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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Erika Mar 15. 2023

나는 왜 그토록 이직을 해야만 했을까

대한민국 문과생, 캐나다 직장인으로 살아남기 <5>


이직을 하겠다고 하면 남자친구는 당연히 반색할 줄 알았다. 나는 종종 데이트 중에도 랩탑을 켜고 일을 해야했고 업무 스트레스로 예민하게 굴었다. 그는 가장 가까이서 나의 고생을 지켜보며 마음 아파했고 누구보다 우리 회사 방침을 이해하기 힘들어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가 쌍수 들고 환영할 줄 알았는데, 그는 차분했다.


역시 MBTI 'T'와 'J'성향의(16가지 성격유형 이론 중 '사고형'과 '판단형'을 뜻하는 알파벳) 소유자다운 반응었다. 매사 현실적이고 진중하며 계획적이다. 막상 그가 침착하게 내 눈을 마주치며 '신중하게 생각한 거냐'라고 물어오니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고 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간 쌓여온 데이터로 창조된 나의 우수한 "직감"이 말해주는데!


그는 내 계획(혹은 선언)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충동적인 결정은 아니길 바란다고 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 아니 실은 나에게, 이직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모두가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다)


나는 왜 이직을 해야 하지?




경험상 캐나다에서 커리어 3년 차쯤 지나면 이직을 부추기는(?) 연락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물론 1-2년 차에도 간간히 연락은 오지만 3년 차 정도는 되어야 진짜 유의미한, 고려해 볼 만한 제안을 주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학생 때, 혹은 구직기간에 잠깐 인턴쉽을 했던 회사들에게도 연락이 와서 현 회사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 약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소리이니 좋게 받아들이자. 어차피 선택권은 내게 있다.


1년 차만 지나도 슬슬 달콤한 유혹들이 들려오겠지만, 커리어 초기에는 이직을 해봐야 크게 달라지는 게 없다. 당장은 시급 몇 불도 아쉽게 느껴지겠지만 지나고 보면 신입 때 시급 몇 불 더 받는 게 큰 의미가 없고 오히려 이직하는데 드는 시간, 비용, 에너지가 더 들 수 있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자. 현 회사에서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되면, 섣부른 이직은 되려 커리어를 애매하게 만들 수 있다.


덧붙이면, 이 시리즈 <1>에서 캐나다에선 신입이 A기업(<1>을 참조하길 바란다)으로 가는 것이 반드시 좋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업계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B에서 경력을 잘 쌓은 후 이직을 하면, A기업에서 신입 때부터 근무하면서 오른 연봉이나 처우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제안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근무환경이나 복리후생을 생각해도 B에서 차츰 A로 가는 길이 보편적으로는 낫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아무리 이직률이 높은 북미라고 해도, 그 피곤한 이직 프로세스를 견뎌내는데 한 번 할 때 제대로, 확 몸값을 높여야 의미가 크지 않겠는가. 그러니 처음 커리어를 시작한다면, 그리고 내가 커리어에 욕심이 있다면, 최소 2년 이상은 한 회사에서 진득하게 경력 쌓기에 집중하자. 그리고 말했지만, 이 단계에서 워라밸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커리어를 빨리 잘 쌓으면서 워라밸도 지키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커리어와 워라밸 중 더 좋고 나쁜 건 없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마치 학교에서 수업만 들어서는 중간고사를 잘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성적(= 커리어)에 큰 욕심이 없다면 학교 수업만 듣고도 시험을 봐도 되지만, 성적을 잘 받고 싶다면 방과 후에도 따로 공부를 해야 하듯이 말이다. 워라밸보다 커리어를 택해 초반 몇 년은 고생하더라도, 그 후엔 워라밸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내가 원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곳에서 일할 수 있다. 기억하자. 워라밸은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그간 다양한 곳에서의 꾸준한 연락에도 이직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물론 회사에 대한 의리라거나, 겸손함 따위가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이런 이유도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입사 초엔 정말 이를 악물고 일을 배웠고, 어느 정도 일이 손에 익은 후에는 여태 참은 게 아까워서 이왕 하는 거 더 확실히 제대로 해보자 싶었다. 적어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나중엔 더 나아가 회사가 내게 의지하도록 만들겠다 다짐했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는 시리즈의 앞선 글들을 참고해 주시길 바란다. 하여간 난 매일 저녁에 남아 일을 하며 업무를 익혔고 주말에도 사무실 문을 잠그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누구보다도 친절했고, 일을 빨리, 그리고 많이 배웠으며, 손이 빨라 남들보다 많은 일을 처리했다.


회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나는 회사에서 가장 많은 케이스를 담당했다. 유독 중요하고 급한 건들이 내게 맡겨지기 시작했다. 힘들고 부담스러웠지만 회사가 나를 신임하고 내게 의지하는 것이 느껴져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점차 커리어의 성장에서 한계를 감하고 있었다. 회사가 주력하고 있는 사업 분야는 너무 좁고 한 곳으로 치중되어 있어서 회사 내에서는 새로운 커리어를 쌓을만한 소스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익숙한 일들을 매일 어렵지 않게 해내고 있었지만, 동시에 위기감도 느껴졌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회사의 전적인 신임을 얻은 이후로는 이전과 같은 마이크로 매니징은 눈에 띄게 줄었지만, 회사의 기업 관리/경영 방향에는 갈수록 점차 동의하기가 힘들어졌다. 회사와 몇 차례 미팅을 했지만,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입사 초부터 문제였던 매니저는 내가 일을 잘하게 되자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 (심지어 내게는 이따금 잘해주기 시작했다). 대신 새 직원들을 괴롭혔다. 솔직히 처음에는 '나만 안 건드리면 괜찮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녀는 자주 직원들 사이를 이간질했다. 왜곡해서 말을 전달하거나, 아예 없는 말을 지어내기도 했다. 일처리 또한 문제 투성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녀가 회사 오너의 최측근이라, 피드백도 먹히지 않고 회사에서도 물러날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신임하는 그곳을, 나는 자랑스러워하고 있나? 분명 Yes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나만 잘하면 된다고,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며 그간 외면해 온 수많은 문제들을 떠올리자, 스스로가 비겁하게 느껴졌다. 혹은 머리가 크니 이제야 그 모든 걸 문제로 인식하는 걸지도 몰랐다. 이 작은 곳에서 인정 좀 받는 게 뭐 대단한 일이었을까. 마치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로켓단의 나옹(혹은 마자용) 된 기분이었다. 나옹은 로켓단에겐 충성심 높은 최고의 포켓몬이지만, 로켓단은 수십 년이 지나도 만년 허술한 빌런이다.


내가 열심히 노를 저으며 타고 있는 배가, 내가 생각한 방향에서 한참이나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배는 겉에선 문제가 없지만, 내부 상태는 심각하고 위태로웠다. 그나마도 나는 가장 수혜를 입는 축에 속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나머지 직원들이 받은 처우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그 와중에 직원들 사이엔 '에리카가 기준을 높여놔서 고생한다'라는 이야기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오갔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나는 회사에 나쁜 문화를 만든 주범이었다.


그때쯤 내 이메일 수신함은 각종 회사들과 리쿠르터들의 연락으로 가득했다. 과장이 아니라, 많을 땐 적어도 2-4군데에서 매일 연락이 왔다. 그전까지는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이제는 그들의 메시지를 하나하나 자세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들이 원하는 업무 내용과 스킬은 내겐 일상적인 것들이었고, 해 온 업무양으로는 어디에서건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직을 한다면 실제 내 경력보다 더 많은 경력을 찾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전 직원 개인면담이 있을 것이라는 회사의 공지가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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