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게이퍼드
미대에 다닌다는 이유로 세 살 터울 오빠 친구들로부터 갑자기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때 말고는, 그다지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은 들었지만, 미술을 전공해 보라는 권유를 받아 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반대하는 목소리가 더 컸었다. 나에게는 미술을 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는데, 주위에서는 왜 굳이 그런 걸 전공으로 선택하냐며 말렸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집안에서 미술을 포함 예체능을 전공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미술을 한다는 건 외로운 선택이었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오롯이 나 혼자만의 것이 됨을 의미했다. 네가 선택한 거니까,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힘들어도 불평은 자신에게 하도록... 나는 불평할 상대가 필요했고, 위로와 용기가 절실했지만 그건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았다. 유학까지 와서 교수에게 들은 말도 다르지 않았다. 네게 그림을 그리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어. 네가 그림을 그리지 않더라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아. 대단한 작가가 되겠다는 꿈 또는 부담감부터 버려. 넌 네 스스로 그림을 그릴 이유를 찾아야 해... 그렇게 내 스스로 찾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냥 내가 하는 일이니까. 다 그렇게 사니까. 누구는 수학을 하고 누구는 피아노를 치고 누구는 노인을 돌보고 누구는 집을 짓고... 다 그렇게 자기가 하는 일을 그냥 하면서 보람도 찾고 의미도 찾는 거니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특별한 일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책 한 권을 만났다. 마틴 게이퍼드의 책 'Rendez-vous with Art' 한국에서는 '예술이 되는 순간'이라는 멋진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온 책이다. 마틴 게이퍼드는 영국의 미술 평론가이자 작가이다. 그가 쓴 글을 읽으면서 난 처음으로 미술가로 산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가 작가 또는 작품에 대해 글을 쓰는 방식은 독특했다. 미술에 관한 책들 대부분은 글을 쓰는 작가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 간다. 독자는 작품을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을 이렇게 쓰여진 책들을 통해 만난다. 그런데 마틴 게이퍼드는 해석보다는 그가 직접 만난 미술가와의 경험을 기록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미술가이다. 그는 주인공인 미술가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를 때는 여러 차례 물어보면서 작품을 만든 사람의 말을 최대한으로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자신이 새롭게 알게 된 작품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경이로움을 담아 서술한다. 캠브리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오랜 기간 동안 저널리스트로서 미술에 관련된 글을 써온 그가 주관이 없을 리 없다.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 강조하듯이 보수적인 매체를 위한 글을 쓰면서 보수적인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가 그에게 분명 있다. 나도 그의 세계관이나 아시아 미술에 대해 쓴 글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의 글들에서 보여주는 미술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일개 B급 미술가인 나에게까지도 어떤 가슴 뭉클함을 가져다준다. 내가 하는 일-그림 그리는 일을 이리 소중하게 생각해 주고 이렇게 열심히 글을 써내는 사람이 있구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구나.
2박 3일의 짧은 겨울 여행을 떠나면서 그의 책 '예술과 풍경'을 챙겼다. 그림이 예술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자연이 풍경이 되기 위해서 우린 시간 내어 그것들을 바라봐 주어야 한다. 마틴 게이퍼드는 왜 작품을 직접 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미술작품에는 이미지와 물성이 공존한다. (이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보수적인 관점일 수 있겠다. 미디어 아트는 그의 관심 밖 영역에 있다.) 도판으로 보는 작품은 이미지에 국한되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다. 직접 보아야 이미지와 물성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미적 경험이 가능하다. 자연이 풍경이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여행을 떠나 직접 그곳에 머물며 바람이 가져다주는 물과 흙의 향기를 맡아야 시각적으로도 특별한 경험이 된다.
예술과 풍경은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