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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기자 Jan 20. 2019

드라마로 연애 배운 여자

  그녀는 오늘도 퇴근 후 목욕 재개를 하고 TV 앞에 앉았다. 드라마 속 그를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그의 얼굴부터 옷입는 스타일, 외모는 물론 목소리도 마음에 든다. 드라마 속 그 남자는 늘 실망시키는 경우가 없다. 매번 풀메이크업을 하지 않아도 되고 혹시나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고, 뚱뚱해서 싫어할까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오늘도 TV 속 여주인공이 내가 된 양, 그의 매력에 빠져든다.

 

 드라마 속 인연은 대체로 우연에서 시작된다. 어떤 사고의 피의자와 피해자로 만나기도 하고, 예기치 않은 경우로 갑자기 하룻밤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알고보니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반드시 엮인다.

 

 이들은 아주 처음엔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서로에게 빠져들기 시작한다. 무례하게 빰을 때려도 '나한테 이렇게 대하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었어'라며 되려 호감을 표시하고, 오해로 시작됐어도 처음에는 극도로 싫었던 점 때문에 좋아지기도 한다. 또한 현실에서는 구경 한번 할 수 없는 재벌들과도 어찌나들 자주 마주치는지. 드라마 속 남주들은 언제나 실장님, 대표님, 이사님이시다. '멋진애' 옆에 또다른 '멋진애'는 늘 평범한 여주인공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그녀는 때론 삼각관계의 주인공이 자신인양 행복한 고민에 빠질 때도 있었다.


 물론 현실은 드라마와는 다르다. 멋진 남자들이 많이 다닌다는 건물에서 손수건을 떨어뜨려도 아무도 주워주면서 말을 걸지 않고, 주말마다 KTX 티켓을 한장 끊고 타도 매번 옆에는 아기와 함께 탄 아줌마나 코를 드르렁 고는 아저씨만 당첨된다. 드라마같은 인연을 기다리며 비행기 옆자리도 기대해봤건만, 국적만 달랐지 혼자 여행 떠나는 여자들과 '예기치 않은' 국제적 우정만 돈독해지기 일쑤다.  

 

 하지만 차다 못해 냉골같은 현실을 버티기 위해서는 당의정같은 드라마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래서 그녀는 혼자서 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는 나만의 비밀스런 연인이랄까. 언젠가 드라마에서 겉은 까칠하지만 속은 따뜻한 '까도남'(까칠한 도시 남자)들이 득실댈 때, 그녀는 까칠하게 하는 남자들이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언젠가 고백을 할 것이라는 헛된 '꿈'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다.  

 

 드라마속 '그 남자'는 대부분 츤데레 스타일이다. 온종일 까칠하다가도 어느 순간 여주인공이 위급한 순간에 나타나 구해주거나 한없이 외로운 결정적인 순간에 따뜻한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그들은 원래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하나같이 부모의 문제로 비뚤어져 하나같이 내면의 상처로 까칠해진 경우가 많았고, 여주인공이 그 상처를 치유해주었다. 그녀도 멋진 까도남들의 상처를 싸매줄 자신은 있었지만 현실에서 한번 까칠한 남자는 끝까지 까칠했다. 한번 예의가 없는 남자가 갑자기 개과천선하는 일이란 매우 드물었다.

  

 그래도, 어떤가. 내가 직접 만나는 것도 아닌데. 드라마로 보기에는 '까도남'이 제격이다. 그렇게 된 첫 원인 제공자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현빈이었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그가 피아노를 쳤을 때만해도 '그려려니...'했던 그녀는 번쩍번쩍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현빈(김주원 역)이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라고 말할 때 그의 목소리에 빠져들었고, 윗몸 일으키기를 하며 여주인공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길라임씨는 몇살부터 그렇게 예뻤나"라고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 마음이 흔들렸다. '만추'에서 갈색 롱코트를 입은 현빈과 탕웨이와의 분위기 있는 키스신은 어찌나 길게 여운이 남는지 몇번을 돌려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잊을만 하면 나타자는 누군가처럼  다시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게임회사 대표님으로 찾아온 그에게 다시 푹 빠졌다. 멋진 검정 수트를 입고 걸어오는 그의 모습, 액션을 펼치는 그의 기럭지에 다시한번 마음이 설렌다.

 

 드라마 속 그와의 헤어짐은 마음은 아프지만, 쿨하게 이별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몇날 며칠, 아니 길게는 몇년도 사랑의 상처가 아물지 않지만, 드라마는 꼭 그렇지 않다. 또다른 누군가가 나타나 나의 텅빈 마음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까도남'이 가면 어느새 우유처럼 부드럽지만, 때로는 남성적인 매력으로 어필하는 연하남들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는 이훤(김수현)이 저음톤으로 “좋소. 중전을 위해 내가 옷고름 한번 풀지.”라고 말할때는 '꺄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고, '상속자들'에서 은상(박신혜)에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구애하던 김탄(이민호)이 "집을 나가라. 나가지 않을꺼면 나를 좋아하라"는 말에 마치 내가 고백을 받은 양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응답하라 1988'에서 한참 귀여운 막내 동생으로만 보이던 택(박보검)이 덕선(혜리)에게 저인 키스신을 퍼부었을 때는 온몸에 전기가 찌릿찌릿했다.

  

 연하남에 시들해지자, 드라마속 주인공은 초능력을 장착한 채 마음을 흔들었다. '도깨비'에서 공유와 이동욱이 롱코트를 휘날라며 걸어나오는 투샷을 볼때 그녀는 이미 마음을 빼앗겼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도깨비 공유가 나즈막한 목소리로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는 멘트를 그녀의 외로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줬다. 요즘 그녀는 '남자친구'에서 조건을 떠나 순수한 사랑을 나누는 차수현(송혜교)과 김진혁(박보검)의 러브스토리를 꼭 챙겨본다. 비현실적인 동화 같은 이야기일지라도...

 

 누군가는 그녀에게 "그렇게 허구 속에 빠져있으니까 현실에서 좀처럼 남자를 못 만나지.. 그만 꿈에서 빠져나와"라며 혀를 끌끌 찰 지도 모른다. 그녀도 대부분의 드라마 작가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원하는 현실에는 없는 '허구의 남자'들을 그려놓은 것도 안다. 가끔 일 때문에 만난 배우들이 드라마 속 캐릭터와는 전혀 다를 때 실망한 적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녀가 드라마에 늘 빠져드는 이유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조건없는 로맨스,  어떤 역경과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사랑을 지켜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점점 사람과의 신의를 우습게 여기고 사랑하는 사이에서도 배신이 횡행하는 시대. 사람 보다 돈이 우선인 물질 만능 사회 속에서 그녀도 언젠가는 가슴뛰는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그녀도 드라마를 보면서 슬퍼질 때가 있다. 현실에서는 그런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 존재할 것 같지 않는 허구 속 캐릭터에서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자신을 느낄 때, 왠지 나만 그런 상대를 못찾을 것 같다는 무기력감이 들 때가 그렇다.

 

 그래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꼭 서로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아름다운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라마를 통해 확인하고, 믿고 싶다. 이 팍팍한 세상 속에서 꼭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아끼고 믿는 그런 진심이 통한다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만일 기회가 된다면, 팍팍한 현실 속에서 서로의 외적인 요인이 아닌 아름다운 내면을 볼 수 있는 사랑, 서로의 마음을 누일수 있는 그런 진실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 바로 그것이 오늘도 그녀가 드라마 속 '그'를 만나러 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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