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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Sep 23. 2020

34살인데 번듯하게 이뤄놓은 게 뭐가 있니?

아무리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딸을 믿어주려고 노력하시는 저희 부모님이라도 불안하고 힘드실 때가 많을 거예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도 역시 가장 믿어주길 바라는 상대에게서 듣는 이런 이야기는 역시나 마음이 아파요.


일본어 공부하겠다고 휴학하고는  혼자 짐 싸들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쿄로 떠나질 않나, 다들 취업 준비할 때는 혼자 방콕에 여행을 갔다 오더니 싱가포르에 취업이 됐다고 또 훌쩍 떠나고, 또 이젠 네덜란드에 가겠다며 워홀 비자를 받더니 (이땐 저도 만 30살이라 많이 불안해져서 포기하고 다시 싱가포르로 갔지만요) 이젠 또 34살에 결혼은 안 하고 캐나다로 MBA를 가겠다며 그놈의 비자 준비로 바쁘니 말이에요.


오늘 아침에 식사를 하는데 엄마가 물으셨어요.

캐나다는 싱가포르나 일본과 달라서 적응하고 취업하는 게 어려울 텐데 어떤 계획이 있는지, 졸업하고 나면 36살이라 아마도 네가 가장 나이가 많을 텐데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가는거냐고.


'엄마 말에 의하면' 친구 딸들은 다들 어쩜 그렇게 시집도 잘 갔는지(즉 부잣집에 가서 편하게 살며 엄마에게 명품백도 턱턱 사주고), 다들 사업도 잘해서 돈도 잘 벌고 '자리를 잡아'가는데 저는 이거 했다 저거 했다 뭐 하나 꾸준하게 하는 게 없대요. 34살이면 직장에서 그럴싸한 직급도 달고 안정적으로 경력을 쌓았을 나이인데 저는 그렇지 못하니까요. 엄마가 말하는 그 무언가 이루어 놓은 것에 해당될만한 건 딱히 없어요.

돈도 그다지 모으지 못했고 (그나마 있는 돈도 곧 학교에 들어갈 테고...) 결혼도 아직, 몇 년 차 xx라는 타이틀도 없으니까요.

게다가 어찌 됐건 한국에선 살기 싫다며 자꾸 나갈 궁리만 하고 있으니 부모님 눈에는 걱정스러워 보이겠지요.


그런데 저 말이 마음을 후벼 파는 건 저런 질문과 불안은 나 자신이 가장 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에요. 정말 날씬한 사람에겐 돼지라는 농담이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말이지만, 외모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이잖아요.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불안을 느끼는 부분을 타인이 건드렸을 때 사람들은 예민하게 반응하곤 해요. 거긴 진짜 아픈 부위니까.


나라고 왜 불안하지 않겠어요.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건지, 혹시 내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건 아닌지... 수도 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한 문제지만 결국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어차피 어디선가 탈이 난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똑같은 실수는 하지 않기로 나와 약속한 거예요. 가능한 옆을 보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발 한 발 걸어가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 가끔씩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흔들려요. 그리고 내가 초라하게 느껴져요.


자기반성과 자기혐오는 한 끗 차이더라고요.

나의 단점, 내가 지금까지 실수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반성하고 개선해서 더 나은 내가 되는 거름이 될 수도 있지만 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대체 나라는 인간은 왜 이럴까'라는 자기혐오로 빠지기 십상이에요. 저는 자존감이 높지 않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편이라 의식적으로 나 자신을 우쭈쭈 해주고 잘하고 있다고 해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더라고요. 자기비판/검열이 디폴트인 사람이니까.


엄마와의 저 대화가 끝나고 나서 아침 내내 기분이 최악이었어요.

저 대화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런 문제없는 사람이었는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순간 나는 철없고, 계획 없이 사는  34살의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1인이 되어있었어요.

하지만 곧 다시 질문을 하기 시작했죠.


'내가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사람인가?'


그렇게 질문을 하니 나 자신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왜 스스로를 그렇게 내치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고, 혼내고, 너는 충분하지 않아라고 혼내는 거 지금까지 충분히 했잖아라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러다 나는 건강하고, 아직 젊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믿고, 이만하면 성실하고...라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어요. 완벽하진 않아도 영어, 일본어로 일도 하고 어디 가서도 적응 잘 하고 사람들과 잘 지내는 성격이니 나 하나 못 먹여 살리겠어라며. 언제나 그래 왔듯 어떻게든 일은 잘 풀릴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어요.  앞으로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런 불안한 시기일수록 나 자신을 믿어줘야 한다고 말이죠. 제 글에 용기를 얻은 자매님들이 많은 것처럼 스스로에게도 계속해서 들려줘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나를 믿어주지 않는데 누가 나를 믿어주겠어요.

또한 그동안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어디서든 난 잘 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를 믿게   단단한 마음이야말로 '번듯하게 이뤄놓은 '이란 것도 잊지 않기로요.


네, 저 번듯하게 이룬 것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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