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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기자 Jul 13. 2019

'봄밤', 밋밋한데 뜬 몇가지 결정적 이유

왜 떴을까 연구소 <2> 드라마 '봄밤'

 당신이 그동안 수십번, 아니 수백번도 더 본 스토리. 남녀의 삼각 관계 이야기. 일차적으로 보면 드라마 '봄밤'은 뻔한 삼각 관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처음에 '뻔하다'며 접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자칫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무맛'처럼 밋밋해보이는 이 작품은 중반부터 입소문을 타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로 막을 내렸다.


 혹자는 '환승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하게도 들어놓는다며 불만스러워할 수도 있다. 맞다. '봄밤'은 요즘 말로 '환승 이별'에 관한 드라마다. 연애중에 다른 상대로 갈아탄다는 뜻의 환승 이별. 사실 '환승 이별'의 주인공은 남녀를 불문하고 화살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정황상 '양다리'를 의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도서관 사서로 평안하게 지내온 정인(한지민)은 오래 사귀던 애인 기석과의 관계에 염증을 느끼고 이별을 선언했고 (마치 드라마처럼!) 약사 유지호(정해인)가 그녀 앞에 우연히 만나 삶을 뒤흔든다. 때로는 두 남자의 애정 공세를 받으며 마치 저울질을 하는 것 같은 그녀가 얄미워보이기도 한다. 남성의 입장에서는 쏠랑 이별 통보를 하고 떠난 그녀가 야속해보일 수도 있다. 그녀의 오랜 연인 기석(김준한)이 한동안 그랬던 것처럼.

 

 이처럼 여주인공이 자칫 '민폐녀'로 전락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감독의 연출력은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랑과 인생에 대한 가치관을 밀도있게 그려낸다. '봄밤'을 연출한 안판석 감독은 전작인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밀회' 등의 로맨스물에도 일가견이 있지만 그에 앞서 풍자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의학드라마 '하얀거탑', 다큐멘터리 '세계의 끝'처럼 리얼리티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만큼 리얼리티를 잘 살리는 감독은 ‘봄밤’ 역시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로맨스로 그려냈다.
 
 1. '순수한 사랑'의 떨림을 정공법으로 승부

  '사랑의 떨림'과 '설렘'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갖고 싶어하고 추구하는 감성이다. '봄밤'은 바로 사랑의 떨림과 설레임의 감정 자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반적으로 여백이 많은 편이고 때로는 대사보다 BGM이 대신 나와 불편하게 느낄수도 있지만, 하지만 또 그 지점 때문에 관객들이 개입할 여지가 더 많기도 하다.

  '봄밤'은 감독의 전작 '밥누나'와 같은 작가에 남자 주인공 정해인도 같을 뿐 아니라, '안판석 사단'인 조연 배우들의 얼굴의 면면도 많이 겹친다. 때문이 전작의 그늘에 갇힐 수도 있었지만, '봄밤'은 자기만의 색깔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MSG없는 담백한 맛, 밋밋해도 자극적이지 않지만 재료의 맛으로 승부하는 음식처럼 '봄밤'은 사랑이라는 순수한 감정을 정공법으로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갈수록 의미가 퇴색하는 순수하고 따뜻한 사랑에 대한 판타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요즘처럼 남녀 간 계산적인 사랑이 판이 칠수록 조건을 넘어선 주인공들의 순수한 사랑은 점더 현실에는 없는 판타지로 다가온다. 밋밋하지만 '봄밤'이 소구하는 것도 바로 담백한 사랑, 순정이다. 드라마는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가정 폭력으로 얼룩진 정인 언니의 이혼을 통해 결혼의 진정한 필요조건은 다른 무엇도 아닌 순도 100%의 사랑임을 에둘러 이야기한다.

 

2.여주인공의 주체성에 대한 선택
 '봄밤'은 사회적으로 보면 기존의 결혼제도와 사회 인식 속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정인의 아버지는 결혼 적령기가 된 딸에게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있는 조건 좋은 남자를 잡아 시집을 갈 것을 종용한다. 드라마는 정인의 아버지를 통해서 여성의 결혼에 대한 사회적인 통념을 이야기한다.

 

 전작인 '밥누나'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거기서는 진아(손예진)의 '엄마'가 하던 악역을 이번에는 정인의 아버지가 맡았을 뿐이다. 심지어 정인의 엄마는 자식의 행복 보다 자신의 체면을 중시하는 남편과 이혼까지 생각한다. 드라마는 정인의 아버지를 통해서 여성의 결혼에 대한 사회적인 통념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정인은 이같은 상황을 정면 돌파한다. 그는 더이상 사랑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기로 결심하고, '현재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에 시선을 고정한다. 관습적인 성향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자신의 명확한 사랑관을 정립해 나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봄밤'은 한 여자가 사랑의 주체가 되기 위한 '투쟁'을 그리고 있다. '현실이냐 이상이냐', '조건이냐 사랑이냐'는 수없이 다뤄져온 소재지만, 이 작품은 진부한 소재를 나름 이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냈다. 시청자들은 그녀의 선택을 응원 반, 호기심 반으로 쫓아가게 된 것이다.
 
 3. 들키나 안들키나 조마조마 '로맨스릴러'
  극중 미혼부인 유지호는 사회적인 시선으로 봤을때 정인의 입장에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이것이 바로 권기석이 이정인이 유지호에게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석에게 머물러있을수만도 없다. 정인의 오래된 연인 기석은 두 사람의 관계를 관성적인 사이로 인식한다. 더 이상의 떨림이 없는 기석과의 관계. 거기에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기석네 아버지의 행동을 보면서 정인은 점차 결혼에 대한 마음이 식어간다.


  기석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지호와의 마음을 키워가는 정인. 하지만 기석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자신들의 사랑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그들의 아슬아슬한 사랑은 보는 사람도 가슴졸이게 만든다. 감독은 마치 관찰 카메라처럼, 때로는 다큐멘터리처럼 그런 그들의 관계를 조용히 좇아간다. 시청자들은 정인과 지호의 관계가 들키게 될까봐 숨죽여 그들을 바라본다.

  

항간에서 '봄밤'을 로맨스릴러라고 이야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시청률도 그런 아슬아슬함을 타고 올라갔다. 유지호와 이정인이 관계가 주변에 하나둘 공개될수록 갈등이 높아지고 시청률도 상승 곡선을 그렸다. 감독은 가족, 친구 등에게 둘의 관계가 알려지는 과정을 하나씩 공개하며 이들의 관계와 감정 변화를 세밀하게 잡아낸다. 감독은 종영 1주 전에 결국 정인이 가장 알리기 어려운 부모님에게 지호의 입장을 공개하면서 극적 긴장감을 끝까지 가져가는 데 성공했다.


4.정해인의 재발견
 이 작품은 정해인에게도 '인생작'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남자 배우에게 미혼부 연기는 쉽지 않는 도전이다. 가슴 절절한 부성애를 표현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결혼하지 않은 톱스타들이 아빠 역할을 맡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정해인은 인기 정점에 새로운 도전을 했고, 연기 폭을 넓히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중 유지호는 '미혼부'라는 입장 때문에 사랑에 주저하고 자신감이 없지만, 정인에게 '언제든 오기만 해라. 기다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성숙한 모습을 보이거나 자신의 조건을 무시하는 기석에게 '나에게 아이는 자존심같은 존재'라며 당당한 아이 아버지의 모습을 보인다. 흔히들 남자 톱스타들이 선호하는 철없는 재벌 2세, 실장님 역할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의 깊이를 표현했다. 그는 전작인 '밥 잘사주는 예쁜 누나'에서는 다소 철없고 귀여운 연하님을 연기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부성애로 깊어진 감정 폭을 연기했다.

 

 5.안판석 사단의 전작을 잊게 하는 생활 연기력

  이 드라마는 안판석 감독의 전작 ‘밥누나’와 출연진이 상당 부분 겹친다. 일단 남자주인공이 정해인으로 같고 '밥누나'에서 손예진의 엄마 역할을 맡았던 길해연은 ‘봄밤’에서 한지민의 엄마로 출연했다. 길해연은 ‘세계의 끝’, ‘풍문으로 들었소’ 등 안감독의 연출작에 출연한 바 있다. 김준한의 아버지 역의 김창완도 ‘세계의 끝’, ‘밀회’ 등에 출연한 안판석 사단이다. ‘밥누나’에서 손예진의 아버지 역으로 나왔던 연극배우 오민석은 ‘봄밤’에서는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로 출연한다. 또한 ‘밥누나’에서 손예진의 직장 동료였던 주민경은 ‘봄밤’에서 한지민의 동생이 됐고, 손예진의 상사였던 서정연은 ‘봄밤’에서 정해인의 동료 약사로 분했다.

 

 '봄밤'은 주인공 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캐릭터를 통해 보통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를 한다.  가정 폭력으로 이혼을 앞둔 언니를 위로하기 위해 정인, 서인, 재인 등 세자매가 자기일처럼 슬퍼하고 위로하는 장면은 여성들의 연대를, 이정인과 유지호의 엄마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한다듯 아무말 없이 서로의 손을 잡는 장면은 모진 세월을 견뎌온 어머니들의 마음을 대사 한마디 없이 절절하게 전달한다.

 부모 세대들의 고민 또한 담겨있다. 정인의 엄마는 아나운서인 첫째 딸 서인이 이혼해 싱글맘이 될 상황을 앞두고 있는데 둘째 정인이 싱글대디와 결혼을 하겠다고 나서 고민에 휩싸인다. 어찌보면 운명의 장난같지만, 엄마는 '역지사지'를 통해 타인에 대한 이해로 모두를 포용한다. 그녀는 아직도 욕심을 놓지 않는 남편에게 "자식은 기대만큼 실망을 주는 존재인 것 같다. 부담을 주지 않고 지켜보는 부모가 되자"고 말한다.

 

 ‘안판석 사단’은 전작을 잊게 할만큼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 연기력을 인정하게 했다. 길해연, 오민석, 서정연 등 모두 연극판을 주름잡던 베테랑 배우들이다. 한때 ‘밥누나 시즌2’라고 까지 불렸던 봄밤이 자기만의 색깔을 갖게 된 것은 어찌보면 이 배우들의 연기력 덕분인지도 모른다.


 결정적으로 '봄밤'이 밋밋한데 뜬 이유는 2019년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등의 고민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면서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그리고 있기 때문 아닐까. 그렇게  드라마는 '봄밤'처럼 우리에게 서서히 스며들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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