞춰 대화를 이끌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춘기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리낌 없이 아빠와 거의 모든 얘기를 툭 터놓고 할 수 있었어요.
그런 젊은 아빠가 '조상'과 '뿌리'에 있어서는 굉장히 진지하고 엄격했어요. 일 년에 한두 번씩 진행되는 선산 벌초에는 항상 빠지지 않고 참여했으며, 우리들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길 바랬어요.
"주년아, 너는 안동 김 씨, 충무공파 OOO세손이다. 우리 안동 김가는 예로부터 양반 가문으로 아주 훌륭한 조상분들이 많이 있으셨단다. 이리로 와보렴"
모두 다 한자말로 되어 있는 족보를 꺼내더니, 1대조 시조 할아버지부터 내 시대 자녀들까지의 족보 보는 법에 대해 열변을 토하였어요.
"네 뿌리를 잃으면 너의 정체성도 없어진단다. 그렇기 때문에 네 뿌리와 우리 집안의 역사에 대해서는 항상 기억하고 가슴에 새기도록 해"
아빠는 아빠가 알고 있는 선에서 나의 증조부와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 많이 말씀해 주셨어요.
"주년아, 너희 증조할아버지도 멋진 분이셨지만, 너의 증조할머니, 즉 아빠의 할머니도 엄청 훌륭하신 분이셨단다. 일제 앞잡이를 한 고위 관료에게 직접 찾아가 큰소리로 혼쭐을 내고 호통을 치던 그런 멋진 분이셨어"
아빠는 할아버지 댁 근처에 위치한 증조부 산소에도 자주 데려가 항상 설명을 해주었어요.
"이쪽이 증조할아버지, 이쪽이 증조할머니야. 두 분께 인사 올리자"
출처: https://blog.daum.net/ybm0913/5363
이처럼 아빠는 굉장히 신세대적인 젊은 감각과 사고를 하면서도 동시에 예의범절과 가족에 대한 엄격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어요.
나중에 커서 사회의 기성세대가 되고, 그리고 두 자녀를 키우면서 비로소 느끼게 되었어요.
예의범절을 통해 상대방에게 예를 표하는 것이 모든 관계의 시작이라는 것을요.
나도 아빠를 따라 내 아이들에게 인사와 예의가 기본이라는 것을 여러 통로를 통해서 말해 줄 계획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