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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기린 Jul 08. 2022

저 의사가 약에 독을 넣었다

- 병동 공동체에서 생기는 일들

입원 병실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환자복을 입고 함께 생활한다. 정신과적 진단, 사는 곳, 직업, 성격, 연령, 무엇 하나 같은 것이 없다. 정신건강의학과 병동, 특히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된 보호 병동의 경우에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고 오가는 가운데 작은 사회가 만들어진다. 병동 공동체의 특성은 당연히 그 구성원들에 따라서 달라진다. 기분이 몹시 들뜨고 에너지로 가득한 조증 상태의 환자가 두 명만 있으면 병동 전체에 활기가 넘쳐흐른다. 환자들의 연령대가 낮으면 청소년 수련원 같은 분위기가 되고, 노인 환자들이 많으면 경로당이 된다. 친해지는 사람들이 있고 다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상호작용을 파악하고 치료적 개입을 하는 것이 병동 의료진의 주된 임무임은 물론이다.


대개의 경우 병동 공동체는 그 자체로 치료적인 효과를 가진다. 자신 이외에도 비슷한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환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먼저 입원한 사람들은 새로 입원한 후배들에게 치료적 롤모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병동 공동체 역시 항상 아름답고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치료에 적대적인 방향으로 형성되는 병동 여론은 치료진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온다.


병동 주치의와 응급실을 함께 보던 때였다. 응급실에 환자가 왔다는 연락을 받고 가 보니 정신병적 증상을 동반한 조증 상태의 젊은 남성이었다. 해골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티셔츠와 모든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현란한 반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분주하게 대기실을 왔다갔다하고 있는 모습에, 굳이 이름을 확인하지 않아도 응급실 진료 의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응급실을 담당하고 있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라고 내 소개를 하자마자 남성은 경계심을 표했다. 그리고 그 뒤로 한 시간 동안, 끊을 엄두도 낼 수 없는 장광설이 이어졌다. 세상의 종말을 향한 음모가 이어지고 있다고. 당신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인 것 같은데 이런 계획들을 알고 있느냐고. 이 환자의 입원이 병동에 어떤 상황을 만들게 될지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입원한 환자는 나를 곧 자신의 망상 체계에 편입시켰다. 주치의가 세상의 종말에 관여하고 있는 조직의 일원이고 정신과적 치료를 통해 자신을 무력화시키고 조종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환자는 달변가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몇 명의 환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른 환자들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부분은 믿지 않았지만 내가 치료를 통해 나쁜 짓을 하려고 한다는 그의 의견에 설득되고 말았다. 환자는 일과 중에 몇몇 동료들을 치료요법실에 모아 나름대로의 이론을 설파하기도 했다. 음모론에 대한 글도 거의 책을 쓸 것 같은 기세로 써내려가고 있긴 했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고 치료에 따라 증상이 호전되면 자연히 좋아지리라 기대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네 명의 환자가 동시에, 면담과 치료를 거부하고 나섰다. 그 뒤로 한동안은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치료가 더뎌지는 데 대한 보호자들의 재촉, 상황에 대한 지도 교수님의 질책, 환자들의 치료 거부가 어우러져 궁지에 몰렸었다. 우여곡절 끝에 퇴원해서 첫 외래에 온 환자는 매우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이었다. 해골 옷과 반지는 왜 샀었는지 모르겠다며 모두 버렸다는 이야기에,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환자의 기저 성격 문제가 작용해서 나를 당황하게 한 경우도 있었다. 주인공은 만 19세의 여자 환자였다.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학생으로 반복되는 자해, 잦은 구토 등 식이 문제 때문에 입원을 하게 된 경우였다. 환자는 성격의 문제 – 대인관계, 생활에서 반복되는 잘못된 패턴 – 가 있었고 이것이 누적되어 정신과적 증상으로 이어진 상태였다. 구체적으로는 연극적인 성격으로, 감정이 매우 극적이고 화려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그것을 과시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부적절하다고 느껴질 만큼 과도한 친밀감을 표현하는 환자로 인해 병동의 거의 모든 남자 환자들이 영향을 받았다. 이 환자가 병동 요법실에서 책을 읽고 있노라면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자리가 꽉 차곤 했다.


문제는 내가 환자와 면담을 해야 하는 때였다. 그 환자는 일과 중 대부분의 시간을 요법실에서 보냈는데, 면담을 위해 불러낼라치면 방 안에 있는 열 명 가까운 남자 환자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환자는 나와의 면담 시간을 자신의 이런 영향력을 드러내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십분 활용했다. 나로 인해 즐거운 대화가 끊기게 되어 아쉽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일어설 때면, 내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현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넘길 수 있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나중에는 해당 환자의 면담을 하러 갈 때면 가슴에 돌을 얹어둔 것처럼 막막했다. 결국 이러한 성격적인 문제로 인해 충분한 기간 입원치료를 유지하지 못했다. 외래 기반의 치료가 적절할 것이라 판단해 생각보다 일찍 퇴원하게 되었고 그제서야 병동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정신과는 사람의 삶과 마음을 보는 진료 과목이다 보니 사람들의 삶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상황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정답이 있지만 동시에 정답이 없다는 것이 어쩌면 정신의학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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