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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호영 May 16. 2021

30년 뒤 나에게 쓰는 편지

Dear my future self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책방을 다녀와서는 낮잠을 조금 잤단다. -초여름 탓일까. 한낮에 불쑥 무력감이 찾아오곤 해.- 오후에는 우산을 들고 호수공원 산책을 하고 와서 떡볶이를 만들어 먹었지. 여유로운 일요일 저녁이라 다시 침대에 올라앉았어. 반쯤 누워있는 자세로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덮고, 사실은 조금 불편한 자세지만 - 이런 습관은 분명 훗날 너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거야! - 이렇게 너는 요즘 부지런과 게으름 사이를 오가며 하루를 보내곤 해.


침대 오른편엔 읽다만 책 두 권과 마시다 만 맥주 한 컵과 립밤과 귀마개 같은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니고 있어. 향초를 켜 두고 음악을 듣고 있어. 요즘 쓰고 있는 책의 마지막 교정을 보다 말고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어.

늘 내게 필요한 것들이야. 일요일 저녁에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에 감사해. 나눔에 대해 생각해. 그걸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



30년 뒤의 너는 얼마나 이루었을까?

너의 생(生)은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너는 계속 여행하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일까?

혹시 하늘의 별이 되지는 않았을까?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나이가 되기까지 너는 자주 바뀌고, 곧잘 변했어. 변덕쟁이라는 뜻은 아니야. 살다 보면 사랑에 대한 관점이 바뀌는 것처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는 것처럼 말이야, 세상을 경험하고 배우고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거야. 지금 내가 맞다고 생각한 것들이 그때는 틀릴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 게 인생일 테니까. 가만, 인생을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장황하지는 않더라도 그럴듯한 문장의 조합으로 멋을 부려보고 싶었는데.


그래, 그냥 이렇게 조금은 내려놓고 살아. 네가 사랑하는 것에만 집중해. 많이 읽고, 쓰고, 들으렴. 대신 세상의 사소한 소리에는 조금 신경을 꺼도 괜찮을거야.

이건 마치 30년 뒤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쓰는 편지가 되어 버린 모양새지만, 나는 30년 뒤의 네가 ‘잘 살아왔다.’하며 이 편지를 읽을 수 있도록... 지금의 나에게 쓰는 편지를 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


너는 편지 쓰는 걸 좋아하면서도 정작 네 이름은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었구나. 스스로를 안아주고 사랑하는 일에 관대하지 못했어.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거나 인정받으려고 너무 애쓰지 마. 늘어난 주름과 흰머리에 신랄한 한숨을 내쉬지 마. 어눌해진 말투나 조금 늘어난 옆구리살에 당혹스러워하지 마. 나이 들며 차오른 지혜에 감사해. 함께 삶을 나누는 인연이 있음에 감사해. 네 삶의 궤적은 아름답다 말할 수 있는 따스한 그림으로 완성되고 있을거야. 너는 자체로 아름다운 사람이니까.



조금은 뭉뚱그려 끄적인 글이라 재미는 없지만, 너는 그래, 재미가 없는 사람이었잖니.(웃음) 그때는 여유롭게 많이 웃으며 살고 있을까? 읽고 쓰는 귀여운 할머니보다는 컨버스화 가볍게 신고, 걷고 춤추며 여행하는 할머니가 어울릴까? 내가 원하는 할머니상 하나 똑부러지게 그려내지 못하지만, 그런대로 넌 계속하여 하고 싶은 일을 조금씩 해나가고 있을테니, 당당하고 씩씩한 할머니는 어때?



2051년의 나에게

2021년 5월 16일 씀.




늙은 여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 오늘날에 도달했을 뿐이다.

#나의할머니에게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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