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서평

그림 같은 소설

[내가 싸우듯이 : 정지돈]

by Erin Chon


모든 서사는 시간의 흐름을 전제한다. 기승전결이 그렇고 인과관계가 그렇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아니겠는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을 수 없듯이 우리 인간은 세상만사를 시간의 전개에 따라 이해하고 그것이 세계를 붙드는 질서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드라마처럼 서사가 촘촘할 수도 있고 배수아의 단편소설처럼 느슨한 서사일 수는 있으나 아무튼 서사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한다.


그런데, 그림이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그림의 서사는 동일한 시간 위에만 존재한다. 즉, 모든 것이 동시에 눈 앞에 펼쳐진다. 마치 어린 시절 즐겨 보던 그림책을 커다란 종이 위에 무작위로 찢어 붙여 놓은 듯 순서도 질서도 없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무엇을 먼저 보고 무엇을 나중에 볼 지는 감상자의 직관에 따를 뿐이다. 동시에 펼쳐진 이미지들 속에서 이야기는 시간으로부터 해방되어 부유하고 또 충돌한다. 그 결과 하나의 이야기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조합들로 무한 증식된다. 그림은, 시작과 끝 사이에만 존재할 수 있는 크로노스의 인간이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라고 생각했었다. 정지돈의 ‘내가 싸우듯이’를 읽기 전까지는….


이 소설집은 마치 미술관 하나를 가득 채운 화가의 그림 같다. 부유하는 지식과 정보들은 서사 구조에서 벗어나 독립된 이미지들로 떠돈다. 그 이미지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논리로 꿰어 맞춰 보려는 독자들은 당황할 것이고, 떠다니는 이미지들을 감상하듯 바라볼(읽어볼?) 여유가 있는 독자들은 이 소설의 신선함에 무릎을 칠 것이다. 생몰의 사건과 상관없이 등장하는 인물 ‘장’은 화가가 정성스럽게 고른 밑바탕 색깔처럼 소설의 곳곳에서 조화롭게 등장하며, 소설 속 ‘나’와 기억나지 않는 (동성) 연애를 하는 레이날도 아레나스, 이구와 고든 마타 클라크의 우연한 만남 등 끊임없이 등장하는 유머러스한 소설적 허구는, 화가가 아끼는 물감을 조심스레 캔버스 위에 찍어 작품을 완성해 나가듯이, 떠도는 이야기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놓았다.


그래서 이 책 내용이 뭔데라고 묻는다면… 흠... 소설 속 한 구절이 가장 적절한 대답이 될 듯하다.


… 소설 이야기 좀 해줘. 내가 말했다. 장은 그건 좀 힘들다고 했다.

이유인즉 [말라노체]는 줄거리를 요약해서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소설이 아니라는 거다.

그건 작품의 본질을 흐리는 짓이야.

기가 찼다. 이건 철학 수업이 아니다.

설명이 안 돼. 내러티브가 아니라 문장으로 말하는 소설이야.

나는 전화를 끊었다. 장은 깡패다. 그렇게밖에는 설명이 안된다.

[뉴욕에서 온 사나이: 내가 싸우듯이 중에서]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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