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방 과실과 일방 과실 사이에 생긴 일
한 사람의 일방적인 기억에 의존해서 편파적일 수 있지만, 증인의 성향이 객관적인 인물로 신뢰가 높은 편이니 증언에 대한 신빙성도 높다고 판단함.
첫 번째 다툼은 통화가 안 된 것 때문이었죠. 그녀가 저녁 모임 후 평소보다 일찍 귀가해서 걱정할 남자 친구에게 방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며 애정을 표현했으나, L 씨는 카톡을 보지도 않고 잠드는 만행을 저질러 여자 친구 M을 서운한 채로 잠들게 했어요.
다음 날 아침, 그녀의 말에 의하면 비록 어젯밤 행동은 무심했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해서 아침 인사해 줄 그를 예상했기에 기쁘게 아침을 맞았데요. 그런데 예상과 달리 전화도 없이 보내온 문자는 다소 썰렁했고, 오전 안에는 걸려 왔어야 할 전화도 점심시간을 지나고 퇴근 시간이 됐지만 울리지 않았어요. 그녀의 기대는 그저 그녀의 기대였을 뿐이 된 거죠.
무사히 귀가했는지 묻는 전화나 카톡은 연인 사이의 당연한 관심인데, 기본을 안 지킨 것도 모자라 남자 친구를 배려해서 보낸 귀가 인증 사진을 보지도 않고 자다니! 게다가 다음 날 전화도 안 하다니,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만감이 교차했어요. 만감이 교차하든 말든 일과는 진행되잖아요? 어느덧 퇴근할 시간이 됐는데도 L 씨에게 연락이 없자 슬슬 걱정이 시작됐어요. 갑자기 연락이 없으면 그것도 매일 통화하던 연인이 연락 없으면 기분 나쁜 감정이 걱정으로 전이될 수밖엔 없겠죠? 저에게 전화해서 "무슨 일일까?"를 열 번도 더 물었어요. 나, 참, 연애하는 것들이란.
M의 어머니가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해요. 그 후 인생에 느닷없는 불행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고, 전화 안 받는 것에 유난히 예민했어요. 전화를 안 받거나, 전화가 올 시간에 안 오면 초주검이 될 정도로 안절부절못해서 어찌나 안쓰러웠는지 몰라요. 저 같아도 뜬금없는 연락 두절은 기분 나쁘고 걱정됐을 테니 그녀는 어땠겠어요. 퇴근하자마자 저한테 와서 저녁 내내 '무슨 일일까?'를 묻다가 울다가 욕하다가를 무한 반복했고 저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를 무한 반복했죠. 왜 전화를 걸진 않았느냐고요? 전화 안 받는 것에 예민하다고 말했잖아요. 그가 안 한 것도 모자라 전화까지 안 받으면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사고가 떠올라 숨조차 쉬기 어려웠을 거예요. 그런 게 트라우마죠.
온종일 연락이 없어서 '직장에 문제가 생겼나?''접촉사고가 났나?' 등등, 근거 없는 막연한 걱정에 휩싸여 괴로운 시간을 보낸 지 48시간이 지났을 무렵, 그녀는 알아버렸어요. 연락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연락을 안 한다는 걸.
M은 허탈감이랄까? 아무튼. 서늘함을 느꼈어요.
애인의 연락 두절은 잠적이 돼버렸고. 이별 통보가 돼버린 거죠. 첫날은 사진을 안 본 게 서운해서 뒤척이다 잤고, 둘째 날은 걱정돼서 잠 못 들고 뒤척였고, 셋째 날 아침이 밝자 분명해졌어요. 오전 9시면 어김없이 울리던 L의 아침 전화가 삼 일째도 울리지 않는 이유가 L의 마음이 멈췄기 때문이란걸.
상대방의 의도가 분명해지자 마음은 오히려 갈 길을 찾았고 더는 요동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마지막으로 확인한 후 그와의 인연을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사흘 동안 기다려 온 전화를 이번엔 그녀가 걸었어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봤어요. 통화 연결음이 여섯 번 울렸고, 더는 연결음을 듣지 않고 전화기를 껐어요. 그리고 마음을 비웠죠. 가치 없는 슬픔을 반복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네, 이번엔 L 씨가 해 준 얘기를 전할게요.
첫 번째 다툼은 늦은 귀가 때문이었죠. L 씨는 연애를 시작하고 백일도 안 됐지만 남자 친구가 있는데도 전 남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걸 이해할 수 없었죠. L 씨가 그날 저랑 통화한 내용을 들려드릴게요.
"이해가 안 돼. 전 남자 친구 만나는 게 말이 됩니까? 정리할 게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니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나만 속 좁은 남자로 만들어 놓고 본인은 전 남자 친구에게 새 남자 친구가 생겼으니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쐐기를 박으려고 간다? 헤어졌으면 끝난 거지 관계 정리가 뭡니까? 이삿짐도 아니고 뭘 정리한다는 건지."
몹시 불쾌했지만, M이 '별일 아니야. 마지막으로 만나자는데 거절하기도 뭐 해서 보는 거야. 이참에 다신 연락하지 말라고 하려고. 나 믿지?"하고 당당하게 미소 지으며 말해서 어쩔 도리 없이 약속 장소까지 태워다 줬어요.
속 좁게 보이기 싫어서 카톡도 자제하고 혼자 저녁 식사를 하며 연락을 기다렸어요. 그러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됐는데도 M이 카톡도 안 보내서 불쾌함이 서운함으로 번졌죠. 다시 시계는 11시를 가리켰고. 불쾌함이 서운함이 된 자리에서 화가 치밀기 시작했어요. 시계가 11시 40분이 되자. '전화할까? 카톡을 보낼까?' 하다가 그녀가 어디까지 하나 싶어서 오기로 연락을 안 하고 기다렸어요. 12시를 넘기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12시 03초에 카톡 알람이 울리더니 천연덕스럽게 웃는 그녀의 사진이 떴지만, 카톡 창을 열진 않았어요. 괘씸죄가 붙은 거죠. 잠들지 못한 채, 카톡을 보지도 카톡을 보내지도 못하는 불편한 밤을 보냈어요.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도저히 전화할 기분이 안 나서 억지로 아침 문자를 보냈는데, 늦게 들어가서 미안하다는 말은 없이. '왜 사진 안 봤어? 서운했어.'란 그녀의 답장에 참았던 신사 모드가 로그아웃됐고, 그녀의 마음이 가벼워서 자신이 머물 곳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로그아웃한 거죠.
L 씨가 사흘 동안 어땠느냐고요? 그건 자세히 몰라요. 싸우기 전날 M이 전 남자 친구 만나는 게 불쾌하다고 하소연한 후 다시 연락 온 건 나흘 뒤였으니까요. 다만 아까 진술했듯이 흔들린 탄산수병을 막고 있던 마개가 열리면 거품이 용수철처럼 솟구쳐 오르듯이 '서운했어.'라는 말에 화가 치솟아 연락할 마음이 거품처럼 사라졌다는 건 알아요. 임시방편으로 한 이해나 배려는 결국 지뢰가 되죠. 짐작건대 첫날은 화가 나서 연락하기 싫었고, 둘째 날은 '너무했나.' 하는 마음이 들긴 했지만, 다시 연락할 타이밍이 필요했을 거예요. 그녀가 전화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할 수가 없었고 그 이유를 모르는 그는 '내가 안 한다고 너도 안 해?' 하는 그녀를 향한 괘씸죄만 키웠죠.
네, 제가 아는 건 다 말했어요. 더하거나 빼지 않았어요. 연애해봐서 알잖아요. 불길처럼 파르르 떨며 뜨거워지다가 한순간에 찬물 끼얹는 게 연애죠. 사랑이 시작되는 이유도 수백 가지, 사랑이 끝날 이유도 수백 가지. 그나저나 판사님, 누가 더 잘 못 한 거죠? 아니면 누가 더 잘한 건가요?
어? 가타부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일어나시면 어떡해요. 바쁜 사람 불러서 증언을 시켰으면, 사건 판결도 해주셔야죠. 판사님! 한 마디만 해줘요. 쌍방 과실인가요? 뭐야. 실컷 떠들었더니 판결도 안 내리고 내빼고. 나만 또 왔다 갔다 바빴잖아!
자리에서 일어나 회색 벽과 갈색 책걸상으로 쓸데없이 무게를 잡은 방을 나오는데, M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데리러 갈까? 미안해. 우리 때문에 시간 뺏겨서. 15분 후 정문에서 봐. 자기야, 우회전해야지! 끊을게."
연애하는 것들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