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의 프리한 고백?
나는 원래 조금 꽉 막힌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추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렇다. 나 스스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판단할만한 사례가 충분히 없다는 사실, 사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으며, 객관적일 수 없으며,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싶지도 않다는 결론. 자의적인 거부로 되돌아보고 싶지 않건대 그래 그냥, 나는 조금 틀에 박힌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본다.
그랬던 나는 조금씩 프리한 라이프를 즐기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외국물을 먹기 시작했을 때였겠지. 소위 오픈 마인드로 세상을 마음껏 끌어안았다.
검고 아득한 우주에서 나는 겨우 작고 작은 한 ‘점’으로 박혀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쯤 더 격렬히 세상을 끌어안았다.
യ
‘모르니까 뛰어들었겠지...’ 싶겠지만, 내 한계와 역량, (근거 있는) 자신감쯤은 가지고 있었다. 직장생활을 오래 하다가 남들보다 ‘늦게’ 프리랜서의 세계로 뛰어들었다는 건 단점이자 장점이었다. 철없는 꿈은 꾸지 않을 테니까, 헛된 희망을 품지는 않을 테니까. 다 자란 어른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라고 썼지만 여전히 헛된 희망을 품는다고 쓰고, 부푼 꿈이라 읽는다.)
(초보)프리랜서의 애환을 적어보려니, 누구나 예상할만한 흔한 속풀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해보지만 사실 그렇다. 그 우려는 내가 할 필요가 없다 : 이 글을 읽고 ‘뻔하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한들, 그건 그 사람 문제지 더 이상 내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는 정신력이 프리랜서에게는 필요하다.
프리 하게 일을 하다 보니 누군가의 평가에 짐짓 마음이 상하고, 심지어 예상하여 걱정하고, 작은 실수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자책하고, 미안해하고, 머리를 쥐어뜯는 그런 시간이 늘었다.
‘내 성격이 소심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요?’
그럴지 모른다. 배려와 세심함이라고 해두면 안 될까요?
비록 아침에 문을 나서는 그 상쾌한 기분이라는 게 존재했었지만, 출근이라는 건.
이젠 더 이상 그 출근을 안 한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다. 더 이상 일요일 오후부터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동시에 24시간 머리에서 일이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യ
프리랜서라고 하면 다들 하루 종일 노는 줄 아는데, 이건 정말 억울하다. 내 비록 남들 일할 때 침대에서 책을 읽은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독서마저 ‘일’의 일부가 된다. 자기 계발을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 치고, 강의를 듣고 (강의를 하기도 하고), 모임에 참가하면서도 해소 못한 갈증에 늘 목마르다. 친구라도 만날라치면 마음속 죄책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있는다 한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데도! 친구를 만나는 건 오히려 영감을 받는 귀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온갖 SNS에 여행 기록을 올리는 것도 콘텐츠 창출이며, 언제 어느 사진을 어떻게 올릴지 구상하고 있으며, 반응을 살피고, 통계를 분석하며, 소통한다. 사실 이 과정은 꽤 흥미롭다. 좋아하는 일이자, 인연을 만들어가는 제3세계의 삶이다. 비밀스러운 벽장 속 세상 같은 느낌이다.
문제는 이런 오해 - 넌 맨날 놀러 다니냐, 금수저냐, 협찬받아 좋겠다, 시간 많구나, 좋겠다...- 가 발생한다는 것인데, (내 신경 쓸 바 아니지만) 가까운 사람의 오해일수록 꽤 처치곤란이다. 예컨대 여행도 일의 일부일수밖에 없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서 병원에 있을 때도 머릿속 한 구석엔 ‘일’을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일일이 해명할 필요도, 이유도 없지만 신경 쓰이니까.
യ
결국 내 갈 길 묵묵히 가는 것만이 정답.
다른 사람의 시선과 잣대에 무뎌지는 연습을 하자. 배려와 친절은 기본 옵션이지만, 정중히 거절하는 법을 익히자. 24시간을 1440분으로 쪼개어 (열심히 놀기 위해) 열심히 일하자.
우리 일합니다. 쓰기 위해 읽고, 쓰기 위해 영화 봅니다. 여행과 삶을 억지로 만들어나가는 거 아니냐고요? 노노! 삶의 일부이자, 나의 일부입니다!
우리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기로 해요.•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