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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호영 Jun 05. 2019

리스본의 아침 그리고 오후

여름, 리스본 #28번트램


비 오는 날 그리움이 짙어진다고 느끼는 것은 비단 생각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겠다. 이른 아침 파도처럼 밀려와 잠을 깨운 후드득 소리, 테이블 물 잔에 채워진 물의 부피만큼 높아진 습도, 창밖에 수직으로 떨어지던 비의 모양새, 출근길 발길 닿는 곳곳을 메우다 튕겨져 나가던 입체적 동그라미.

내 시선에 닿은 이러한 것들은 그리운 색깔을 하고, 그리운 소리를 내며, 그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퐁퐁퐁 거리던 이른 아침의 여름 비는 이내 쏴아... 하며 시간을, 공간을, 차원을 지나간다.



언제인지 모르게 활짝 뜬 해가 잎사귀에 매달린 마지막 물기마저 쨍하게 말리고 있었다. 숙소 밖으로 나섰는데 말 그대로 눈이 부셨다. 선글라스를 끼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살 한 줄기가 뾰족하게 내려 꽂혔다. 거리에는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 버스킹을 준비하며 악기를 세팅하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오른쪽, 왼쪽을 두리번거리며 어디로 갈지 잠시 고민했다. 비스듬한 오르막길에 비스듬히 주욱 늘어선 레스토랑들 중에 한 곳을 고르기로 한다. 개나리색 크레파스처럼 샛노란 파라솔들이 촘촘히 모인 테이블이 좋겠다. 고작 100미터쯤 되는 곳을 향해 걷는 도중에도 사람들을 관찰하고, 눈이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하고, 아무 데나 주차된 자동차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등의 일들을 하느라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레스토랑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테이블이 빈 순간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고 나서야 보였다. 주위 가게들이 경쟁하듯 각기 다른 색상의 파라솔을 뽐내며 거리를 점령하고 있었다는 것을.



뜨거운 햇살과 공존하듯 삽상한 여름 바람이 불어와 머릿결을 흩뜨렸다. 테이블을 덮은 두껍고 하얀 천이 들썩였다. 레스토랑 안쪽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할 새도 없이 잰걸음으로 다가온 웨이터가 메뉴만 전해주고 떠났다. 바람이 들추는 테이블보를 연신 바로잡으며 그제야 풍겨오는 크루아상 냄새를 알아차렸다. 테이블 사이사이 빈 공간을 가득 메운 농도 짙은 빵 냄새는 온종일 내내 나를 따라다닐 것만 같았다.

열 가지 종류가 넘는 크루아상 이름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다 그 행위를 반복한다. 손가락 끝이 간질간질하다. 무얼 먹을까. 



리스본 보통날의 아침
세 개씩이나 시켰던가? 하나에 1유로 남짓하던 크루아상






저절로 입맛이 도는 달달함을 조금 남겨두고 일어섰다. 맞은편 디저트 가게 윈도우에 사람들이 몰려있다. 사실 리스본은 에그타르트만 유명한 게 아니거든. 여러 종류의 빵과 디저트와 커피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갖지 못하기라도 하는 듯 빵 사진을 냅다 찍고는 내일 다시 오기로 한다. '나에게 손짓하는 어떤 것들'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이겠다.


오늘은 28번 트램 출발지를 찾아 상 조르제 성을 갈 참이다. 티켓을 사러 호시우 광장에 가는 길에 마주친 산타주스타 엘리베이터는 낮과 밤이 확연히 다르다. 리스본에는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보기 좋은 전망대가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산타주스타는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서 원하면 아무 때나 걸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가끔 줄을 길게 서야 하지만 그마저도 싫다면 옆 건물로 올라가는 (공공연히 알려진) 편법을 써도 된다. 지금은 눈길만 휙 던져주고는 다음에 다시 오기로 한다. 2년 뒤 겨울에 그곳을 다시 찾았다.


호시우 광장에서 1 day 티켓을 구입했다. 28번 트램 출발지 (initial stop)를 찾았는데 예상보다 줄이 길다. 28번 트램 여행을 하려는 사람들일까? 상조르제 성은 가까운 곳인 것 같은데? 줄이 길어서 트램은 포기하고, 그냥 걸어가 보기로 한다. 트램이 지나가는 트랙이 있는 골목길을 걷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행여 트램이 지나갈라치면 길 옆으로 자리를 내어주며 손을 흔들거나 사진을 찍고는 괜스레 웃음이 난다.

걸어 올라가는 오르막길이 생각보다 가파른 걸. 중간에 보이는 정류장에서 트램을 기다려보기로 마음을 바꿨다. 사람을 가득 태운 트램이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가버렸다. 토끼눈을 뜨고 허공에 대고 '왜?'라는 제스처를 만들어 보였다. 그때 눈에 띈 빨간색 캐노피 지붕을 가진 아이스크림 가게는 날 위한 것이겠지. 아침에 먹다 남긴 빵의 크기만 한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느껴보았다.

정오가 지나며 해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찾은 디저트 가게
건너편 창가를 장식하고 있는 달콤한 빵들
길게 늘어선 트램 줄에 합류했다가 빠졌다.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가 이렇게 예뻐서 어떻게 들어가보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 길을 걷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로맨틱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가득 찬 트램을 타려고 할 때는 정류장에 가만히 서있지만 말고, 손을 내밀어 흔드는 등의 표현을 해주면 좋다고 한다. 나는 결국 걸어 올라가 상조르제 성 입구를 찾았다. 길을 잃을 뻔했을 때쯤 같은 목적지를 향한 영국인 가족을 만나 그들을 따라갔다. 성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티켓을 사려고 줄을 길게 만들어 놓았다.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움직이지 않은 탓에 하루 종일 한 박자씩 뒤처지는 느낌이다. 


초록빛 나뭇잎들은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건조한 여름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어 놓을 때 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티켓 박스 앞에 있는 작은 타르트 가게에서 와인 한 잔을 하고 가기로 한다.

그 바람에 상조르제 성을 둘러볼 수 있는 제한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참으로 괜찮았다.




리스본이야말로 '그냥 아무 장소가 아니라 만남의 장소'이기에.

"이제 전차가 다니는 도시는 많지 않잖니, 여기서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

#페소아의리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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