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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기자 Apr 24. 2021

무해와 무맛 사이, 그 어디쯤 <비와 당신의 이야기>

"이건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다"


 스포 아닌 스포를 하나 하자면, 이 대사는 이 영화의 처음과 끝에 한번씩 등장한다. 강하늘의 달큰한 목소리로 전해지는 '기다림'이란 단어는 마치 주관식 문답처럼 이 영화의 성격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말이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지난한 하루하루를 참고 버틴다. 잡히지 않는 성공을 기다리며 매일을 인내하고, 새로운 사랑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슴 설레고, 헤어진 연인이 다시 돌아올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무채색인 하루하루를 채워간다.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의 주인공 영호(강하늘)는 초등학교때 첫사랑을 다시 찾는 설렘으로 일상의 권태로움을 극복한다. 그가 갑자기 왜 첫사랑이 떠올랐고, 그토록 찾아 헤매는지에 대해서는 잘 설명되지 않지만, 앞보이지 않는 삼수생 생활을 버티게 해준 한줄기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해두자. 그렇게 영호는 팍팍하기만 한 현실 속에서 자신만의 희망찾기에 나선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매우 아날로그적이다. 가로본능 휴대폰이 나오던 2003년이 시대적 배경이기도 하지만, 영호는 소연에게 손편지를 보내고, 우체부 아저씨에게 편지가 잘 전달되기를 신신당부하는 순수하지만 답답한 구석도 있는 남자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전한 편지는 첫사랑의 소연의 동생 소희에게 전해진다. 아픈 언니를 대신해 편지를 받은 소희(천우희)는 언니 대신 답장을 하고 둘은 12월 31일 비가 오면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기다림을 시작한다.

 

 어쩌면 청춘, 아니 인생은 안개처럼 앞이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무언가를 신기루처럼 쫓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랑과 직장, 언제 이루게될지 모르는 결혼과 내집마련의 꿈을 무작정 쫓기만 하면서 또 하루를 산다. 우리는 그렇게 불확실한 청춘을 지나왔고, 그렇게 또 어른이 되어간다.

 

 사실 영화 속 영호가 이해가 선뜻 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옆에서 사랑을 저돌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수진(강소라)를 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옛사랑에 빠져있는 그의 모습이. 하지만. 그런 아날로그적이고 순정적인 영호의 모습은 이 영화의 전체적인 색깔을 표현하는 캐릭터다. 그래서 영호의 서사가 좀더 입체적으로 쌓아올려졌으면 더 좋았겠다는 바람은 있다. 배우 강하늘의 연기로 어느정도 흡인력을 갖췄지만, 서사의 부재는 캐릭터와 나아가 영화 전체의 근간을 흔들기 때문에 아쉬운 대목이다.

 

 영호는 수진의 마음을 거절하면서 "너(수진)는 별같고, 걔(소연)은 비"라면서 "수진은 눈부시지만, 소연은 위안을 준다"고 말한다. 혹자는 영호가 두 여자 사이에서 저울질을 했다고 하지만, 영화에서 그렇게까지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실체는 부족하지만 강한 연민으로 느껴진다.

  

 다만 앞서 언급했지만 그가 왜 소연을 왜 그토록 찾아 헤매고, 왜 수년간 본적없는 그녀를 오랫동안 기다리는지에 대한 명확한 스토리라인이 있었다면, 관객들의 기다림은 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다.


 물론 '건축학개론'같은 복고를 기반으로한 수채화같고 감성적인 첫사랑 영화를 표방했고, 일정 부분 비슷하기도 하다. 그리고 지나가고 잊혀진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 영화는 무엇보다 '착하고 무해하다. 그리고 예쁘다'. 막장드라마 보다 더 '마라맛'인 세상살이를 잠시 잊고 유토피아적인, 쉼표 같은 영화를 찾는다면 일정 부분 만족을 줄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건축학개론'처럼 보는이들의 감성을 소용돌이치게 할 정도로 흡인력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소희 역의 천우희도 일상적인 연기를 자연스럽게 소화했지만, 오히려 그의 어머니가 무심코 내뱉는 대사가 귀에 꽃히는 이유는 뭘까.


 '내가 세상에 졌어. 세상은 생각 보다 잔인한 놈이야...'

 

 너무 깨끗한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말처럼 이 영화가 현실 보다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추억만을 예쁘게 그리고 있기 때문에 이입이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반전으로 상황을 반전시키기에는 다소 역부족이다.


  어떻게보면 잘못된 상대방과 편지를 주고 받는다는 상당히 평면적이고 잘 알려진 스토리를 '감성 멜로' 장르로 설득력있게 만든 것은 오로지 강하늘, 천우희. 배우들의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넘치지 않는 연기다. 다만 한 스크린에서 만나기 어려운 이 좋은 배우들의 연기를 100% 활용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 배우들은 1시간 넘게 경주를 하고도 힘이 남는 주자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끝까지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 흔적인 역력하다. 요즘같이 그저 평범한 일상이 오기만을 무작정 기다려야하는 '잔인하고' 답답한 시기에, 시의 적절한 소재다. 또 누군가는 그런 MSG를 치지 않는 담백하고 담담한 영화적 표현에 만족할 수도 있다. 특히 잔잔한 무채색의 일본 감성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만족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싱거운 음식처럼 아무맛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좀더 설득력있게 영화에 빠져들고자 했던 이들에게는 그 기다림이 다소 길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한줄평: '내겐 무해한 영화'. 하지만 맛이 느껴지지 않는. 무해와 무맛 사이, 그 어디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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