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병에 걸렸는지 아닌지 아는 것을 병식이라고 합니다. 많은 우울증, 공황 장애 환자들이 자신이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치료를 위해 내원합니다. 반면 조현병, 정신병적 증상을 동반한 양극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개 스스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병식이 없는 경우 치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증상의 호전이 보다 어렵습니다. 알코올 중독은 병식이 없는 질환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가족의 손에 이끌려 내원하지만 자신에게 병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료실에서 있었던 60대 남자 환자와의 대화를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부인 : 이 사람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병원에 왔어요. 매일같이 술을 마셔댄다니까요.
의사 : 술을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드시나요?
환자 : (화를 내며) 어쩌다 하루에 한 병 먹습니다. 그게 이상한 겁니까? 직장생활도 잘 하고 아무 문제 없습니다. 사람을 병이 있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도 아니고, 허 참.
(화난 환자는 진료실 문을 열고 나감)
부인 : 녹색 큰 페트병 있죠. 2리터짜리. 하루에 그걸 하나씩 마셔요. 술을 마시지 않을 때는 항상 짜증스럽고 초조해 해요. 술 문제로 가족들이 난리를 쳐서 본인도 몇 번 끊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었어요. 페트병 하나를 비워야 겨우 잠을 자요. 밥도 잘 안 먹고, 살도 많이 빠졌어요.
술은 음식 문화의 일부분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알코올의 위험성을 간과하곤 합니다. 술로 인한 문제가 질병임을 인식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식사 때에만 곁들이는 반주이므로 괜찮다는 이야기, 건강을 위해 좋은 술로 적당한 음주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변명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알코올은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향정신성 물질입니다. 불안을 조절하기도 하고, 수면을 유도하는 작용도 있습니다. 오랜 기간 다량의 음주를 지속하면 우리의 뇌는 향정신성 물질인 알코올이 몸 안에 있는 상태에 적응해 버립니다. 불안과 수면을 조절하는 기능은 술에 맡겨 버립니다. 사용하지 않는 기능은 퇴화합니다. 깁스를 해서 오랫동안 쓰지 않은 다리 근육이 가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이 상태가 되면, 술을 마시지 않으면 불안을 잠재울 수 없어 초조합니다. 술에 맡겨 오던 수면 유도를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일상 생활을 위해서 술을 마셔야만 하는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금주 시도가 실패로 끝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술을 끊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라져 버린, 퇴화해 버린 기능들을 약물을 통해 보충해 주는 것입니다. 종일 불안하지 않아야, 잠을 잘 수 있어야 금주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뇌가 변한 상태이고 정신과적 질병입니다. 전문의의 진료와 약물 치료를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