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숨은 보물을 발견하다
"... 계세요?"
작은 문 하나가 바람에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그게 입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그렇다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아~ 그 집 애기가 아파서 지금 병원 갔어요. 오늘 문을 못 열었네!"
맞은편에서도 문을 활짝 열어둔 채 동네분들 두세 분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고개를 들어보니 <순여네 국수>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네, 감사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길이 아쉬운 걸, 국수라도 사 먹을 걸 그랬나...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해외든 국내든 내가 여행하며 꼭 찾는 곳은 그 지역의 작은 책방이다. 그렇다 보니 제주의 책방을 다 가보지는 못했어도 책방 이름만 대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분위기를 풍기지 정도는 알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의외의 장소에서 책방을 발견한 것이다. 제주 여행 4일째, 애월의 하가리 숙소에 짐을 풀고 동네 산책을 하던 중에 마주친 간판이었다.
'책방이다!'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기뻐하며 집 앞을 서성였는데 글쎄, 문을 닫았다니.
사실 제주에서 이런 경험은 비일비재하다. 책방이고, 맛집이고 쉬는 날이 월화, 화수, 수목 다 다른대다 운영시간도 SNS를 꼭 확인해야 하고, 그마저도 개인 사정으로 일정이 바뀌는 일이 많다. '제주에서' 비즈니스를 한다는 건, 이 정도의 어드벤티지는 염두하고 시작한 일일 테니까. 이를테면 도시의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피해 평화롭고자 선택한 일일 테니까.
천천히 흘러가는 그들의 삶을 아주 조금 시샘할 뿐, 왕창 응원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당연하게 다음날 다시 책방을 찾았다.
"계세요?"
- "네~ 부엌으로 들어오시려면 그렇게 하세요."
하핫. 부엌으로요?
들어가는 입구부터 재미있다. 재미보다는 정겨움이다. 정겨움보다는 다정함일 테고.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길목의 선선한 바람이 잠잠해지는 그런 따스함이었다.
- "손 씻고 싶으시려면 씻으세요."
아궁이가 세 개나 있는 옛날식 부엌의 한편에서 손을 씻었다. 원래 이곳을 통해 들어가도 되는 건지 당최 모르겠는데, 그래도 된다고 하니 들어갔다. 책방 주인장님과 아직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내겐 없는 유쾌함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너무 좋다. 표현할 길이 없어, 새초롬하다 하는 내 첫인상이 또 그렇게 비칠까 걱정만 했다. 그저 웃고 끄덕이는 방법밖에는 없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편해지는 스타일인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는 그렇게 낯을 가리고 만다. 마음은 이미 신나서 팔딱팔딱 뛰고 있는데. 주인장님이 스스럼없이 펼쳐내는 이야기에 푹 빠지고 말았는데.
"책방이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손님이 많지 않아요. 판매하는 책도 아직 많지 않고요. 제가 책도 읽고 글도 쓰는 작업공간이에요. 마음껏 책도 읽으시고, 편하게 쉬다가 가세요."
제주에서 나고 자라며 관광학을 전공하고, 서울의 대학원에서는 통번역을 전공한 뒤 현장에도 오래 계셨단다. 어쩐지 언어학, 통역, 번역 등에 관한 책이 많다. 그뿐이 아니었다. 신춘문예 같은 문학 공모전에도 꾸준히 도전하면서 그때그때 출품했던 작품들을 직접 붓글씨로 써서 액자에 넣어 걸어두었다. 곳곳에 걸려있는 '시'를 신춘문예 낙선작이라고 당당히 소개하시는데, 그냥 웃어 넘기기엔 가볍지만은 않다. 시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가만히 읽어보자 고요한 울림이 있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가 담긴 이야기였고, 지금도 이어지는 우리의 삶이자 문학이었다.
방(이라고 부르자)은 총 3개가 있었는데, 판매하는 책은 가장 큰 방에 있다. 아직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주인장님 취향이 묻어나는 책들과 제주 동네 주민들이 직접 쓴 책과 직접 번역한 책들이 있어 더 의미가 있어 보였다. 나머지 두 개의 작은 방에는 테이블과 이불, 그리고 책이 있다. 아늑한 조명도 있고, 덜컹거리는 작은 창문이 있다. 겨울에 아랫목 따땃한 방구석에서 할머니가 까주던 귤에 관한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집이 그저 좋아질 것이다. 게다가 제주 귤이라면 더더욱!
손님이 오자 조금 널브러져 있던 물건들을 치우는 손길이 분주하신 듯하다. 괜찮은데. 마음 같아서는 방바닥에 누워 이불 덮고 도란도란 제주 얘기, 책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바보 같은 여행을 하고 있던 나는 오늘 애월의 하가리를 떠날 참이라 시간이 많지 않았다. 만약 어제 이 책방에 들렀다면, 우리는 어쩌면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바닷바람 맞으며 조금 더 걷지 않았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잠깐 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 이벤트 중인데 해보실래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붓글씨로 한지에 편지를 써보세요."
어렸을 적에 벼루에 먹을 갈아 붓글씨를 써본 기억이 난다. 손에 먹물이 묻거나, 옷에 먹물이 튀고도 아무 걱정 없던 그 시절을 잠시 떠올리다 지금에 집중했다. 뭐라고 썼는지가 중요하다기보다 그 순간 그 행위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문득 경건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릎을 꿇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가고 있던 것이다!
이쯤 하면 <몽캐는 책고팡>의 뜻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 '몽캐다'는 제주 방언으로 느릿느릿 꾸물거리다는 뜻이고, 고팡은 제주 방언으로 식품이나 물건 등을 보관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즉 느릿느릿 책을 읽는 공간이라는 뜻. 하지만 "책고파!"를 귀엽게 표현한 중의적인 의미도 될 수 있다고 하니, 비슷하게 추리했다면 성공적!
책방 이름에 얽힌 이야기와 더불어 어떻게 100년도 더 된 듯한 전통가옥을 책방으로 만들게 되었는지에 대한 소개를 해주시는데, 이 또한 너무 재밌다. 여기에 구구절절 다 써버리기엔 저작권을 침해하는 느낌마저 들고 마니, 제주를 여행할 계획이 있는 분이라면 꼭 이곳에 들러 직. 접. 주인장님의 러브 스토리와 책방 스토리를 듣길 소원한다. (그렇다, 소원할 정도이다.) 어쩐지 이 공간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말 테니.
-"제가 너무 말이 많죠? 코로나 때문에 일거리도 줄고, 아이 둘 키우면서 책방에만 있다 보니 이렇게 손님이 오시면 대화가 좋아지네요."
아, 너무 좋다! 장담하건대, 모르는 사람이 말 거는 행위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 공간에서만큼은 달라질 것이다. 단골인 거 알아차리는 카페에는 더 이상 발걸음을 하지 않기도 하는 (나와 같은) 이상하고 낯선 사람도 <몽캐는 책고팡>에는 꼭 다시 오게 될 것이다.
아쉽지만 책 한 권을 사들고 (마음으로는 열 권을 샀지만!) 집을 나서는데, 동네 골목투어를 해주고 싶으시단다. 나의 뒷 여정은 조금 미뤄져도 괜찮지만 그래도 되는 건지 감이 오질 않는다. 꼭 시간을 빼앗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죄송하기까지 하다.
-"이래 봬도 제가 이 동네 토박이잖아요. 더럭 초등학교 나왔고요, 책방 앞집 <순여네 국수>는 저희 엄마고요, 여기 귤나무 많은 이 집도 우리 친척이에요. 관광학과 졸업했는데, 골목투어 정도 해드릴 수 있죠!"
"네? 그 컬러감 예쁘기로 유명한 그 더럭 초등학교요? 우앗, 네? 그 국숫집이 엄마 집...? 여기 책고팡은 할머니가 사시던 집? 우앗!"
골목투어 할 때 혹시 녹음해도 되냐고 물으니, 손사래를 치시며 그건 부담이시란다. 하핫. 다른 손님 오시면 또 써먹어야 한다며 배시시 웃으신다. 아유, 난 참 이렇게 생각이 짧네.
그렇게 우리는 애월읍의 하가리, 알더럭 동네에서 구불구불 골목길을 함께 걸었다. 왜 제주의 집은 이렇게 쑤욱 들어가 있는건지, 돌담의 높이가 왜 낮은 건지, 어렸을 때부터 공용으로 쓰던 물줄기가 나오는 공간은 이렇게 생겼다라던가, 제주 전통가옥의 지붕이 이렇게 변화해서 이제는 굴뚝을 갖게 되었다와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 소소한 이야기지만 오늘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알 수 없었을 소중한 이야기.
이렇게 소중한 추억을 남겨주신 작가님이자, 통번역가님이자, 제주도민이기도 한 <몽캐는 책고팡>의 책방 주인님이 나는 진짜 진심으로 보고 싶어 졌다, 벌써!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제주여행을 꿈꾸며 미소 짓는 밤이다. 그땐 꼭 국수도 한 그릇 사 먹을 테다. 뱃속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든다.
*월화 휴무 및 자세한 운영시간은 인스타그램 참조
*제이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함께 한 휴식여행입니다.
*브런치 이웃님들 많이 보고싶었어요 (진심!) 차근차근 놀러갈게요!
*블로그 후기로도 또 인사드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