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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그 이유 없음에 관하여

웃어 가면서 치명적인 반전을 향해 가는 놀이.

by 단짠

“얘기하러 오셨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하세요.”

“네.”

잠시의 시간이 묵묵히 흐른다.

“하고 싶은데 못 한 말이 많았죠? 그중에 한 가지는 해결하러 오신 거 아닌가요?”

“네.”

“시작하세요.”

맞은편에 앉은 그녀는 잠잠히 재촉한다.

나는 방 안을 둘러본다. 이제야 내가 찾아온 곳을 살펴본다. 책이 가지런히 꽂힌 책장과 선물 받은 것으로 보이는 서툰 그림 액자 그리고 서류들. 이 한 평 남짓의 공간을 찾아온 사람들의 기록이 담겨 있을 서류들. 이제 내 이야기가 기록되겠구나. 감정이 배꼽 아래에서 당겨져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화가 나고 슬퍼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갑자기 사라졌어요. 함께 살던 사람이 사라졌어요.”

“갑자기?”

“네”

“사라진 사람이 누구죠?”

“4년간 사귄 남자.”

“4년간 함께 살았나요?”

“네”

“그런데 갑자기 사라졌다. 화가 나겠네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만 사랑했을 뿐인데...

시작은 언제나 찬란하다. 우리는 쉽게 말한다. 만날 인연은 어떻게든 만나고, 헤어질 인연은 어떻게든 헤어진다고. 역시나 우리의 시작도 어떻게든 만나야 했던 인연이었다. 가을이 풍부해져 가던 무렵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인연은 서로의 마음과 시간을 주저함 없이 공유해갔다. 인연이란 거침이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사랑했는데 헤어질 수가 있죠? 아니, 헤어질 수 있어도 갑자기 사라질 수가 있죠?”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그가 딴생각을 하기 시작한 걸 느꼈어요. 나와 보내는 시간이 자신의 사업을 방해한다고 여기기 시작했죠. 난 그의 마음의 변화를 알 수 있었어요. 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려야 하고, 사업규모를 늘려야 하고.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했죠. 하지만 그런 상황 때문에 그의 변화를 눈치챈 건 아니고, 그의 행동이 변해서 마음의 변화도 알 수 있었어요. 실제 삶은 더 긴데 이야기로 정리하니 아주 짧네요. 우리를 중심으로 흐르던 그의 삶이 그의 욕심과 의무를 중심으로 흐르기 시작했어요. 나와 관계된 시간을 줄여가는 것을 선택했으니까요. 매번.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난 그와 내가 헤어질 때가 됐음을 알았어요. 알 수 있잖아요? 우리는 불편한데도 같이 살 이유가 없는 그냥 연인이니까요. 부부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별에도 예의가 있는 것 아닌가요?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병간호하고 오니 그가 없어졌어요.”

“연락해보셨나요?”

“아뇨. 없는 걸 눈으로 확인했는데. 전화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별을 받아들이는 건가요?”

“네, 나의 의사를 물은 것도 아니고, 나에게 설명도 없이 사라졌으니.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됐죠. 당한 거죠. 이별을”

“갑자기 사라진 그분만큼, 주영 씨도 이상한데요? 보통은 연락하지 않나요? 무슨 일이 있나, 어떤 이유인가 여러모로 알아보지 않나요?”

“그런가요? 그는 우리의 공간을 떠났어요. 말보다 행동이 더 정확한 것 아닌가요? 내가 전화해서 물어보거나 따진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요?”

잠시 침묵이 흐른다. 맞은편의 그녀는 나보다 더 생각에 잠겨서 서류에 무언가를 쓴다.

“주영 씨도 헤어지고 싶었군요.”

침묵이 또 흐른다. 이젠 내가 더 생각에 잠긴다. 슬픔의 침묵이 흐른다. 헤어져야 할 때가 됐음을 알게 된 여자의 차오르는 슬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슬픔이 흐른다. 목이 메어온다.

“네”



“나랑 사귈래요?”

“나랑 사귀고 싶어요?”

“일 년을 망설였지만 살면서 후회할 거 같아서 용기 내요.”

그의 부연설명은 거절할 이유가 없게 만들었다.

“좋아요. 사귀어요.”

“진짜? 후회 안 하겠어요? 나는 나이도 많고 조건도 나쁜데?”

그게 뭐가 대 수지? 내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인연이란 이렇게 수월하게 낯선 타인에게 삶의 주인공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었다. 서로의 삶에 주인공이 되어 반짝였던 우리의 나날들. 누구나 그러하듯 연애란 가장 즐거운 놀이이다. 웃어 가면서 치명적인 반전을 향해 가는 놀이. 예고편을 이미 보고 시작하면서도 ‘우린 아닐 거야’ 하고 속아버리는 기묘한 놀이.

그러나 결국 우리가 헤어진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들 때문이었다.



“네, 헤어지고 싶었어요.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헤어져야 할 이유가 분명했군요,”

“네”

“그분도 같은 이유로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겠네요.”

“네?”

질문에 대한 답을 진지하게 찾는다. 기억을 정리한다. 솔직하게.

“아마도요. 둘 사이에 놓인 문제에 대해 솔직히 대화를 하지 못했어요. 건드릴 수 없었어요. 서로의 처지가 달랐으니까요. 내가 이해해 줘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고 나도 그렇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러나 이해를 강요당할 수만은 없었어요. 그렇지 않나요? 이해에도 한계치가 있는 것 아닌가요? 그는 내게 점점 더 많은 이해를 강요했어요. 그가 미안해하던 것들을 당연시하면서 난 작아지기 시작했어요. 배려와 부탁이 아닌, 당연시하며 우리의 관계에서 빼기를 계속해 나갔어요. 시간을 빼고, 마음을 빼고, 그의 삶의 지킬 것들 속에 우리의 사랑은 압류딱지가 붙어버렸어요. 내가 어둠 속에 갇혀버린 것 같았어요. 그래서 살기 위해 부끄럽지 않게 부모님이 주신 나답게 살기 위해 헤어져야 했어요. 그런데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얼마나 많은 날을 울어야 했는지 몰라요.”

점점 격앙되어 가던 나의 말투가 어느새 들릴 듯 말 듯 작아졌다. 맞은편에 앉은 그녀가 물을 한 가득 부은 잔을 건네 온다.

“삶도 사랑도 대단하지 않아요. 인간이 하는 거니까요.”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눈물이 뜨겁게 흐른다. 심장에 차오른 슬픔이 눈물 온도를 높인다.


“그분이 사라진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짐작할 수 있어요. 주영 씨도 알고 있죠?”

“네. 행동이 알려주니까요. 그것이 결과니까요.”

“주영 씨는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고 싶어 했죠? 연락 안 한 건 잘하신 것 같아요. 고통스러운 탱고를 출 수는 없다는 걸 잘 아시는 분이니까요.”

“네, 헤어져야 할 사이는 어떻게든 헤어지나 봐요.”

맞은편에 앉은 그녀와 처음으로 길게 눈을 마주쳤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셨나요?”

“네, 그와 내 마음이 시작처럼 끝도 같았네요. 이제 화나지 않아요. 한동안 슬프긴 하겠지만”

“주영 씨를 위한 선택을 이어가길 응원하겠습니다.”

사랑을 시작할 땐 둘이 함께였다. 사랑을 끝낼 때는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방법으로 혼자가 된다.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사랑이 지나가 버리는 이유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찬란했으면 된 것이다.

그 무렵 금빛도 아닌 것이 금빛처럼 빛났던 은행나무 아래로 찾아가야겠다. 이제 그 날의 은행나무는 아니겠지? 나무는 한결같이 서 있지만 날마다 다르다. 날마다 새로운 숨을 쉬고 있다.

연인의 마지막은 이별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숨을 쉬기 위하여.



기분으로 감지되는 많은 것 중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사랑과 이별. 둘 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 박 아민의 단짠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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