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님과 커피님

사물 존대어는 이제 그만!

by 팽나무

여덟 시가 채 안 된 이른 아침, 알록달록한 수면 바지를 입은 아주머니 한 분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머리가 부스스한 게 거울도 제대로 안 보고 나온 듯했다. 그분은 식빵 코너를 쭉 둘러보더니 찾는 빵이 없는지 계산대로 왔다. 금방 나온 빵을 진열하느라 분주한 점주에게 식빵은 언제 나오느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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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께서 찾는 빵은 좀 늦게 나오세요. 큰 빵들은 시간이 오래 걸리셔서 빨리 나오기 힘드세요. 나오시면 하나 빼놓을까요?”

삼십 대 점주는 손님에게 무척 정중했다. 필요 이상 친절하게 응대했다. 매번 그런 모습을 보지만 매번 나는 감탄했다. 온종일 손님을 대하면서도 어찌 저리 구구절절 설명할 수 있을까. 같은 말을 반복하다 보면 시큰둥해질 수도 있는데 말이다. 아주머니는 흡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찾는 빵이 없는데도 헛수고가 아깝지 않은 듯 다시 오겠다 하고는 기분 좋게 매장을 나갔다. 왜곡된 선어말어미 ‘시’의 위력 덕분이었을까.

그럴듯한 아침이었다. 밖에는 겨울바람이 행인 옷깃을 들추며 약을 올렸지만, 유리창 안 세상은 넘보지 못했다. 바람은 겁 없이 출입문을 기웃거리다 강렬한 불빛에 쫓겨났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가게는 불빛을 사방으로 내뿜었다. 유난히 밝은 불빛은 주변 상가 중에서 단연 돌올했다. 빵님을 위해 맞춤한 불빛은 그들을 최상으로 돋보이게 했다.

식욕을 부르는 빛이라고 할까. 반지르르한 갈색 빵을 더 먹음직스럽게 만드는 데 불빛은 아낌없이 힘을 보탰다. 갓 나온 빵은 조명 아래서 최고로 그럴싸했다. 바삭바삭해 보이는 바게트와 촉촉함이 전해지는 카스텔라를 비롯해 각종 토핑이 푸짐한 조리 빵은 색감도 화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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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빵이 나올 때마다 달콤함과 특유의 냄새가 도로까지 새어 나갔다. 파이와 페스츄리는 금방이라도 바사삭 소리가 날 것 같고, 도넛 종류는 달콤함으로 엔도르핀을 돌게 했다. 빵들은 나무로 만들어진 틀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어떤 건 고급스러운 바구니에 담겨 몸값을 자랑했다. 거기에 포장지로 한껏 멋을 부린 빵도 수두룩했다. 빵님들은 깜냥대로 치장하고 손님을 기다렸다.

빵이 아무리 그럴싸해 보여도 내게는 빵일 뿐이었다. ‘빵님’이 될 수 없었고, ‘빵께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빵님으로 격상되었다. 손님들은 질문이 많았다. 궁금한 것도 많고, 자신이 좋아하는 빵에 대해 친절한 설명을 듣고 싶어 했다.

점주에게 빵들은 존중의 대상이었다. 어느 손님이 빵을 썰어 달라고 하면 어김없이 “이 빵은 자르시면 모양이 부서지십니다.”라는 정체불명의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튀어나왔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마치 튀밥 기계에서 튀밥이 팡팡 튀듯 존댓말이 쏟아지는 순간, 내 얼굴에서는 열기와 함께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럴 때면 얼른 뒤돌아서야 했다. 쿡, 터지는 웃음을 삼켜야 하기 때문이다. ‘시’ 자로 대접받는 빵님들을 비웃었다가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어서다. 그럴 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는 게 상책이다. 새겨들었다가는 온종일 빵님들께서 내 귀를 괴롭힐 것이며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겪어야 하기에 그렇다.

얼굴이 화끈해지는 순간은 하루에도 수십 번 일어난다. 어떤 날은 소보로빵님께서 일찍 나가셔서 팔 수 없고, 어떤 날은 크림빵님께서 늦게 나오셔서 팔 수 없다. 찹쌀도넛은 앙금이 들어가신 분이 계신가 하면, 안 들어가신 분도 있다. 금방 나온 빵은 뜨거우셔서 밀봉해 드릴 수 없고, 일찍 나온 빵님은 식으셔서 데워야 하는 분도 있다. 최고로 웃음이 터졌던 날은 생크림 소보로님의 비만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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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빵은 생크림이 너무 많이 들어가셔서 저희가 포장하기도 힘듭니다. 생크림이 덜 들어가시면 맛이 없으셔서 저희가 좀 많이 넣어 드리거든요.”

아아! 이를 어찌하오리까. 나는 그때 귀를 막고 싶었다. 그 순간 아마 생크림 소보로님께서도 점주의 말을 들으며 온몸이 느글거려 생크림을 쏟아 버리고 싶었을 테다. 그런데 정작 더 어이없는 건 그 말을 듣고 있는 손님의 반응이었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아~ 아~ 네.” 추임새를 넣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상황은 뭔가. 나는 잠깐 멍해져서 빵님의 권위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다루기 힘든 빵이 있긴 하다. 크림 종류가 들어간 빵이나 시럽을 바른 빵, 가루를 뿌린 빵을 만질 때는 조심해야 한다. 자칫했다간 순식간에 모양이 망가져 상품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케이크도 마찬가지다. 방심했다간 흠집을 내기 일쑤다. 그러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케이크를 망가뜨리면 아르바이트생은 일당이 날아갈 수도 있다.

점주인들 빵을 사람보다 위 서열에 두고 싶었을까. 서비스업에 종사한 세월이 길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주체와 객체가 뒤바뀐 것이리라. 하늘 같으신 고객님들을 상대하느라 고객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다 높였을 테다. 고객님이 소유한 물건, 고객님이 만진 것들, 고객님에게 전해지는 상품까지 고객님과 더불어 격상되었다. 이젠 고객님이 안고 있는 아가는 물론이고 강아지까지 귀여우시고 예쁘실 지경에 이르렀다. 어디 커피, 빵집뿐이랴. 백화점, 음식점 두루두루 사물 존대의 뿌리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점주는 빵집을 하기 전, 커피전문점 지배인이었다고 했다. 그곳은 빵집보다 훨씬 더 고개가 뻣뻣한 고객님들이 많았다며 진저리를 쳤다. 아마도 종업원들은 미소를 입술에 매달고 살아야 했을 테다. 그것도 모자라 아메리카노도 나오시고, 카페라테도 나오셨을 게 분명하다. 끝도 없이 나오시는 커피님들을 모시기도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렇더라도 빵님이 온종일 나오시고 들어가시고, 없으시고, 팔리시고, 망가지시고, 딱딱해지신다는 말을 듣는 게 나는 불편하다. 만약 점주가 아닌 아르바이트생이 ‘시’ 자를 남발했다면 나는 분명 “○○님, 신발님께서 멋지십니다. 가방님께서 아주 품위가 있으세요.” 하며 면박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어려도 점주는 내게 윗사람이다. 고객님이 사는 식빵님께서 촉촉하시고 부드러우시고 달콤하시고 고소하시다 한들 말릴 수가 없다. 아침에 일찍 나오시는 빵이 있고, 오후에 나오시는 빵이 있다고 해도 대놓고 민망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럴 때 하늘 같으신 고객님께서 딱 한 마디만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거, 빵에 ‘시’ 자 좀 빼고 말합시다! 고귀하신 분들을 먹을 수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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