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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냥이마미 Jun 20. 2016

사실 널 좋아했다.

신경쓰인다고. 좋아한다고.




이 나이가 되어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모른다는 건 거짓말이다. 나는 누구인지 내 취향은 무엇인지 아는 것에는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지도 포함되어있다.

사람이 악기라면, 자신의 음에 익숙해지고 연주에 능숙해질수록 나와 잘 어울리는 악기를 알아본다는 거다. 3초만 들어도 알 수가 있다. 라디오라면 자신과 같은 주파수를 찾는 것과 같다. 딱 맞춰지면 잡음이 사라지고 깨끗한 소리가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지나쳐도 나에게 맞는 몇몇 사람에게는 그런 반응이 제깍 나오게 되어있다. 좋아하는 것은 본능이다. 좋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음 가는대로 행하고 행하는 것이 곧 나다.

사람은 이 단순한 일을 어렵게 만들어 버린다. 현실은 말처럼 쉽지 않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인정하지 못하고 너 좋아, 가볍게 말하지 못한다. 같이 죽자는 것 아닌데. 무거울 것 하나도 없는 감정인데.





처음엔 널 괜히 미워했다.

너를 읽을 수 있었다. 속까지 다 보이는 것 같았다. 너의 반복되는 습관, 버릇처럼 하는 말 같은 것. 언제 웃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멋쩍어하는지 등의 패턴이 보였다. 그래서 싫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빤히 들여다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치욕스러웠다. 투명해지느니 차라리 없어지고 싶었다. 가끔 나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죽을 것처럼 괴로울 때가 있다. 난 그런 병을 앓고 있다.


좋아하는 마음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정신이 무너져 버릴 때가 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스스로를 유리잔처럼 금갈까 부서질까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관리 못하면 나만 손해니까 그렇다.

남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해서 그런 병이 생겼다. 별 것 아닌데도 꽁꽁 감싸매고 움켜쥐었다. 내가 보일까봐. 내 속이 이렇게 암담한 것이 보일까봐. 어떠한 일에도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알아버릴까봐. 그래서 남과 가까워지는 것이 꺼려졌다.


쟤는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저리 속 편하게 살까. 한심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 처음엔 동경하는 마음이다. 봄바람이 닿은 꽃잎처럼 바르르 떨린다. 누가 그랬던가. 인생은 멀리서는 희극이고 가까이서는 비극이라고. 타인은 내 시선이 닿지 않은 곳에 자신만의 원 안에 서 있다. 미지의 세계는 항상 설레는 법이다. 잘 안보이니까 어떤 사람일거라고 멋대로 상상해버린다.

그와 안면을 트고 그와 안부정도는 묻는 사이가 되고 그와 1분 이상의 대화를 어렵지 않게 이어가기 시작하면 감정적 거리가 가까워진다. 내 원과 그 원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진다. 어떤 타인은 참 특별해서 그를 향해 나의 지름을 일부러 키우기도 한다.


생판 남도 적정거리 안에 들어오고서부터는 자세하게 보인다. 환상은 깨어지고 실체가 보인다. 여기 뭍은 먼지, 저기 붙은 단점. 이런 자잘한 것들. 무던하지 못한 성격은 피곤하다. 못나고 못된 나는 그걸 세세하게 다 보고 기억한다. 그리고 내 상상과 비교하기도 한다. 겨우 나의 경험이라는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데, 재단하고 판단하려 든다.

성격 탓을 한다. 나는 이렇게 태어난 거라고. 아니면 성장 과정에서 내가 기억치도 못하는 극복할 수 없었던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죽어도 내 잘못은 아닌 거다.




아.. 넌 어쩌면 희미한 기억 속 내 짝꿍과 비슷했는지도 모르겠다. 수현이도 듬직한 체구에 항상 남을 배려하는 듯한 매너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든지 사회적 약자라든지- 그런 이에겐 촌스러울만큼 애틋한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내 기억엔 그랬다. 나에게 참 잘해줬다. 그런데 나는 항상 밀쳐내고 벽을 쳤다. 부담스러운 것은 핑계였다. 어느 날 나는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고 말았다. 그의 애정을 무기삼아 함부로 대하다가 정말 화나게 하고 말았다. 그 이후 나를 본체도 하지 않았다. 열 몇 살 치고는 강단있는 행동이었다.

남의 마음을 비틀고 잡아뜯으며 어디까지 온전할 수 있나 테스트하는 건 인격적으로 상당히 덜 떨어진 행동이다. 그때는 어렸고 나에겐 중요한 것들이 더 많았다. 경쟁하는 것이라든지. 더 빨리, 더 대단하게 성취하는 것이라든지. 그런 쓸데없는 것들.




너를 바라보는 것은 곧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내 기억의 저편에서 못난 날 끄집어내 까발리는 것이었다. 수현이는 벌써 이십년 전이었다. 긴 세월동안 오래동안 묵혀서 퀘퀘한 냄새가 났다. 인정하기 싫었다.





지난 겨울이었다. 한동안 병이 다시 나빠졌다. 깊고 검은 우물에서 허덕이며 매일밤 턱밑까지 차오르는 고독과 고통을 뱉어냈다. 아침에 눈을 뜨기 위해 수십번 눈물을 삼켰다. 사회생활이 버거웠지만 미루는 것도 한두번이었다. 해가 뜬 건지 아니면 백야가 지속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음침하고 어두운 늦은 아침, 기차역으로 천근같은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걸어가는 길에 너를 만났다. 너는 명랑하게 내 안부를 물었다.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난 일상생활조차 힘겨운데 넌 참 즐겁구나.

너보다 경력이 고작 조금 더 많다는 것에, 나이가 조금 더 많다는 것을 들먹였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지 말아라 재수없는 말을 쏟아냈다.

그는 그런 일도 웃음으로 넘길 사람이었다. 또, 또, 또다시 수현이를 함부로 대하고 있었다.




누구를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굳이 눈 앞에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는 것이다.


의식이 기억하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는 깨끗한 흰 셔츠를 입고 갈색 머리를 하고 반듯하게 접힌 앞치마를 두르고 서빙을 하고 있었다. 내 눈을 의심한 순간, 생각보다 많이 널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너의 뒷모습에 설렜으며, 너는 짜증나는 대상이 아니었다. 나 혼자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체격은 비슷하지만 생김새는 전혀 달랐던 웨이터와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바보 겁쟁이.




휴가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가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같이 먹는 그런 동료 사이일 뿐이었다. 여자친구와 어디 놀러 가는 이야기를 할 때도 담담히 들었다. 당연히 있겠지, 여자친구. 지금 여기 짝 없는 사람은 나뿐이다. 홀로 가방 두개 들고 연줄 하나 없는 타지에 왔으니까.

그날 저녁엔 속이 약간 더부룩했다. 슬픈 노래에 흠뻑 젖어 눈물을 흘리거나 바닥을 치면서 울부짖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 행동은 독약보다 더 나쁘다. 스트레스, 받으면 안된다. 건강에 안좋으니까.





며칠 전, 너가 7월 말에 계약이 끝난다는 단체 이메일을 받았다.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진 않았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은 필연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홍차백을 너무 많이 재활용한건지, 들이마시는 홍차가 떫었다. 혀를 몇 번 다시었다.

수현이를 싫어하지는 말 걸. 뒤돌아보니 죄책감 뿐이다.


생각보다 훨씬 짧은, 눈 깜짝하면 사라질 인연인 걸 알았다면 잘 해줄 걸. 아니, 합리적으로만 할 걸. 동료라는 간단명료한 관계, 그 선이라도 상냥하게 지킬걸. 한번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난다고 뻗대었던가. 친절하게 안부 물어오면 나도 관심을 가지고 넌 어때 할 걸. 뭔 말을 하든 그래 그렇구나 동조하고 좀 들어줄 걸. 이따 기차역에서 볼 수도 있겠네 하면 그래 그럼 기다렸다 같이 갈까 할걸. 뭐가 대단하다고, 뭐가 그렇게 비싸다고.



좋아한다고. 신경쓰인다고.




숨기는 것, 참는 것, 내가 내가 아니게 되도록 하는 것,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 생각보다 얻는 것도 의미도 없더라. 타인이 주는 애정의 부재는 아쉽고, 내 안의 애정을 부정하는 건 씁쓸하기만 했다. 상처만 덧날 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인생수업은 아니었다.

설렘이 곧 깨져버릴 것을 걱정해 처음부터 미리 실망해버리는 건... 너무 비겁하다. 불안해서 상처받을 각오만 잔뜩 하고 기뻐하진 못한다. 너가 싫은 것이 아니었다. 한번도 싫어한 적이 없었다. 불안감을 떠안을 용기가 없는 내가 밉고, 내가 짜증나고, 내가 싫었다.



사실 널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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