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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호영 Aug 09. 2020

내가 사랑한 순간들

지금 비록 여름은 앓고 있지만.




찌는 듯한 더위가 며칠 지속되는가 싶더니 이제는 연신 비가 내린다. 지독히도 내리는 빗속에서 여름은 점점 사그라든다. 그렇게 내가 사랑한 여름은 시름시름 앓다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가만히 빗소리를 듣는 일, 빗줄기를 바라보기만 하는 행위 조차 우리가 사랑하는 순간들이 분명하겠지만, 조금은 높아진 습도에 금세 지쳐버리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사진첩을 열어 지난 시간을 추억하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시무룩해지겠지만 괜찮다. 사진첩 속에서 우리는 사랑했던 순간들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그 순간을 떠올리는 이 순간을 우리는 다시 사랑하기 시작했으니까. 



4년 전 여름에도 이렇게 장대비가 내리는 날이 있었다. 매섭게 부는 바람에 자꾸만 뒤집어지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캐리어를 끈다는 것은 생각보다 성가신 일이었다. 군데군데 고인 빗물은 점점 흙탕물로 변해갔고, 자동차 바퀴에 튄 흙탕물이 타다닥 내게 달려들었을 때 나는 주저앉아 엉엉 울 뻔했다. 짜증이라는 감정은 간혹 그런 식으로 표출되곤 하더라. 혼자 여행의 시작이 간혹 그렇게 귀찮은 일이 돼버리는 것처럼. 그러나 그 날의 잔상이 그 해, 발리에서의 추억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준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순간은 그렇게 상대적으로 찾아오기도 하였다. 


내가 사랑한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지 않았을까. 커다랗고 말랑말랑하고 둥그렇고 색깔이 예쁜,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들 말이다. 그런데 여행 중에는 늘 그러한 기준들은 무색해지고 말았다.


포르투갈 가는 날 갑작스럽게 여권을 재발급받아야 했거나, 뉴욕에서 아예 비행기를 놓쳤거나, 홍콩 가는 날 항공사에 전화해서 아직 떠나지 말라고 다급하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던 순간 조차 지금은 나를 미소 짓게 만든다. 노르웨이 풍광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다가 트럭을 받을 뻔하고,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하다 살아남았던 그 가슴 철렁한 순간도 지금의 나를 성장하게 만들었다. 쿠바에서 햄버거를 먹다가 바퀴벌레를 씹었던 일도, 탄자니아에서 벌레들이 숙소로 몰려 들어와 소탕 작전을 벌인 일도, 태국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오르막길에서 넘어져 팔꿈치가 다 까졌던 일도 지금의 내게는 글감을 던져준다. 시끄러운 클럽에서 춤을 추거나, 그렇게 만난 여행자들과 시간을 나누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이거나 혼자이거나, 그래서 외롭거나, 두렵고, 슬프고 그렇게 무모해서 더 아팠던 시간들도 지금은 내가 사랑한 순간이 되어 나를 나답게 만드는 재료가 되었다.



수줍고 말수가 적은 여느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던 나는 이제 조금 달라졌다. 씩씩한 어른이 되었다. 여전히 어느 날엔 나를 위로해 줄 책과 음악이 필요하겠지만, 대부분은 여행의 기억으로 괜찮게 살아갈 것이다. 언제든지 다시 떠날 수 있는 여행가방 하나를 방 한편에 두고 새롭게 사랑하게 될 순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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