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라는 단어에 민감한 시기가 있었다. 10대의 막바지 즈음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어른이 된 줄만 알았다.
이미 어른인 것 같은데 어른이 되기 싫었던 20대에는 언제쯤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30대가 되었을 때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자명한 어른이었건만,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고 스스로에게 칭얼댔다.
40대, 50대, 60대라는 나이 터울을 겪으면서도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이 순간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을까? 철이 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마음만은 20대라고 외치며. 여전히 여행을 즐기는 여행자로 남아서.
하지만 나는 어른이 되었다. 내가 한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성인 말이다. 어른이라는 말을 장황하게 꺼내면서 정작 하려는 말은 어른에게도 어려운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다.
학창 시절에는 사소한 친구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 선생님과의 관계에 있어 굉장히 예민했고, 공을 튀기듯 슬픔과 기쁨을 주고받는 일이 허다했다. 별거 아닌 일로도 일기장은 심각해지고, 편지와 교환일기를 쓰느라 반나절을 허비했다.
조금 더 자라서는 우정이 사랑으로 변질되었을 뿐. 사랑과 뒤섞인 사회적 존재로서의 책임감, 무한 경쟁 속 시기와 질투, 배려와 다정, 배신과 애정 같은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혀 얼마나 마음을 괴롭혔던가!
더 큰 어른이 되어 나아진 게 있다면 상대의 감정을 향한 조금은 무뎌진 태도, 마음을 조금만 떼어주는 방어력, 갑작스러운 공격도 거뜬히 소화해내는 충격 흡수력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사실 그게 마음 같지 않더라는 게, 현실이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기도 하고, 그러니까 하지도 않은 말을 내가 언젠가 한 셈이 되기도 하고, 상대의 의중을 오해하기도, 나의 태도를 오해받기도 하면서, 특히나 뾰족한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찔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의도치 않게 나 역시 상대를 찌르기도 하면서, 그렇게 아픈 일은 계속되곤 했다. 어른이 되어 받은 상처는 스트레스가 되어 몸이 반응하기까지 했다. 이런.
얼마 전 한 모임에서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어른이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에 화를 내며,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컨트롤하려다가 튕겨져 나갔다. 누군가를 가스 라이팅 한다는 건 그렇게 오랜 시간 공을 들일 필요가 ‘있는’ 것 같아 보였고, 3년 간 걸려드는 이가 아무도 없자 본인이 무너져버렸다. 남은 이들은 폭탄을 맞은 것처럼 허탈했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울어야 했다. 대신 우리끼리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
관계를 겪으며 한 가지 나아진 게 있다면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감 정도는 획득했다는 것인데, 예컨대 A가 나에게 찾아와서 B라는 사람을 나쁘게 말했을 때, A와 B와 나의 관계를 참작하여 대화를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 그렇다. 내가 A와 가까운 사이라면 A와 밀착하고, B와 가까운 사이라면 A의 말을 거르면 되는 것이다. 나와의 관계에 집중하면 쉬운 일이기도 하다.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내 편에 집중하면 되는 일이기도 하고.
원래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복잡한 인간관계만큼이나 생각도 꼬여 마무리가 잘 되지 않는다. 나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사람들이 많고, 그들도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알지 못해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좋아하며, 전화 한 통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시기에도 마음은 그대로기에, 이렇게 내 영역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렇게 사람들을 떠올려보곤 한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브런치라는 공간을 떠올리듯!
*서랍 속에 있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