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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기린 Dec 15. 2021

학교폭력, 지워지지 않는 상처

군 복무 중 대인관계 문제로 힘들어하고 정신과적 증상으로 전역까지 하게 되는 청년들을 종종 만납니다. 여럿이 함께 생활하는 밀도 높은 인간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를 할 것을 걱정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을 때면 앞으로의 생활이 송두리째 잘못되어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고도 말합니다. 제가 놀랐던 것은, 군 부적응을 호소한 청년들의 상당수가 학창시절 따돌림 피해를 경험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재구성한 진료 사례를 바탕으로, 학교 폭력의 영향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20세의 A군은 군 생활에서 지속되는 대인 관계 두려움을 주소로 내원하였습니다. A군은 고등학교 1-2학년 때 사소한 다툼이 계기가 되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넓지는 않아도 원만한 교우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A군은 따돌림 이후로 조금씩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어려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학교 입학 후 입대를 한 A군은 새로운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힘들어하였습니다. 항상 주눅이 들어 있었고 긴장한 모습이었습니다. 맡은 일을 하다가 실수해 선임에게 지적을 받은 뒤로는 다들 자신을 싫어하는 것만 같았고 점점 더 위축되어 갔습니다. 내일이 오고 새로운 실수를 할 것이 걱정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고 식욕도 사라졌습니다. 일과 후에 가만히 누워 있을 때면 다들 자신의 험담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 불안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애착을 비롯한 기본적인 인간관계 능력을 익히게 된다면, 또래 집단에서의 관계는 이후에 우리가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밑바탕이 됩니다. 의사소통을 하는 방식, 사회적 집단에서 우리가 담당하는 역할 등의 기초를 이 시기에 배우게 되지요. 그러나 따돌림은 이유 없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는 경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관계의 실패 등을 통해 이러한 기초를 왜곡시킵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면 자신을 미워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먼저 하도록 만듭니다. 내가 어떻게 해도 사람들과 진심으로 가까워질 수 없다는 생각을 심어놓습니다. 왜곡된 기초를 가지게 된 아이들에게, 타인과의 관계는 늘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서로 다른 배경의 낯선 사람들이 모여 매일같이 얼굴을 보며 생활해야만 하는 환경은 이러한 아이들에게 특히 어렵게 다가옵니다.


학교폭력에서 비롯된 대인 관계 문제로 힘들어하는 환자들에게 제가 당부하곤 하는 말을 글로 남겨 보려 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위로이고, 격려이고, 고민 끝에 드리는 조언이기도 합니다.


“학교 폭력은 결코 여러분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해자의 잘못이자, 여러분을 적절히 보호하지 못한 어른들의 잘못이었습니다. 여기에 오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압니다. 제가 공감할 엄두도 내지 못할 깊은 감정들이었을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들이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피해자만이 힘들어해야 하는 현실은 몹시도 억울합니다.


그러나, 여러분께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마음이 정말 좋지 않지만, 잘잘못을 가리고 원인이 가해자와 어른들에게 있었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연습들이 필요합니다. 힘들어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다시 해야 할 일을 안겨주게 되어 미안합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역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문제는 마치 운동을 할 때 잘못된 자세를 익힌 것과 같습니다. 약이나 수술로 단번에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반복된 교정과 훈련을 통해 자세를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두렵고 힘들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 맺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한두 명씩, 소규모의 인간관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입니다. 상처가 덧나며 힘들고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쳐 자세는 교정될 것입니다. 흉터는 남겠지만 더 이상 피가 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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