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어느 계절에 나는 자주 혼자 있고 싶었다. ‘날 좀 내버려 둬.’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다가 모두 나를 떠나버리면 어쩌지.’ 하며, 홀가분함과 외로움을 번갈아가며 느끼는 시절이었다.
스트레스는 타인으로부터 오는 것만 같았다. 불편한 식사 후에는 어김없이 체기를 느꼈다. 오해나 이간질은 피할 수 없는 사회적 요소인 것만 같아 속상했고, 배려나 선의는 드문드문 다가오는 일이라 의심했다.
그리움이나 설렘 같은 감정이 얽히고설킬 때마저도 비집고 들어오는 각기 다른 백가지의 이슈를 다루느라 내 머릿속은 쉴 틈이 없어 보였다.
스트레스는 결국 나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정중하게 거절하기와 감정 드러내기 같은 연습을 통해 미움받을 용기를 장착할 필요가 있었다.
음악은 위로였다. 스피커를 통해 방 안 가득 음악을 채웠다. 클래식을 듣다가 ‘잠들기 전에 듣는 음악’ 추천 리스트를 만들었다. 팝송을 듣다가 가사를 따라 읽어보고, 그들의 표현에 감격하면 얼른 메모했다. 그러다가 어떤 노래를 들을 때면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하였는데, 그 누군가는 아무도 아니기도 했고, 아무나이기도 했다. 어느 상황, 그러니까 어느 추억 같은 것이 떠오르는 음악이 나오면 필름을 돌려 회상신을 재생시켰고, 이 모든 걸 잊게 할 만한 리드미컬한 음악이다 싶을 땐, 갑자기 일어나 춤을 추기도 하면서.
음악과 함께 하는 것은 주로 읽기였는데, 특히 일요일 밤처럼 불현듯 밀려오는 초조함이나 무력감을 느낄 때면 책장에서 책을 여러 권 꺼내 들고 침대 맡에 두었다. 조금 더 아늑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향초를 켜고-아끼는 초에 불을 붙이는 행위 자체는 위로가 된다.- 굳이 조명은 독서용 스탠드에만 의지하는 것이다.
이불속에서 몸을 둥그렇게 말고 책과 연필과 수첩을 바라보며 덜컹거리는 심장을 멈출 준비를 하는데, 이때 빠질 수 없는 것은 초콜릿과 맥주였다. 그때쯤 나는 노르웨이에서 사 온 캐러멜 형태의 초콜릿을 하루에 하나씩 까먹으며 ‘나를 위로해주는 이 단 것’의 존재를 몹시 사랑했던 것 같다. 몸을 둥그렇게 말고 맥주는 또 어떻게 마시느냐 묻는다면, 한 번쯤 그렇게 해 본 사람이 꽤 많을 것 같아서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어느 밤에는 초콜릿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다가 잠에 빠져드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러다 나는 치과에 가야 하겠지.’
음악과 독서등이 켜져 있으니 잠이 들었다가도 새벽에 눈을 뜨기 마련이었고, 때마침 내가 깨어난 그 순간 흘러나오는 노래의 노랫말에 새삼 심취하여 멍하니 감동하기도 하였다.
음악을 듣고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다 보면 자주 어떤 문장에 집착했다. 그러면 메모장에 문장을 옮기다가 곧잘 나만의 문장과 문단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그렇게 써 내려가는 글은 (어차피 혼자 보는 일기지만) 다음 날 다시 봐도 만족스러운 정도였다. 역시 글이라는 것은 약간의 스트레스와 슬픔 같은 것을 곁들여야 잘 써지는 것인가 하며, ‘세상이 따뜻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면 시를 못 쓰게 된다.’는 최승자 시인의 말에 공감했다. 평일 저녁에 가끔 순대국밥을 함께 사 먹곤 했던 어느 수필가 선생님이 ‘피눈물 나는 사랑을 하기 전까지 사랑에 관한 글을 쓸 수 없다’고 했던 말도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
그즈음 내 방 창문 밖에서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자주 들렸다. 집은 4층이었지만 3층에서 이어지는 옥상이 있어 건물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전화 통화를 하거나 하였는데, 아마도 그곳 어디쯤에 고양이가 한 자리를 차지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어느 새벽에 창 밖에서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잠을 깼을 때 고양이를 떠올렸다. 바람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밀려올 때 나는 잘 열지 않던 창문을 열었다. 그때 방 안은 요요마가 연주하는 생상스의 ‘백조’로 가득 차 있었고, 고양이를 만나면 이름을 요요마나 생상스 라 지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서교동살던시절 , #스트레스푸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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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개인적인 일이 있어) 요즘 브런치가 뜸했죠? 그래서 끄적여놨던 글 하나 올리고요, 금방 다시 쿠바여행기 가져올게요. 작가님들 브런치 금방 놀러갈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