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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점심 똑같은 비빔밥을 시키는 코리안 비빔밥 레이디

by 에리카

싱가포르는 거의 모든 MRT 역에 쇼핑몰이 이어져 있어 더운 날씨에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실내에서 편리하게 쇼핑도 하고 식사도 해결할 수 있다. 나의 첫 오피스는 MRT 시티홀 역에서 걸어서 7분 정도의 거리였는데, 시티홀 역과 연결된 쇼핑몰인 래플스 시티 Raffles City는 규모도 상당히 크고 교통 요지에 위치해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01. Raffles City Shopping Center_02 복사본.JPG 래플스 시티 쇼핑몰 © 에리카

주변에는 내셔널 갤러리, 래플스 호텔, 예쁜 레스토랑과 펍이 모여있는 차임스 Chijmes 등 유명 관광 스폿들이 있는 곳이라 관광객 반, 주변의 직장인 반이 섞여 있는 이 쇼핑몰은 그만큼 식당의 종류도 다양하다. 지하에는 시원한 실내분수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슈퍼마켓을 비롯해 다양한 간식거리들을 판매하는 숍, 베트남 레스토랑, 델리와 베이커리를 판매하는 카페 등이 입점해있다.


3층에는 래플스 시티의 푸드코트인 푸드 플레이스 Food Place가 있는데, 한 끼당 저렴하면 3불에서 비싸도 13불 정도의 가격으로(한화 2,600원~12,000원 정도) 부담 없이 식사를 해결할 수 있어 현지인과 배낭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나는 입사 후 초반에는 동료들과 함께 회사 근처의 로컬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지만 덥고 습한 동남아 기후의 영향으로 기름에 볶고 튀기고, 강한 양념을 많이 사용하는 현지 음식이 도통 입맛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식사를 계속하다가는 한순간에 살이 훅 찔 수도 있겠다란 느낌에 되도록이면 건강한 음식을 찾아먹으려고 노력했다. (현지인들 중에 피부 트러블이 심하거나 비만인 경우를 꽤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런 식습관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차 퀘이 테오.jpg 맛있지만 가끔씩만 먹으려고 했던 볶음 국수, 차 퀘이 테오 www.elmundoeats.com

직접 도시락을 싸 갈 수도 있지만 혼자 먹을 분량을 요리하기에는 재료를 사는 편이 더 비싸기도 하고, 더운 날씨에 요리를 하기가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점심 한 끼는 그냥 간단하게 사 먹기로 했는데 조미료를 많이 쓰고 기름에 볶거나 튀기지 않은 신선한 요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고, 채소를 먹으려고 하면 샐러드나 샌드위치가 가장 만만한 메뉴였다. 그렇지만 샐러드 하나에 기본이 10불, 내가 좋아하는 토핑을 몇 개만 추가해도 16불 정도(14,000원 정도)가 나오니 매일 한 끼에 그 정도 비용을 지출하는 것이 아깝게 느껴졌다. (물론 저렴한 샐러드 가게도 있지만 싱가포르의 보통 물가 수준)

한국음식.JPG 내 사랑 한식 식당 © 에리카

그러다 어느 날, 3층의 푸드코트의 한국음식점을 발견하고 고추장만 맛있으면 어느 정도는 맛이 보장이 되는 가장 무난한 메뉴인 비빔밥을 주문했다. (간혹 한국인이 아닌 주인이 운영하는 가게는 무늬만 한국음식인 곳이 많다) 게다가 마침 런치 프로모션으로 6불에 판매하고 있어 맛에 실패해도 괜찮겠지 싶었다. 나 말고도 현지인들이 줄을 길게 서서 주문을 하고 있는 걸 보니 꽤 인기가 많은 가게인 것 같았다. 계산을 하고 자리에 앉아 잠깐 기다리니 금세 직원이 경쾌하게 “Beef Bibimbap!”이라고 외치며 내가 시킨 비빔밥을 내밀었다.

비빔밥.JPG 사진은 치킨 비빔밥. 싱가포르에서 6불에 이 정도 식사라면 훌륭한 수준이란 걸 감안해주시길! © 에리카

그런데 아니 이게 웬일. 6불짜리 비빔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했다! 흔히 푸드코트에서 볼 수 있는 이름만 비빔밥이라 나를 분노케(?)했던 음식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정말 제대로 된 비빔밥이었다. 신선한 채소가 풍성하게 올라가 있는 데다 나름 고기 고명도 빵빵한 감동의 식사였다. 탄수화물, 채소, 단백질이 골고루 들어간 최고의 한 끼였다. 그리고 가격도 6불이라니… 나는 그날부터 이 푸드코트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것도 무조건 비빔밥만 시키는 (웃음).


뭐 하나에 꽂히면 질릴 때까지 파는 성향인 나는 음식도 좋아하는 게 있으면 매일매일 먹는 스타일이다. 그게 심하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계속 먹을 때도 있는데, 이 비빔밥도 그랬다. 매일같이 점심시간이면 나타나 주야장천 비빔밥을 시키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직원이 나를 알아보고는 웃으면서 “비빔밥 아 Bibimbap Ah?”(싱글리시는 질문을 할 때 끝에 아?를 붙인다) 하고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한 달이 되어가자 바쁜 점심시간이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나에게는 한 마디씩 말을 걸곤 했는데 처음엔 한국사람인지, 왜 비빔밥만 먹는지 묻기도 하고, 더 자주 보게 되자 비빔밥 레이디라고 장난도 치고, 오늘은 다른 메뉴도 좀 먹어보라며 추천을 하기도 했다.


한 달을 매일 점심을 비빔밥으로 먹다 보니 조금씩 질리기 시작해 가끔은 다른 메뉴도 시키고, 다른 가게의 음식들도 먹어보곤 했는데 역시나 한식만큼 속이 든든하면서 한 끼에 다양한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이 잘 없었다. 그래서 또 결국엔 비빔밥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나는 그 가게의 코리안 비빔밥 레이디가 되었다.


PS. 작업한 가이드북 <리얼 싱가포르>에서도 애정을 담아 이 식당을 추천했다. ;)

혹시 여행을 하다 간단하게 한식을 먹고 싶어졌다면 한번쯤 가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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