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져 있는 것처럼, 북미 고용시장은 한국보다 유연하다. 비교적 고용인들의 입사/퇴사도 쉽고, 고용주들의 해고도 쉽다. 물론 정해진 법규가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직장을 자유롭게 옮겨 다닌다는 느낌이 있다. 한국처럼 기업이 대규모 공채를 하는 경우가 없고 (한국도 많이 없어졌다고 한다) 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지원자들이 다 같이 기업이 만든 시험을 보는 경우도 없다. 필요할 때 수시로 채용을 하며, 시험이 아닌 면접 위주다.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을 파악하려고 하는 문화가 강하기 때문에, 북미에서 취업은 사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관건이다.
재밌는 사실은 직원 채용을 외부에 공지하기 전에 기업 내부에서 먼저 추천을 받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북미는 완전히 (대놓고) 인맥 사회다. 학생 때부터 그놈의 "네트워킹"에 죽어라 목을 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뜻 매우 불공정해 보이지만 북미에서 누군가의 "추천"은 그 사람을 파악하는 가장 좋은 레퍼런스로 여긴다. 회사에서 필요한 포지션이 생겼을 때 내부 직원이 "내가 아는 괜찮은 애가 있는데..." 하고 소개를 시키고 인터뷰를 해서 포지션을 채우는 일은 너무 흔하다. 채용 과정 막바지에도 항상 "Reference check"가 있다. 지원자를 아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서 이 사람이 어떤지, 같이 일 할 만한 사람인지를 확인받는 것이다. 학교 성적표나 공인된 자격증, 시험 결과표 10장 보다 옛 동료의 말 한마디가 더 파워가 있다.
이직이 자유로운 분위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잦은 이직 히스토리는 캐나다에서도 당연히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 납득시킬 이유를 잘 얘기할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큰 이유 없이 몇 개월마다 회사를 옮겨 다녔다고 하면 당연히 별로 끈기가 없는 사람이란 느낌을 준다. 혹은 잦은 문제를 일으킨다고 의심할 수도 있다. 적절하다고 정해진 재직 기간은 없지만, 보통 한 회사에 2-3년 이상 근무를 하면 무난한 편이다. 특히 커리어 초반일수록 한 곳에서 오래 일한 경력이 있다면 좋은 인상을 줄 확률이 높다. 신입사원이 본격적으로 회사에 기여를 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데, 짧은 커리어에잦은 이직이력이 좋아 보일리 없다.물론얼마나 오래 일했냐 보단 실제로 해 온 일과 할 줄 아는 일이 더 중요한 건 당연지사. 아무리 오랜 기간재직했어도 할 줄 아는 게 없으면 그냥 시간만 때운 사람이다.
이직은 언제 준비해야 하느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현 회사에서 더 이상 발전이 없고 앞으로도 딱히 없을 것 같을 때"라고 대답하겠지만, 사실 이직의 기운은 정말 어느 날 갑자기, 신의 계시처럼 내려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느 때보다 바쁜 해를 보내고 있었다. 입사한 첫 해 보다 다음 해가 바빴고, 그다음 해는 더 바빴다. 계속되는 야근, 끝이 보이지 않는 일정에 온 직원들이 단체로 말을 잃어갈 만큼 지쳐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보너스는 가장 바빴던 해에 가장 적게 나왔으니 힘이 빠질 수밖에. 과도한 업무와 가중되는 책임감으로 심신이 말도 못 하게 지쳤지만, 그래도 이직을 생각하진 않았다. 아니 감히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날은 (일 년 중 몇 없는) 평화로운 날이었다. 평소처럼 모니터를 보며 일을 하는데 문득, 정말 너무나도 갑자기, 정말 '그냥' 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을만큼 문득, '아,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이상하고 뜬금없던 순간이라 기억이 생생하다. 내 마음은 몹시 평온한 상태였고 하던 업무들도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화창한 여름날, 그 어느 때보다 괜찮은 날이었다. 그런데 마치 입력된 다음 행동 코드를 실행시키는 로봇처럼, 나는 일체 감정의 동요 없이 무척이나 덤덤하게 이직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남자친구에게 말했다.
"나, 이직을 할까 해."
"신중하게 생각한 거야?"
그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간 내 회사 생활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봐 주며 응원해 주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 네가 원한다면. 확정되기 전까진 회사 포함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생각보다 오래 걸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